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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쭝 브런치 Oct 24. 2020

올리브 & 올리브

&





    시하눅빌은 원래 계획에 없었다. 아름다운 백사장으로 유명한 휴양지라 혼자 가기는 싫어서 건너뛸 생각이었다. 특히 최근에 캄보디아 사람들의 신혼여행지로도 각광받고 있다고 하니 괜히 가봐야 외로움만 더 커질 것 같았다. 그런데 제이가 휴가를 내 시하눅빌로 왔다.

    오랜만에 만난 제이는 영상 통화로 봤던 모습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목소리도 더 매력적으로 들렸고, 깔깔거리는 특유의 웃음소리도 반가웠다. 연애 초반을 떠올리게 하는 기분 좋은 낯섦이었다.   

    시하눅빌에 대해 기억나는 것은 대부분 올리브 & 올리브(Olive & Olive)라는 레스토랑에 관한 것이다. 이곳은 시하눅빌의 랜드마크인 황금 사자상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다. 올리브 그린색으로 Olive & Olive라고 적힌 커다란 간판, 그리고 그 밑에 설치된 차양에는 영어, 캄보디아어, 중국어 그리고 한국어로 ‘지중해 음식’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반질반질한 타일 바닥과 하얗게 칠한 벽이 깨끗한 인상을 줬다. 중앙 벽면엔 트립 어드바이저 위너(Trip advisor winner)라는 명패가 걸려있었는데, 보통 이런 걸 눈에 띄게 걸어 놓는 곳은 음식 맛이 정말로 훌륭하거나 형편없거나 둘 중 하나라 조금 불안했다. 하지만 소라 모양의 스테인드글라스 전등이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냈고, 여러모로 휴양지에 온 기분이 물씬 풍기는 곳이라 한번 믿어 보기로 했다.



    우리는 황금 사자상이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차양에 한글로 지중해 음식이라고 적힌 것과는 달리 메뉴판에는 한글로 된 설명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사진과 영어 표기가 있어 문제는 없었다. 우리는 페타치즈(Feta cheese) 피자와 피시 파필롯(Fish pappilot)을 주문했다. 전채로 한껏 부푼 흰 빵이 나왔다. 공갈빵처럼 속이 빈 식전 빵이었는데 군데군데 화덕에 그을린 자국이 식욕을 자극했다. 빵은 함께 나온 세 가지 소스(레몬 향이 나는 크림, 올리브유, 라구 소스)와 다 잘 어울렸다. 트립 어드바이저 명패를 보고 생긴 불안이 금세 사라졌다.

    피자는 얇은 도우에 토마토 페이스트만 바르고 모차렐라와 페타치즈를 얹어 화덕에 구운 것이었다. 쫄깃하고 고소한 치즈와 화덕의 훈연 향이 우리 취향에 꼭 맞았다.

    피자를 반쯤 먹었을 때 피시 파필롯이 나왔다. 양념에 재워둔 생선을 은박지에 싸서 오븐에 구운 요리였다. 다른 메뉴와는 달리 베스트를 입은 남자가 직접 요리를 가져왔다. 남자는 은박지를 담은 접시에 보드카를 붓고 불을 붙였다. 이내 푸른 불꽃이 은박지를 감싸며 타올랐다. 레스토랑 안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우리를 향했다. 우리 옆 테이블에 있던 백발의 노인은 세상에서 가장 성스러운 의식을 보듯 감탄했다. 갑자기 쏟아지는 시선과 불꽃 때문에 꼭 생일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잠시 후 불꽃이 사그라들자 남자는 뜨거운 기색도 없이 맨손으로 은박지를 열었다. 벌어진 틈 사이로 김이 빠져나가고 향긋한 허브향이 났다. 그 안으로 잘게 썬 파프리카와 양파, 블랙 올리브에 덮인 붉은 생선이 보였다. 생선의 기름과 야채에서 나온 수분이 국물이 되어 고여 있었다. 나는 우선 국물부터 맛봤다. 짭조름한 바다 향과 야채의 단맛, 생선 기름의 고소함이 잘 어우러졌다. 생선살은 쫄깃했고 비리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생선살 보다 국물이 훨씬 더 맛있었다. 나는 살을 어느 정도 먹은 후 쌀밥을 주문해 국물에 말았다. 이렇게 맛있는 식사를 한 게 언제였나 싶을 만큼 만족스러웠다.

    불꽃이 꺼진 후에도 계속해서 우리 테이블을 곁눈질하던 노인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는지 피시 파필롯을 주문해 불꽃쇼를 즐겼다. 그들의 테이블 위에는 거의 다 먹어 없어진 피자와 텅 빈 파스타 접시가 있었다. 그는 나처럼 쌀밥까지 주문해 국물에 말았다. 어지간히 맛있어 보였나 보다. 식사를 마친 그의 배가 한껏 부풀어 있었다. 그는 의자에 반쯤 누워 배 위에 양 손을 올리고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우린 서로 눈빛으로 그 만족감을 공유했다. 그 순간 그와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시하눅빌에 있는 동안 대부분의 식사를 이곳에서 해결했다. 매번 비슷한 메뉴를 주문해 먹었지만 전혀 질리지 않았다. 오히려 시하눅빌을 떠날 땐 제이와 떨어지는 것보다 이곳에서 식사할 수 없는 게 더 아쉬울 정도였다.


