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자신감 회복하기
처음에는 복직하는 날짜를 외워둘 정도로 좋아했다. 그 때가 되면 엄마의 일보다는 원래 있던 직장에서 하던 일이 더 중요해질테고 그 두 가지 롤이 역전되는 순간, 뭔가 커리어우먼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다시 확인하면서 나의 쓸모에 대해서 인정받는다는 걸 느낄 것 같아서 그냥 마냥 좋았다. 하지만, 그건 정말 딱 그 때까지의 바람이었고, 오히려 복직하고 거의 3주 정도 별다른 일이 없는 상태로 흘러갔다.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다. 이미 맡은 일들이 있는 이들은 그 일을 하느라 바쁘고, 나는 세부조직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약간 붕 떠있는 상태였다. 1년 3개월 정도 바뀐 스펙에 대해 파악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그 내용만 8시간 * 5일 * 3주를 보고 있으면 사실 조금 지치기도 한다. 바뀐 내용을 정말 글자 하나까지 보려면 은근 짧은 시간이지만, 개괄적으로 훑어보기에는 또 너무 넉넉했다. 문서만 보는 게 2주 가까이 되자, 조금 걱정이 되었다. 4월이 다되어서 복직한 탓에, 연말 평가를 생각하면 9개월 안에 뭐를 했다고 보여줘야 연봉인상이든 뭐든 될텐데, 대충 이렇게 한달이 날아가면 남들보다 불리할 것이라는 계산까지 섰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에라 모르겠다. 그냥 전체적인 업계트렌드나 보자, 하면서 그간 놓쳤던 이슈들이 뭐 있나 하나씩 열어봤다. 사실 휴직 전에도 내 경우는 맡은 롤이 백엔드 시스템 수정, 보강 기획을 많이 하다보니 어떤 것이 인기를 얻고 어떤 것이 화제인 지 보고 살필 틈조차 없었어서 2019년의 트렌드부터 매우 새롭기만 했다. IT업계는 코로나 시대에 또 새로운 유행을 만들었고 그 변화가 상당히 컸는데 정말 아기와 지지고 볶느라 모른 채로 지나갔었다. 어떻게 이렇게 아는 게 없지? 라고 막막하기만 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수학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정말 이상한 해결책인데, 그렇게 해보았다. 7차 교육과정 문과 수학에서 머리가 멈춘 나는 배운적 없는 미분과 적분 문제집을 사뒀던 게 있다. 수열의 극한 부터 시작하는 그 오래된 문제집 (하지만 거의 새 것) 이 보이길래 그냥 끄적끄적 시작을 해봤다. 당연히 고등학생때처럼 가열찬 속도로 풀지도 못할 뿐더러, 아이가 6시 반에 깨니까 주어진 시간은 정말 30분 남짓도 되지 않는다. 한 두 문제라도 그냥 스리슬쩍 풀기 시작하니 조금 느낌이 달라졌다.
운동으로 치면 워밍업, 스트레칭을 하고 일을 하는 느낌이다. 어떤 것을 생각할 때 고려해야할 케이스를 꼽는 방식이 약간 달라지고, 속도도 빨라졌다. 머리가 컴퓨터라 치면, 로딩 속도가 확연히 달라진 느낌이다. 물론 문제를 푼다고 그게 다 맞지도 않는다. 어릴 때 했던 실수처럼, 글씨를 마구 써서 수식 전개 중간에서 틀어지거나 지수로 쓸 걸 너무 크게 써서 곱하기로 착각한다거나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뭐 그게 대수인가. 내가 그 걸 풀어서 시험을 치를 것도 아니고 다음에 또 실수 안 하면 되지. 어차피 그 다음에 하는 일만 잘하면 될 일이다. 이렇게 미리 한 번 두뇌회전의 시행착오를 거치고 나니 조금 나아졌다. 여전히 빠르게 달리는 이들의 페이스를 쫓아가기는 부족하지만 한 가지 치트키를 확보한 느낌이라 아침이 가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