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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가 끝난 뒤 남은 정적과 고독을 대하는 자세

by 엘샤랄라

연극이 끝나고 난 뒤 혼자서 객석에 남아

조명이 꺼진 무대를 본 적이 있나요

음악소리도 분주히 돌아가던 세트도

이젠 다 멈춘 채

무대 위엔 정적만이 남아있죠

어둠만이 흐르고 있죠



나는 영화감상이 취미라고 하기에는 딱히 이렇다 할 취향이 없다. 보통의 흥미와 감정선에 충실하게 영화를 고를 뿐이다. 나도 모르는 스트레스가 가득 쌓였을 때에는 생각 없이 보는 액션 영화가 좋다. 영웅의 탄생을 알리는 영화는 또 그 나름 유치한 감동에 벅차오르게 한다. 거부할 수 없는 욕망을 자극하여 주인공이 파국에 이르는 영화는 역설적으로 일상의 고요함과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해 준다. 공상과학영화도 무척이나 좋아한다. 인간의 상상력의 끝은 어디까지일까라는 감탄을 불러일으키고, 볼거리가 많으니까.


이렇게 좋아한다는 영화가 참 많다. 특정한 영화를 고집하지도 않거니와, 선입견도 없어서겠다. 너무 어려운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독립 영화'조차, 볼 때는 지지리 아무런 자극도 없고, 재미도 없는 것 같은데 영화의 특정 장면이 잔상으로 남아 오래도록 나를 괴롭히고 사유하게 만들기에 세월이 흐를수록 그 가치를 인정하게 되는 장르다. 그러한 장면 중 하나가 학부 시절 교양 시간에 봤던 한 영화에서 주인공이 열심히 일하는 개미들의 무리를 쪼그리고 하염없이 바라보는 장면이다. 그 컷을 영화에 담았는데, 이 한 장면은 나에게 그대로 박혀서 종종 나를 못살게 군다. 이렇게 조용하게 사람의 의식을 점령하는 효과가 가장 큰 것은 사실 '독립 영화' 인 듯하다. 이렇게 나는 이 영화도 좋고, 저 영화도 좋다 한다. 똑 부러진 취향을 파악하는데 필요한 식견이 아직 한참 부족하다.


그런 내가, 하루 일과를 마치고 숨을 돌리려 넷플릭스에 들어갔다가 '친구'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다. 세상은 떠들썩하게 이 영화를 극찬했지만, 내가 아는 친구는 모두 '짤'이다. '짤'들이 모여 나도 이 영화를 봤다고 착각한다. 어떤 생각이었는지, 며칠 전에는 이 영화가 보고 싶어졌다. 조금은 진지한 자세로 보고 싶어졌다. '▶Play플레이'


물론 결국 끝까지 보진 못했다. 끝까지 보겠다고 다시 들어가려면 며칠 혹은 몇 달 더 걸릴 수도 있겠지만, 수확은 있다. 바로 여자 주인공이라 할만한 '진숙'이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다. 영화 속 프레임에 프레임에 프레임이 겹쳐진 것 같은 이 한 장면. 감독의 렌즈라는 프레임에 무대 위에 오른 진숙이라는 프레임을 하나 더하고 그녀가 부르는 노래 가사가 또 프레임을 더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라는 프레임까지.


가장 찬란하고 아름다웠던 시절 무대 위의 진숙과는 대조되는 노랫말은 심장이 떨려 오면서도 슬프다. 수많은 남학생들의 심장 박동수를 최고조로 끌어올린 이 순간에 어느 것 하나 부러울 것 없는 바로 이 순간에 그녀가 부르는 노래는 공허하다. 한 번쯤은 무대 위에 오르고 싶은 우리네 열망, 인생에서 나에게도 한 번은 '한방'이 있지 않을까 하는 하는 소망들은 우리의 마음을 홀린다. 무엇이 진짜인가. 무대 위에 오른 내 모습일까, 연극을 모두 마친 뒤의 내 모습이 진짜일까.


둘 다 내 모습이다. 하지만 '나'라는 사람을 꼭 붙잡아 주는 힘은 바로 무대가 끝난 뒤 내 모습이다. '정적만이 남아 있죠, 고독만이 흐르고 있죠.' 내게 남은 정적과 고독, 바로 그 시간에 나는 다시 무엇을 하는가 그게 무대 위의 내 모습을 만들어 낸다. 그 정적과 고독을 즐기지 못하고, 다시 무대 위에서의 삶만을 꿈꾼다면 그건 허상이다. 결국 바닥이 드러나게 된다. 비참해진다. 외로워진다. 내가 가야 할 길이 아닌 다른 길을 기웃거린다. 후회한다.


나에게 남은 정적과 고독을 이제는 나만의 방식으로 채워 나가고 있다. 그 시간에 풍부하게 사유하고 즐기고 놀 수 있는 나를 보면서 나는 이제 '무대 위에서 연극을 하는 삶'을 덜 부러워하게 되었다. '덜'이다. 혹은 '부러워하지 않는다.'라고 할까. 부럽다기보다는, 정적과 고독을 이겨내고 올린 무대의 진정한 가치를 인정하게 되었다고 하는 편이 더 나을까.


그래서 나도 막연한 시샘과 조금은 삐뚤어진 시선을 거두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뜨거운 박수를 보내는 법을 조금은 알았다 말하는 편이 낫겠다. 다만 배우가 누가 되었든, 배우가 온전히 자신의 고독과 고뇌와 정적을 견딘 흔적이 보인다면. 그 흔적이 없다면 나는 인정 못하겠다. 삐뚤어진 시선을 쉽게 거둘 수는 없겠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에게 먼저 증명해 보여야 한다. 삐뚤어지는 게 싫어서.



2023년 12월 14일, 블로그에 올렸던 글의 일부를 편집하여 브런치에 다시 올린다. 오늘 내가 접한 니체의 문장과 결이 닿는 것 같아서. 이 날 이후로도 나는 지금까지 꾸준히 글을 쓰며 진실로 나를 사랑해 주는 방법을 매일 증명해 내고 있다. 그렇게 글을 씀으로 외적인 어떤 보답을 받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내적인 보답은 분명히 받고 있음을 거리낌없이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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