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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은 취향 커밍아웃

by 엘샤랄라

1996년 SM 엔터테인먼트 소속의 아이돌 그룹이 데뷔했다. 바로 H.O.T. 나는 그때 초등학교 6학년이었고, 학교에 가면 아침마다 친구들은 H.O.T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그리고 1년 뒤에 바로 젝스키스라는 새로운 남성 아이돌 그룹이 데뷔하면서 그야말로 아이돌 전성시대가 펼쳐졌다. 핑클과 S.E.S까지 합세하면서 친구들 사이에서의 대화 주제는 연예인 이야기로 점철되었다. 가수뿐만이 아니었다. 그해 이슈가 되는 드라마라도 있으면 지난밤에 그 드라마 봤냐며 드라마 이야기로 교실은 '아침부터' 떠들썩했다.


그런 분위기에 나는 좀처럼 스며들지 못하고 겉돌았다. 여러 번 따라 부르고 싶을 정도로 좋은 노래도 많았지만, 내가 푹 빠진 가수는 한국 가수들이 아니었다. 초등학교 때 알파벳을 배우면서 스스로 파닉스를 깨치고 한글이 아닌 다른 문자를 내가 읽어나갈 수 있다는 그 희열감에 영어에 푹 빠져가던 시절, 팝송세계로의 입문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는지 모른다. 오며 가며 우연히 듣는 노래 중에 이유 없이 홀려버린 노래들이 있었고, 그 노래를 부른 가수가 누구인지 알아냈다. 이후 용돈이란 것은 따로 없었지만, 늦은 밤 술자리를 다녀오신 아버지가 엄마 몰래 찔러 준 돈이나 삼촌들이 오며 가며 주신 돈을 차곡차곡 모아 그 가수의 테이프를 샀다. 테이프는 CD의 절반값이었기 때문에 더 많은 가수의 노래를 듣기 위해서는 CD보다 테이프가 가성비가 좋다 생각했다. 음질은 나에게 큰 고려 사항이 아니었다.


그렇게 해서 모은 가수들 테이프가 바로 Backstreet boys, Boyzone, Whitney Houston, Mariah Carey, Britney Spears 등이었고, 해마다 발간되는 인기팝송 모음집도 빼놓지 않고 사들였다.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서 집까지 걸어가는 그 길목에 작은 음반 가게가 있었다. 어른들만 들어가서 음반 사는 곳이라 생각했던 그곳에 문을 열고 나의 취향을 고르던 그 순간, 나는 부쩍 크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테이프를 싸고 있는 비닐을 뜯어 내며 손끝까지 전달되는 설렘의 전율이 지금도 잊히지가 않는다. 부모님은 일 나가시고 아무도 없는 집, 거실 한편을 거대하게 차지하고 있는 전축에 나의 테이프를 꽂아 넣었다. 아침 일찍 나가 저녁 늦게 들어오시는 부모님은 막상 그 전축을 집들이하는 날에나 쓰셨을까, 보통은 순전히 내 자치였다.


노래를 튼다. 노래를 듣고, 노래에 빠진다. 그러다가 가사가 한 줄, 두줄 들린다. 가사가 궁금하니 깨알 같은 글씨로 써져 있는 테이프 안의 가사집을 보며 노래와 대조한다. 그 과정을 무한반복한다. 곧 가사가 나의 입술에 닿고 나의 목소리가 되어 나오기 시작하니, 그렇게 노래에 빠져있다 보면 어느새 해가 저물었다. 가족들이 하나, 둘 집으로 돌아올 시간이니 서둘러 주변 정리를 해야 한다. 해야 하는 숙제를 부지런히 마쳐 놓고, 나의 음악 감상은 방에서 이어진다. '마이마이'라 불리는 휴대용 카세트플레이어에 테이프를 넣고 이어폰을 꽂는다. 가수들의 절절한 목소리가 그대로 귀에 꽂히니 애절함이 더해지고, 꿈속에서라도 그 가수를 만날 것만 같다. 자기 전에 듣는 가수들은 보통 남자가수 Boyzone 노래다. 노래에 푹 빠지며 나는 영어가 더 좋아졌고, 나중에 크면 외국인 남자라도 만나서 결혼하는 줄 알았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취향은 한결같았지만, 나는 이 사실에 대해 친구들과 공유할 수는 없었다. 워낙 대세의 한국 아이돌이 있었기에 나의 취향을 커밍아웃이라도 하게 되면 가뜩이나 아이돌 이야기에 공감하지 못해 겉도는데 더 겉돌게 될 것만 같아 두려웠다. 친구들과 다른 나의 취향을 거리낌 없이 말하고 소개하는 건, 어쩌면 나에게는 깨야 하는 알이었다. 하지만 나는 결국 그 알을 깨지는 못했고, 조용히 나만의 취향을 이어나가며 공부에 매진했다.


나의 독특한 취향은 노래에서 끝나지 않았다. 책도 한몫했다. 친구들은 드라마와 예능 이야기는 했어도 책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쉬는 시간 선생님 험담은 많이 했어도 책을 읽는 친구는 별로 없었다. 나는 책을 읽었다. 은밀한 이야기도 책을 통해 배웠고, 마음의 위로도 책으로 받았다. 공부하는 방법과 십 대 소녀에게 필요한 살아가는 이야기도 모두 책을 통해 알아나갔다. 부모님은 너무 바쁘셨다. 그 빈자리를 그나 책으로 채워 나가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나의 취향을 여전히 친구들과 공유하진 못했다. 친구들이 모여 있으면 그 드라마를 재미있게 본 척하며 간간히 함께 웃을 뿐이었다.


나의 취향에 확신을 갖지 못하던 그 시절을 보내고, 나는 영문학과에 진학했다. 여전히 취향은 확고하지 못했다. 어쩌면 나만의 취향을 확고하게 정의 내리는 순간, 나는 이 쪽에도 혹은 저 쪽 무리에도 스며들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드러내지 않음으로 소속되고 싶은 욕망은 컸지만, 더 소속되지 못하는 아이러니에 빠지면서 결국 '나의 길'을 하나씩 찾아 나가게 되었다. 나의 책과 음악에 의지하며.


그리고 마흔, 나는 글을 쓰면서 나의 취향을 밝히기 시작했다. 책을 좋아하고 클래식을 좋아하며, 공연 보기를 즐긴다는 사실에 대해 아낌없이 글로 남기기 시작했고 주변 사람들에게 밝히기 시작했다. 나의 취향을 밝히기 시작하자 결이 맞는 사람들을 하나, 둘 만나게 되었다. 어디 그렇게 다들 숨어 있었나 싶을 정도로, 혹은 우리는 어쩌면 예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자리를 함께 할 때마다 생기가 넘쳐흐르고, 이야깃거리는 풍성했다. 십 대 시절부터 삼십 대까지, 그 시간 홀로 쌓아온 나만의 시간을 보답받는 기회들이 지속해서 생겨나는 요즘이다. 그 시간 나는 더욱 '내'가 되며 순간을 즐긴다. 좋은 것 중에 더 좋은 나만의 이유가 담긴 것을 골라가는 안목을 키워 나가고 있다.


나의 취향을 커밍아웃 함으로 사람을 배제하게 되는 것이 아니었다. 되려 만나는 계기가 됨을, 이어나가는 촉매제가 됨을 알았기에 오늘도 부지런히 취향을 계발하고 나누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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