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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슈가 Nov 27. 2022

10만 원은 적고 20만 원은 커서 15만 원짜리 인생

집 근처 마트 옆엔 농협은행이 있다. 주택담보대출을 농협에서 받아서 어쩌다 주거래 은행이 농협은행이 되었는데, 그날도 귤이며 김이며 양손 가득 장을 보고 ‘아, 현금 좀 찾아놔야 겠다‘하고 ’당기시오‘라고 써있는 무거운 문을 낑낑대며 당기고 들어갔던 날이었다. 통장에 이번 달 생활비가 얼마나 남았을지, 얼마를 뽑는 게 적절한지 생각하기도 피곤할 때가 있다. 촤르르 현금인출기가 내놓은 돈을 보니 만 원짜리로 15장이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10만 원도 아니고 20만 원도 아닌 또 15만 원이다.


"네 아빠. 괜찮아요. 그것만으로도 감사한 걸요. 그리고 다음 달부터 못 부친다고 해도 괜찮아요. 요즘 과외자리가 얼~마나 많은데요. 네 아빠 들어가세요~ 끊을게요"


휴우... 수화기 너머로 아버지가 힘없이 고개를 떨굴 생각을 하니 더 기분이 다운될 것 같았다. 아니야. 도리질을 하며 일부러 씩씩하게 걸었다. 내 발걸음은 학교 안 학생회관 건물 현금인출기로 향하고 있었다. 통장에 입금으로 찍힌 금액은 15만 원. 남은 잔액은 15만 3000원. '10만 원도 아니고 20만 원도 아니고 하필 15만 원이지? 이걸로 어떻게 한 달을 버텨. 지금 밥주는 하숙집 하숙비도 20만원인데...점심값만 해도 보름 간신히 버버틸 걸.' 이걸 아버지가 모르실 리 없었다. 하지만 이런 푸념은 사기만 떨어뜨릴 뿐이라고 이내 도리질 했다. '난 과외도 하고 있고 또 과외를 하나 더 구할 수도 있으니 괜찮아. 아까 아빠에게 씩씩한 목소리로 전화받은 거, 잘했어. 밥이나 먹자'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아버지에게 15만 원의 의미가 무엇인지. 남들은 자식들 뒷바라지 다 끝냈을 나이에 시골에서 서울 사립대학교 간 막내딸 교육시키느라 아버지는 지쳐있었을 것이다. 내심 딸이 지방 거점 국립대의 국어교육과에 가서 선생님이 되길 바랐지만 막내는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를 기어코 경험해 보겠다 우겼다. 아버지는 평생 큰돈을 버는 재주는 없는 분이었다. 그저 성실한 분으로는 동네서 정평이 났다. 학비는 어떻게든 마련해주셨는데 문제는 다달이 용돈이었다. 뭘 해도 혼자서 해내는 막내딸이 용돈 같은 건 걱정 말라고 했지만 안 보낼 수는 없으셨을 것이다.


시골에서 미수금 많은 작은 가게를 운영하셨던 아버지가 아무리 대학생의 씀씀이를 모른다 하더라도 한 달에 10만 원은 턱도 없이 모자란다는 것 쯤은 짐작하셨을 것이다. 그렇다고 매달 20만 원은 힘에 부치셨을 것이다. 그렇게 정해진 숫자였다. 15만 원. 그건 아버지의 최선이었을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고 그만두고 지금은 사업을 하고 있으면서도 현금을 인출할 때는 나도 모르게 15만 원을 뽑고 있었다. 10만 원도 아니고 20만 원도 아닌 왜 하필 15만 원이야?라는 물음을 나 자신에게 하고 있었다. 현금으로 가지고 다니기에 10만 원은 좀 적었고 20만 원은 좀 컸다. 15만 원은 나에게 이제 뗄 수 없는 상징적인 금액이 되어 있었다.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나도 이제는 그 15만 원에서 벗어나고도 싶다. 그러던 어느 날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 중 한 대목이 눈에 들어왔다.


한바탕 소동이 정리되는 기분이 들자 사내에게 고마움이 물결치기 시작했다. 다른 노숙자들에게 맞아가면서까지 파우치를 지킨 것부터 주인에게 잘 돌려주기 위해 꼼꼼하게 확인을 한 것까지, 사실 어지간한 책임감이 아니면 할 수 없는 행동이기 때문이었다.

