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괴로웠던 시기에
어쩌면 나는 가장 많이 그리고 더 크게
웃었다.
모두가 잠들어 고요한 시간에
우리 집은 갑자기 소란스러워진다.
친구들과 술 한잔하고 늦은 시간 들어온 아버지는
그동안 마음속에 묵혀 두었던 말들을
거침없이 쏟아 내신다.
그 말들은 뾰족하고 거칠어
다시 엄마에게 상처가 된다.
어르고 달래던 엄마의 인내심도
결국 한계에 다다르고, 그저 조용히 받아주자니
자존심이 상한지 결국 목소리가 커진다.
그때 나는 알았다.
방마다 문은 있지만, 그 문은 공간을 나누기 위함이지
소리를 나눌 수는 없다는 것을.
한참의 소란 끝에 찾아오는 '적막'은 평화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다.
하지만 학교는 가야 한다.
수업종이 울리고 하루 일과가 시작된다.
간밤에 있었던 일은 아련하게 느껴지며,
일순간에 나의 기억 속에서 잊힌다.
친구들과 선생님의 이야기는 간밤에 내가 들었던
말들에 비하면 너무도 재미있다.
이야기에 빠져서 신나게 웃다 보면
이제 나는 가벼운 솜이다.
두 아이를 낳고도 한 달 뒤에 바로 일을 했다.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몸은 아직 부어있고
젖이 차올라 내 몸은 다시 '물에 젖은 솜'이 되었다.
어떻게든 활력을 되찾아보려 애를 쓰지만
하루 종일 아이 기저귀 갈고, 젖먹이고, 재우다 보면
혼이 쏙 빠진다. 멍해진다.
그러다 오후 5시, 수업을 해야 하는 시간이 가까워진다.
내 몸은 아직도 물에 젖은 솜이다.
하지만 수업을 시작하면서 멍했던 정신이 돌아오고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에도 박장대소하며
받아주는 학생들을 보고 있으면,
나도 함께 웃게 되므로 내 몸은 점점 가벼워진다.
아이 키우느라 고군분투했던 다큐멘터리가
수업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풀어놓으면
어느새 시트콤이 되어 있었다.
가장 힘들다 생각했던 그 시절,
나는 항상 그 어느 때보다 쾌활했다.
눈물이 쏙 빠지도록 웃고
그 웃음이 만들어 낸 에너지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성실하게
일상의 쳇바퀴를 굴리며 여기까지 왔다.
세상을 향해 웃으면 함께 웃고,
웃으면 복이 오고,
웃을 일을 만들면 더 웃을 일이 생기는 건
그저 좌절한 사람들에게 지극히 피상적으로
헛된 희망을 던지기 위해
만들어 낸 말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