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읽었던 <데미안>을 다시 펼쳤다.
첫 장부터 낯설다.
어쩌면 내가 읽었던 <데미안>은 청소년을 위해
다소 쉽게 쓰인 책이 아니었나 싶다.
글의 초반부, '서문'이라 해야 할지.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길의 추구, 오솔길의 암시다.
일찍이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이 책의 후반부, 다시 니체가 등장한다.
대학에 들어간 싱클레어는 한 동안 니체에 푹 빠졌다.
"그러나 나는 자유로웠다.
나 자신을 위해 온 하루를 쓸 수 있었다.
.... 내 책상 위에는 니체가 몇 권 놓여 있었다.
니체와 함께 살았다.
그의 영혼의 고독을 느꼈다.
그를 그침 없이 몰아간 운명의 냄새를 맡았다.
그와 함께 괴로워했다.
그토록 가차 없이 자신의 길을 갔던 사람이
존재했다는 것이 행복했다."
두 번째 이십 대를 맞이했던 마흔 즈음, 나는 지워지고 있었다. 책을 좋아해서 항상 책을 읽고 있었지만, 그 책이 좋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다. 내가 어떤 공간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어떤 활동을 하면 즐거운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전형적인 TJ였던 나는, 매번 이번 일 다음에 해야 할 일, 해야 할 일 다음에 또 해야 할 일의 연속인 삶을 살고 있었다. 그 해야 할 일이 곧 나의 쓸모를 증명하는 길이었고, 그 쓸모를 증명해야 살아있음을 느꼈지만 어쩐 일인지 그렇게 하루를 쓸모 있음으로 채울수록 마음은 답답해져 왔다.
하루가 철저히 나의 계획하에 움직이고 있었음에도 나는 일말의 자유를 느끼지 못했다. 내 마음대로 전두지휘 하고 있었음에도 정작 나 자신은 옴짝달싹 못하는 지극히 아이러니한 상황 속에 빠져 허우적댔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나를 가둔 건,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었다. 내가 아닌 나의 아이들과 가족, 그리고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해야 하는 일들로 일주일을, 일 년을, 십 년을 꽉 채워 보냈었다. 그리고 탓을 했다. 엄마니까, 아내니까, 강사니까.
내 안의 '나'는 아주 간절히 외치기 시작했다. 풀어 달라고. 이제 그만 '해방'시켜 달라고. 그 문의 열쇠는 내 손에 쥐어져 있었다. 처음에는 눈물로 참회했다. 그리고 하나씩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의 이야기를'
쓰기 위해 나는 조용히 앉아 생각해야 했다. 단순히 스케쥴러에 일정을 적어 놓거나 단상을 적어 놓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한 편의 글을 썼다. 진정으로 고독한 시간 안에 나를 넣어두고 내 안에 침잠하기 시작했다. 마음껏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함으로 나는 조금씩 나를 풀어주는 방법을 깨우쳤다. 내가 원하지 않았던 욕망 덩어리를 구분하여 볼 수 있게 됨으로 하나, 둘 떼어낼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그 누구보다 당당해 보였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웅크리고 있던 나의 손을 잡아 주었다. 그리고 밖으로 끌고 나와 빛을 쬐어 주었다. 너무도 커져있던 '사회적 자아'의 크기를 줄이고, 진짜 내 모습을 키워 나갔다.
도서관으로 향하는 발걸음, 그 안에서 서가를 두리번거리며 읽고 싶은 책을 고르는 내 모습, 그 어떤 제약에도 구애받지 않고 마음껏 책을 이야기하는 시간, 완전한 고요 속에서 나의 생각의 문을 열고 글을 쓰는 나, 나, 나로서의 나, 나 자신이 되어가는 나. 내 삶의 목적을 날마다 새롭게 깨우쳐 나가는 하루다.
나의 책상 위에는 니체가 몇 권 놓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