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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죽었다'라 말한 니체 앞에서

필사백 Day_49

by 엘샤랄라

"많이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결국 문제가 된다."

-프리드리히 니체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종종 종교에 몸을 담았었다. 그 중심은 대부분 기독교였고, 친척 언니와 결혼할 형부 따라서 한 번, 동네 피아노 학원 원장 선생님 따라서 한 번, 고3 말부터 사귀었던 남자친구 따라서 한 번, 사회에서 함께 공부하면서 만난 언니와 한 번, 그리고 삶의 중간중간에 지금은 남편이 된 남자와 한 번, 아이들 데리고도 한 번, 이렇게 주기적으로 기독교와 그 결이 닿았었다. 비록 한 교회에 오랫동안 다니면서 정착하지는 못했지만, 그간의 경험으로 온 우주에 분명히 '신은 존재한다'라고 믿는다. 어떤 교회를 나가든, '신의 존재'를 내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 마음이면 언제든지 다시 신을 찾고 싶을 때 상황에 맞춰 교회를 찾으면 될 일이다. 교회가 아니어도 된다. 신의 형태가 꼭 예수님이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나의 종교 이력 가운데 유독 영성이 풍성했던 시절이 있는데, 내 인생에 풀어야 할 문제가 가득했을 때 특히 그러했다. 학생으로서 '공부'라는 문제를 붙잡고, 그렇게 나는 기도를 했다. 나의 마음을 정복하고, 온전한 지력을 발휘하게 해달라고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공부하면서 중간중간에 기도를 한다. 시험을 보는 주간에는 아침에 학교를 가는 그 순간에도 간절히 기도한다. 오늘 나의 시험이 어떠하기를. 그렇게 간절히 기도함으로 내 능력의 최대치를 뽑아내고 싶었다.


그리고 이십 대가 되어 나는 다시 홀로 새벽기도에 나섰다. 해가 뜨기도 전에 같이 공부하던 언니로부터 알게 된 교회로 향한다. 바람이 옷깃 사이로 스며들지 않도록 목도리를 칭칭 둘러메고 자전거를 타고 갔던 그 길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 찬 공기가 코로 들어오는 것조차 버거웠던 겨울이다. 그 겨울의 새벽문을 열 정도로 다급했던 나의 기도제목은 불의의 사고로 절망에 빠져 허우적대는 아버지를 위한 기도를 하기 위해서였다. 부디 그 늪에서 속히 빠져나와 가족이 다시 화기애애하게 웃게 해 주시라고 간절히 바라는 기도였다.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닌 순전히 아버지를 위한 기도였다. 그때의 새벽기도가 정확히 얼마나 지속되었었는지는 기억이 없다. 다만 분명했던 건 아버지를 위한 기도였지만, 아버지는 그 뒤로도 한 동안 변화가 없었고, 나는 그저 기도를 통해 조금은 마음을 달래며 평정을 찾고 아버지를 대했다는 사실이다. 나는 문제를 붙잡고 있었지만, 얼마나 오랫동안 그 문제를 붙잡고 있어야 하는지 확신 할 수 없었다. 또한 어떻게 구체적으로 아버지를 도울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지속된 기도로 깨닫게 된 바는 내가 여기서 무너지지 않고, 내려놓지 않고, 나의 길을 묵묵히 나아가며 내 삶을 성실하게 꾸려 나가고 있다면 언젠가 나의 든든한 아버지가 다시 돌아오시리라 믿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라는 사실이었다.


신이 존재함으로 누군가의 삶을 구제해 준다면, 그는 내가 아닌 나의 아버지에게로 가야 하는 법이었다. 나의 아버지에게로 당장 향하여 그를 구원해 줄 일이었다. 나의 신은 나를 구원해 줄 뿐이었다. 암울한 가정 분위기 속에서 그래도 어쨌든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 보겠다는 바로 그 구원은 나에게 왔다. 그리고 그렇게 세월을 버텨냈고, 버텨낸 세월이 한해, 두해 쌓이면서 서서히 변화는 시작되었다.