그때 사내가 끙, 소리를 내며 일어섰다. 염 여사도 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러 지갑에서 현찰 4만 원을 꺼냈다.

"여기요"
건넨 돈을 보고 사내가 망설이는 게 느껴졌다.
"받아요"

김호연. 좋아하는 소설가 중 한 명이다. 너무 충격적이라 읽는 내내 나를 나락으로 떨어뜨리지도, 나를 검열하게 하지도, 사회를 비관하게 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너무 미화하지도 않는다. 담담한 그의 문체를 좋아한다. 힘 있으면서도 힘 빼야할 때는 힘을 빼고, 천천히 전개하다가도 속도를 내고, 빠른 듯하면 서정적인, 작가가 완전히 장악하고 내놓은 플롯은 읽는 맛이 있다.


그런 그가 택한 금액이 4만 원이었다. 염여사의 파우치를 찾아준 사내(독고)에게 감사의 의미로 건넨 돈의 액수는 3만 원도, 5만 원도 아닌 4만 원이었다. 이 대목을 웃고 난 처음에는 풉 웃었고 생각할 수록 의아했다. 


작가가 그 대목에 3만 원도 아니고 5만 원도 아닌 4만 원이라고 쓴 이유가 있을 것만 같았다. 자신의 파우치를 찾아준 노숙자에게 건네는 사례비가 3만 원은 좀 적고 5만 원은 좀 크다고 생각해서일까? 소설가도 어쩌면 나와같은 그러한 고민 했을 지도 모른다는 짐작에서 내가 느낀 감정은 '위안'이었다. 어쩌면 나처럼 그렇게 세세히?



에세이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한수희'작가는 글쓰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글은 그냥 쓰면 된다. 누가 읽어주건 말건, 누가 좋아하건 말건 그건 다음 문제다. 굳이 말하고 다닐 필요도 없다. 글은 의무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쓸 수 있다. 그게 그렇게 힘들면 안 하면 그만이다. 글 쓴다고 잘 먹고 잘 사는 것도 아니다. 아니 잘 먹고 잘 살기 정말 어렵다.

나의 이런 예민함과 섬세함은 늘 한켠에서 나를 괴롭혔다. 5만 원을 찾던 10만원을 찾던 무슨 상관이냔 말이다.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필요한 돈 찾고 사는 게 맘 편하게 사는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무의식적으로 15만 원을 뽑아놓곤 대학교 때 친구들은 중 식당에 가서 잡탕밥을 먹을 때 나는 학생식당에서 식판에 서둘러 밥 먹고 일산가는 광역 버스 잡아타고 과외 다니던 기억을 떠올린다. 아버지가 부쳐준 15만 원을 떠올리지 않고 살 수 없을까? 생각했다.


그렇지만 나의 이런 예민함과 섬세함도 쓸 데 있음을 글로 먹고 살면서 차츰 알게 되었다. 이런 특성은 글 쓸 때 도움이 되었음 되었지 영 도움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시시콜콜한 것들을 보고 느끼고 받아들이며 에너지를 들여가며 신나서 글 쓸 수 있는 것도 능력이면 능력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김호연 작가의 4만 원에서 용기를 얻었고, 한수희 작가가 쓴 글쓰기에 작업에 대한 대목에서 깊은 공감을 느꼈다.


어차피 15만 원 잊고 살 수 없다면 강점으로 승화시켜 보기로 했다. L만원은 적고 M만원은 많아서 N만원을 뽑는 나에게 공감할 독자들이 어딘가에, 그것도 많이 존재할 것만 같다. 내가 쓴 글 누가 읽어주건 말건, 좋아하건 말건 일단 쓰자. 글로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이 있긴 있더라. 글로 잘 먹고 잘 살길 바라는 건 일단 쓰고 나서 생각하자. 지금껏 글로 벌어먹은 시간이 10여년이다. 앞으로는 실용을 꼭 따지지 않는 글도 가열차게 써볼 생각이다.


15년. 10년은 짧고 20년은 기니까 15년은 써보기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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