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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마흔, '새벽기상' 아니고, '새벽 글쓰기'

by 엘샤랄라

"용기는 사람을 죽이지 않고,

더욱 강하게 만든다."

-프리드리히 니체




20대에 강사일을 시작했다. 보통 퇴근 시간이 10시다. 과외가 있는 날은 12시를 넘겨 귀가한다. 수업을 마치면 허기가 져서 간단하게 이것저것 챙겨 먹게 되고, 소화시키고 잠들면 새벽 두세 시를 넘기는 일은 다반사다. 30대의 스케줄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마지막 수업이 끝나면 11시 30분, 수업을 마치면 몸은 피곤하지만 되려 정신은 또렷해진다. 가족들이 잠든 틈을 타서 나만의 시간을 가지다 보면 어느새 새벽 2시다. 그랬던 내가 나이 마흔에 다시 '아침형 인간'이 되어보고자 마음을 먹었다.


새벽 기상은 나에게 사실 그리 유별난 일은 아니었다. 0교시가 있던 시절, 수업 시작 전 이삼십 분의 여유를 갖기 위해 자발적으로 일찍 일어났다. 주말에는 도서관 자리를 잡기 위해 강제 새벽 기상을 해야 했다. 도서관 문을 여는 시간이 새벽 6시니, 그전에 일어나 준비해서 나가야 새벽 6시에 도착한다. 지금처럼 전자동시스템이 확보되어 있지 않았기에, 그저 매번 선착순이었다. 어쩌면 바로 그 시스템이 나를 움직이게 했을지 모른다. 그 누가 시킨 것은 아니었지만, 잘 땐 자야 하고 벼락치기는 또 성격상 맞지 않아 선택한 길이었다. 그 덕분에 나름 대단한 사교육 없이 인서울의 대입문을 열게 되었다 생각하고 있다.


학부 시절, 기상 시간은 더욱 빨라졌다. 서울로 나가는 지하철이든 버스든 출근시간과 겹치면 지옥이 따로 없었다. 내 몸이 나의 자유의지로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라 군중의 무리 속에서 알아서 발길을 재촉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떠밀려 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때 알았다. 1호선에서 2호선으로 무사히 갈아타고, 서있노라면 이건 아이들과 하던 신문지 게임이다. 신문지를 반으로 접고 접어가며 얼마만큼의 크기에서까지 버틸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바로 그 게임. 딱 두 발로 서있을 만한 바로 그 손바닥 두 개만 한 크기가 나에게 허락된 공간의 전부다. 그 마저도 양쪽으로 자리를 잘못 잡으면 한 발은 애매하게 붕 뜬다. 이건 수업을 듣다 지치는 것이 아니라 들으러 가기 전에 이미 지치는 게임이었다. 안 되겠다 싶어서 시험기간에는 삼화고속버스를 이용했다. 첫차 시간이 새벽 4시 이후에 있었다. 그 시간이면 편하게 앉아 가면서 눈도 붙일 수 있다. 동이 트기도 전, 그렇게 학교로 향한다. 클럽데이가 있었던 날이면 학교 주변에 술이 덜 깨서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사람도 볼 수 있었다.


밤공기보다 새벽 공기가 좋았다. 하루를 일찍 시작함으로 얻는 여유가 좋았다. 시간에 끌려가는 느낌이 아니라 시간을 끌고 간다는, 주도한다는 기분이 좋았다. 그 기분을 다시 느껴보고 싶어 나이 마흔에 무작정 새벽기상을 시도했다.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새벽에 일어나야 하는 이유보다 일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더 많았다. 그 화살은 항상 나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로 향했다. 주로 남편이었다. 남편의 이른 귀가를 종용하기 시작했다. 사실 남편의 귀가가 늦어져도 나는 나대로 자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았다. 계획한 대로 되지 않자 감정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래도 꾸역꾸역 해나갔다. 나는 몰랐는데 나름 그때 '새벽 기상' 붐이 일었던 듯하다. 그 분위기에 이끌려 어영부영 일어났다. 새벽기상이 주는 장점을 만끽하면서도 결국 그해 후반 체력의 한계를 맞닥뜨리게 되었다. 회의감이 몰려왔다. 재정비가 필요했다. 자는 대로 자고, 충분히 자면서 나만의 바이오 리듬을 다시 찾는 시간이 필요했다. 아이들이 등교할 때에는 그나마 오전에 여유 시간이 있으니, 그때 일을 보자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방학이 되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나만의 온전한 시간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정신없이 일을 하며 아이들까지 챙기면서 방학을 보낼 때면 어느 순간 내가 지쳐있다. 짜증이 늘어있다. 처음에는 그 이유를 몰랐다. 내가 사랑하는 아이들을 더 오랫동안 마주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인데, 그런 감정이 든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아이들과 자체적으로 거리 두기를 원하는 나의 모습이 낯설었다. 그러다가 문득 깨닫게 된다.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는 고요한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래서 다시 '새벽 기상'을 시작했다. 그러한 패턴을 알고 나자, 전략적으로 학기 중과 방학 중을 나눠서 새벽 기상을 했다. 하지만 오전에 하나씩 하나씩 나의 루틴이 잡히면서 이제는 학기 중에도 새벽기상을 한다. 적층식으로 루틴이 잡히니 시간블록마다 해야 할 일이 분명히 정해진다. 순서가 정해진다.


일어나자마자, 나의 공부방으로 향한다. 글을 쓴다. 두 시간 정도 꼬박 고요 속에서 집중하는 시간을 보내고 나면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다. 나의 뇌를 청소하고 나온 기분이다. 무엇을 써야 할지 한참 생각하는 경우도 많지만, 그 고비만 넘기면 어느덧 나는 글을 쓰고 있다. 문장과 문장이 연결되고, 다시 문단이 되어 '발행' 버튼을 누르는 순간이 결국에는 온다. 오직 이 '하나'를 마치면, 그날 하루 나머지 일정은 이제 일사천리다. 아침을 준비하고, 수업을 한다. 이제 곧 개학하게 되면 옷을 차려입고 바로 산으로 갈 예정이다. 글쓰기를 공부하고, 한국무용을 배우러 나갈 것이다. 그 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것에 집중함으로 나는 매일 더 자유로워지고 있다.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하루를 모두 소진하니, 하루하루가 정말 선물이다. 그 시작은 새벽기상이고, 단순한 새벽기상이 아닌 '새벽 글쓰기'에서 비롯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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