    올리브 & 올리브에서 해변 쪽으로 향하는 길에는 레스토랑과 술집, 여행사 사무실들이 즐비해 있었다. 그 길로 조금 더 가면 세렌디피티 해변(Serendipity Beach)으로 가는 내리막길이 나왔다. 내리막길 양쪽엔 슈퍼마켓과 레스토랑, 바, 카페, 게스트 하우스, 호텔들이 빈틈없이 늘어서 있었다. 성수기였다면 매우 붐볐겠지만 문을 닫은 곳도 많았고 파리 한 마리 없이 조용했다.

    우리는 그중 문을 연 마사지 숍에 들어갔다. 숍 안에는 신비로운 향이 그득했다. 우리는 발마사지를 받기 위해 의자에 누웠다. 잠시 후 두 명의 마사지사가 우리 앞에 앉았다. 제이를 담당하던 마사지사는 제이에게 ‘Do you have a baby(아기를 가졌어요)?’라며 크고 또렷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마 아이를 가졌다면 다른 방식으로 마사지를 하려고 한 것 같았다. 마사지사의 질문에 제이는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봤고, 나는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제이의 얼굴이 울상이 됐다. 마사지사는 사과했고 나도 웃음을 멈췄다.  

   「내 배가 그렇게 많이 나왔어?」 제이가 내게 물었다.

    분명 실수는 마사지사가 했는데 폭탄은 내 손에 쥐어졌다. 여기서 나는 대답을 잘 해야 했다. 조금의 실수도 용납이 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마사지사의 각도에서 조금 부각돼 보였나봐. 점심을 먹은 지도 얼마 안 됐고 자기가 말라서 더 그런 거 아닐까?」 나는 최대한 신뢰를 주기 위해 웃음기 없이 말했다.

   「음, 그런가?」

   「응. 그런 거 같아.」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마사지사도 말실수를 한 게 미안했는지 신경 써서 마사지를 해주었다. 제이의 기분도 풀어진 듯 보였다.



    우리는 해가 약해질 무렵에 세렌디피티 해변을 걸었다. 세렌디피티 해변엔 그 의미처럼 뜻밖의 재미 같은 건 없었다. 해변에는 행상인들이 돌아다니며 조개를 엮어 만든 공예품을 팔았다. 비치파라솔은 접힌 게 더 많았고, 빨갛게 그을린 외국인 여행객 몇 명만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세렌디피티 해변을 걷다 보면 어느 순간 오츠티알 해변(Occheuteal Beach)에 들어선다. 어디까지가 세렌디피티 해변이고 어디까지가 오츠티알 해변인지 표식이 없어 둘 사이의 경계를 쉽게 알 순 없었지만 아기자기한 레스토랑들을 지나 해산물을 쌓아 놓고 먹는 현지인 가족들이 있는 식당이 나오면 오츠티알 해변이 시작되는 것 같았다. 짐작하건대 외국인 여행객들이 많은 곳은 세렌디피티이고 현지인들이 많은 곳이 오츠티알이다.

    저녁때가 되자 레스토랑의 직원들이 호객 행위를 했다. 우리가 그냥 지나가도 한번 따라오기 시작한 호객원들은 집요하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선이라도 있는 듯 일정 구역을 지나면 우리를 따라오던 호객원은 아무 미련 없이 되돌아갔고 새로운 호객원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서로 다른 레스토랑의 영역은 침범하지 않기로 합의가 된 것 같았다.

    우리를 멈추게 한 것은 호객원이 아니라 고기 굽는 냄새였다. 우리는 냄새의 근원을 찾아 두리번거리다가 해변 한쪽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발견했다. 한 레스토랑에서 모래사장 위에 커다란 그릴을 두고 고기와 해산물을 굽고 있었다. 그 옆에는 식탁과 색바랜 방석을 깐 라탄 의자가 놓여 있었다. 우리는 자리를 잡고 앉아 모래에 발을 묻고 석양을 감상했다. 구름이 비현실적으로 온통 새빨갛게 물들었다. 하늘이 이토록 황홀할 수 있다니 놀라웠다.  

    잠시 후 종업원이 음식을 내왔다. 그릴 자국이 선명한 고기와 해산물이었다. 일몰 후 어두워진 해변을 각 레스토랑에 설치된 황금빛 전구들이 밝혔다. 그리고 경쟁하듯 서로 다른 음악을 틀었다. 조금 전까지 들리던 잔잔한 파도소리는 마구잡이로 뒤섞인 음악에 묻혀 버렸다.

    제이는 모순되게 고기를 한입 베어 먹으며 다이어트를 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이제 곧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가지고 있는 바지가 잘 안 맞는다나 뭐라나. 내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날씬해진 자신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나의 여행이 며칠 후면 끝난다는 걸 모르는 걸까, 그녀의 말이 조금 황당하게 들렸다. 하지만 그녀가 다이어트를 한다고 말하면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이어트 같은 건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하고 말한다. 그래도 그녀가 ‘안 돼, 다이어트 꼭 해야 한단 말이야’라고 고집부리면 나는 태도를 바꿔 열심히 응원한다. 물론 ‘내 눈에는 하나도 안 쪄 보이는데 이상하다’라고 덧붙이면서 말이다.







스물아홉 나의 캄보디아 STAY, NOT ST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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