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과 나는 6년을 연애했다. 그 기간 동안 나는 '헤어지자'는 말을 입 밖으로 낸 적이 없었다. 장난이라도 그 말을 내뱉으면 부정적인 기운을 타서 정말 헤어져야 할 것만 같았고, 그렇게 헤어지면 그걸로 끝이라 생각했다. 헤어진 사람들끼리 다시 만난다는 건, 깨진 바가지를 접착제로 그저 잠깐 붙여 놓은 것이기에 아주 별 것 아닌 외부 충격에 분명히 또한 쉽게 부서져 버릴 것이라 확신했다. 그래서 그런 말들을 쉽게 꺼내지 않았다. 말은 꺼내지 않았지만, 사귀면서 맞지 않아 불편한 점에 대해서는 숨기지도 않았다. 연애하면서는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꿀이 뚝뚝 떨어진다던데, 되려 우리는 그때 더 싸웠던 듯하다.
그러다가 영어 공부를 위해서 그동안 강사생활하며 모은 돈으로 유학을 가고 싶다 말했다. 내가 유학을 떠난다 하여도 우린 여전히 사랑할 수 있지 않겠느냐며 그에게 말했지만, 그의 생각은 완고했다. 유학을 가게 되면 그것으로 우리는 끝이어야 한다고. 갈길이 달라지는 것이니, 헤어지는 것이 마땅하고 그렇게 공부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다시 만날 수 있게 되면 만나는 것이라고. 그게 우리 연애의 결말인 듯 결정 내렸다. 하지만 그때 나는 몰랐다. 그러한 초강수를 둔 것은 사실 나를 잡기 위한 그의 벼랑 끝 전략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갈등했다. 나의 야망을 더 우선할 것인지, 사랑을 지킬 것인지. 결국 나는 사랑을 선택했다.
오직 사랑했으므로 결혼했다. 다른 이유는 없었기에 어쩌면 우리 관계에 사랑이 빠진다면 관계는 맥없이 풀어헤쳐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결혼을 하고 사람이 변해서 사랑도 변할까 두려웠다. 시간이 흐르면서 알게 된 건 사람도 사랑도 그대로였지만, 생활이 변했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두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변화하는 생활에 오롯이 자신의 책임을 감당해야 생활이 굴러가는데, 본격적인 육아를 하게 되면서 심적으로나 체력적으로 한계에 부딪히니 누가 더 했느니 못했느니의 문제로 유치한 선긋기 싸움을 했다. 빠듯하게 굴러가는 하루 속에서 상대방의 목소리를 들어줄 수 있는 여유는 없다. 나의 목소리를 낼 뿐이다. 나의 목소리가 커지니, 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나의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니, 그가 처한 상황과 괴로움은 보이지 않았다. 똘똘 뭉쳐 눈덩이처럼 커져버린 과잉자의식은 관계를 위태롭게 했다.
커져 버린 자의식은 결국 부딪혀 결국 깨지고 부서진다. 나의 자의식이 깨지고 부서지며 작아질수록 사랑이 보이고, 사랑을 지킬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자의식을 깨고 부서야 가족으로 만난 타자를 수용하고 껴안을 수 있게 된다. 자의식을 해체하는 과정이 나를 해체하는 과정은 아니었으며, 내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 과정은 되려 있는 그대로의 나를 품고, 더 넉넉한 품으로 사람을 껴안을 수 있는 상태로의 변화였다. 내가 태양이 되어 나를 중심으로 가족이 형성되었다는 자만을 버리고, 그저 광활한 우주의 한 점으로, 혹은 흐드러지게 핀 꽃밭의 한 송이 꽃으로 관점을 바꾸니, 어찌 해 볼 수 없이 연약하기 그지없는 사랑만 남았다. 의미 없는 시선을 모두 걷어내고 지켜야 할 하나, 그건 사랑이었다. 오늘도 내일도 살아가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