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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샤랄라 Feb 02. 2024

'일당백'하는 사람

이 사람을 생각하면 '일당백'이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분명 '일당백'이라는 단어의 뜻은 한 사람이 백 명을 당해낸다는 뜻임에도 불구하고, 요즘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 단어의 뜻이 흡사 하루 일당 '백만 원'의 가치라고 들리기도 합니다. 하루 일하고 받는 '일당'이 요즘은 얼마인지 모르겠으나, 보통 10만 원은 훌쩍 넘는데 백만 원의 가치라니 놀랍긴 하지만, 저는 그런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바로 저희 어머니와 아버지입니다. 지금은 은퇴를 하셨지만, 저희 부모님은 중식당을 운영하시며 저와 남동생을 키우셨습니다. 크지 않은 가게였지만, 제법 장사가 잘 되었습니다. 저 또한 초등학교 때부터 바쁜 부모님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리고자 가게에서 종종 도와드리곤 했습니다. 앉아 있을 새도 없이 바쁜 하루를 함께 보내면서 저는 그 안에서 부모님의 노고를 고스란히 온몸으로 겪었죠.


지금 돌이켜 보면, 바로 그때 저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일당백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침부터 부모님은 참으로 바쁘십니다. 장사를 시작하기 전, 아버지께서 장을 봐 오시면 가게문을 열고 주변을 정돈한 후에 하루 장사를 준비하십니다. 장사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손이 가지 않은 일이 없고, 허투루 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그날 공수해 온 신선한 야채들을 바로바로 요리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일만도 꽤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볶음밥용 야채 손질 따로, 짜장 볶을 야채 손질 따로, 잡채밥과 짬뽕용 야채가 모두 다르게 손질되어야 하니까요. 요즘에는 껍질이 모두 손질된 양파가 나와서 그나마 수월해진 편이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양파 껍질도 손수 까야했습니다. 저도 자주 도와드렸지만, 정말 양파는 깔 때마다 눈물이 납니다. 결코 친해지려야 친해질 수가 없더랍니다.


라디오 소리와 함께 아버지와 어머니는 부지런히 칼질을 하십니다. 간간히 만두가게 아저씨, 단무지 가게 아저씨 등 중식에 필요한 물건들을 대주시는 분들이 가게를 들러 물건을 놓고 간다는 소리가 들립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와 함께 아버지의 칼도 함께 장단을 맞추십니다. 아마도 어머니는 옆에서 면을 뽑는 일도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날 하루 필요한 면을 손수 반죽하셔서 면을 뽑기 좋은 두께로 차곡차곡 준비해 놓으십니다. 그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제가 들어가도 될만한 큰 솥에 면 삶을 물도 미리 끓여 놓으시고요.


이제 손질된 야채로 어머니나 아버지께서 짜장을 만들 차례입니다. 큰 웍에 정성을 담아 손질한 야채를 가득 부어 힘차게 볶으신 후, 춘장을 넣고 천천히 천천히 짜장을 볶으십니다. 장사를 개시한 이후 잠시 앉아서 숨 돌릴 틈이 없습니다. 점심시간이 되어 손님들이 몰려오시기 전에 모든 준비를 마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준비를 마치면 바로 그제야 30분도 안 되는 시간에 아침을 후다닥 드셨습니다. 그때 첫끼를 드셨습니다.


평일에는 그래도 무난한 편이지만, 주말 점심시간에는 홀에도 손님들로 북적거립니다. 때맞춰 전화통도 불이 납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주문이 들어온 즉시 음식을 만들기 시작하십니다. 홀로 나갈 음식은 쟁반 위로, 배달로 나갈 음식은 탄탄히 랩으로 싸서 배달통으로 들어갑니다. 면이 불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배달은 신속배달입니다. 부모님 모두 요리를 하실 수 있었기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로바로 음식을 준비하셨습니다.


배달이 밀리면 아버지께서는 음식을 하시다 마시고 배달을 가시려고 뛰쳐나가십니다. 배달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계절에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면 왜소한 체구의 어머니는 그 큰웍을 온 힘을 다하여 들었다 놨다 하시며 음식을 하셨고요. 제가 있는 날이면 홀서빙이라도 도와드리니 다행이지만, 종업원 없이 두 분 이서만 일을 하셔야 하는 날은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그 좁은 곳에서 어찌나 이리 뛰고 저리 뛰시며 주문을 받아 내셨을지 말이지요. 그래서 어떤 날은 전화수화기를 아예 내려놓으시고 일하셨습니다.


음식이 나가서 돈을 받으면 끝이 아닌 장사가 바로 중식업입니다. 요즘이야 일회용기가 너무 잘 나와서 일반화되었다지만, 그때는 모두 그릇이었지요. 단 한 그릇이라도 배달해 주던 시대였지요. 배달 나갔던 그릇을 회수해 와서 깨끗하게 손수 일일이 그릇을 비우고 설거지를 하기 위해 분류합니다. 쓰레기도 일일이 분류해서 버렸습니다. 정말 제 허리춤까지 쌓인 그릇들은 설거지를 해도 해도 줄어들 기미가 보이질 않습니다. 조금이라도 쉬시라고 열심히 설거지를 돕고 나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습니다. 날씨가 조금이라도 더운 날이면 설거지만 했을 뿐인데 땀에 흠뻑 젖습니다. 한 자세로 서서 설거지를 했으니, 허리도 쑤십니다. 그 모든 일도 부모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단 하루를 일하셔도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장사가 됩니다. 그런 하루하루를 보내시며 저와 남동생을 키우셨습니다. 쉬는 날이라곤 설날 명절 당일과 추석 명절 당일뿐이었습니다. 학교 행사가 있는 날이라 하더라도 잠깐 참석하시고 또 앞치마를 두르셨지요. 그러한 부모님의 뒷모습을 보며 자랐습니다. 어쩌다가 친구들이 놀러 오면 하루 종일 일하시느라 기름에 찌든 엄마의 앞치마를 보면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사춘기가 되니, 우리 엄마 손은 왜 다른 엄마들 손 같지 않게 거칠고 두껍기만 한지 속상했습니다. 눈썹 진하고 잘생긴 우리 아버지는 양복을 입는 날이 드문지 왜 그럴 수 없는지, 왜 두 분은 주말에도 일을 하셔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만큼의 세월이 흘러 마흔을 넘기고 저는 자꾸만 그때의 기억이 더욱 생생해집니다.


저와 남동생이 너무 어려서 저희들에게는 털어놓을 수 없었던 삶의 힘겨움을 이제는 제가 조금 알아드릴 수 있는 나이대에 접어들어서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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