구순이 되신 친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가족과 친지들이 목포항 근처의 한 장례식에 도착했다. 할머니는 신실한 기독교 신자셨다. 처음부터 할머니가 기독교 신자는 아니었던 것으로 안다. 신안 장산도 안에 개척 교회가 자리 잡게 되면서 할머니도 자연스레 기독교 신자가 되셨을게다. 할머니가 천국으로 가셨다 믿으며 그렇게 장례를 치렀다. 한평생 농사일만 하다 가신 할머니. 바로 그 할머니 덕분에 우리 가족은 해마다 쌀이며, 고추장이며, 자연산 굴이며 아낌없이 받아먹었다. 고3 수시에 붙고 홀로 할머니를 찾아뵈었을 때 할머니는 나의 존재 자체를 사랑해 주신 분이었고, 하얗고 보드라운 나의 발등을 쓰다듬으며 그 조차도 예쁘다 해주신 분이었다. 어느 정도 크고 나서는 나의 부모님조차 만져 주실 기회가 없었던 바로 그 발등을. 내 몸뚱이 중에서 겹겹이 싸고 있어 쉽게 드러내지도 않거니와 또한 쉽게 눈길 주지 않게 되는 바로 그 발등을 할머니는 살포시 어루만져 주며 연신 '예쁘다, 예쁘다, 곱다, 곱다.' 해주셨다. 그 한마디가 내 평생 나를 잡아주는 사랑을 품은 말이 되었고, 그 말속에 예수님이 따로 없으셨다. 그런 할머니가 천국에 가셨다.


그리고 모든 변화가 시작되었다. 몸이 다쳐 도시에서 자신의 쓸모를 몰라 허송세월 하던 아버지는 할머니의 장례식에서 터를 잡고 계신 작은 아버지와 상의 후에 곧 시골로 내려가셨다. 아버지가 시골로 내려가시게 된 계기에는 남편의 입김도 크게 작용했다. 그렇게 삼박자가 맞았다. 그 뒤로 아버지는 할머니가 머무시던 오래된 한옥을 손수 고치셨다. 세월이 묵힌 쓰레기를 치우고, 쓰러져 가는 한옥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시작하셨다. 큰 공사를 위해 사람을 몇 번 부르는 것 빼고는 대부분 아버지가 직접 손을 보셨다. 장장 일 년이 넘게 걸린 대장정이었다. 내가 초등학생 때에는 건축 사업도 하셨던 분이라 진행에 거침이 없으셨다. 서서히 살만한 집의 형태를 띠기 시작하는 한옥의 모습처럼 아버지 또한 얼굴에 생기를 되찾기 시작하셨다. 수염이 덥수룩하게 얼굴을 덮어 몰골은 말이 아니었지만, 웬일인지 말도 많아지시고 우리가 다가가는 것에 대해 이전처럼 거부감을 보이지 않으셨다. 그렇게 공사는 예정대로 진행되었고, 이제 그곳은 장산도의 민박집이 되었다. 아버지의 사업은 아직 진행 중이다. 곧 봄을 앞두고는 자식들 챙겨준다며 씨암탉도 사들이고 버섯도 키우실 예정이시란다. 작년에는 흑염소도 우려서 보내주셨다. 민박집 앞으로 땅을 더 사서 차박 할 수 있는 공간도 꾸며 놓으셨다. 못하는 게 없으시다. 자신의 쓸모를 찾아가시면서 나는 다시 아버지의 넉넉한 웃음과 언제나 나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시는 아버지를 되찾았다.


20대 중반에 간절히 해결하고 싶었던 그 문제는 비록 서른 중반이 되어서야 해결되었다. '신은 죽었다'라 말한 니체 앞에서 신을 만났던 나의 경험을 털어놓으면서 결국 자신을 구원하는 건 오롯이 자신인 건지 묻게 된다. 신이 아버지에게로, 혹은 할머니의 모습을 한 신이 아버지에게로 닿은 건지 알 수 없다. 어쨌든 아버지는 자신을 구원해 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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