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 애미야~ 이번 김장이 아주 잘 되었네~ 이번 주말에 늬가 올래~ 우리가 가져다줄까? “
“어머님~ 제가 지금 일이 아직 안 끝나서, 아범이랑 상의해보고 제가 곧 전화드릴게요”
시즌이 또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어머님 전화다. 이번에는 몇 통의 김치통을 주실까? 익은 김치를 싫어하고 갓담은 안 익은 김치를 최고로 치는 남편의 투정이 벌써 들리는 것 같았다. 지금은 매일 출근하지 않는 일을 하지만 30대 중 후반만 해도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퇴근하면 냉장고 정리가 다 뭐람. 그냥 씻고 한 30분 티비 보다가 애 재우다가 옆에서 쪼그리고 잠드는 밤들이 이어졌다. 새벽에 깬 남편이 ‘왜 여기서 자? 침대 와서 자“하는 말도 누가 녹음해서 틀어놓은 마냥 반복되었다.
회사를 관두고는 김장하는 날은 되도록 시댁에 갔다. 잘하진 못해도 뭐라도 돕는게 맞았다. 강남으로 회사 다니는 바쁜 며느리라는 핑계로 그 일 많은 김장을 어머님 혼자 하게 둘 수는 없었다. 첫 김장에서 느꼈다. 김장은 공동의 일이지 누가 맡아서 할 일이 아니라고. 힘든 건 둘째치고 심심해서 못하겠다고. 아버님이 계셨지만 큰 도움 돼 보이지 않았다.
문제는 김장을 하고 돌아와 받아온 두세 통의 김치통이었다. 우리 집에는 내가 신혼 때 해온 올드한 양문 냉장고. 딱 한대만 있었다. 너는 왜 김치냉장고를 사지 않냐고, 걱정과 한편으로는 우리 며느리가 살림을 하는 건지 안 하는 건지 궁금해하는 마음이 들어있는 말씀을 몇 년째 듣고 있는지 모른다. 예쁜 그릇 좋아하고 살림 잘하는 둘째 언니도 의아해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때마다 내 마음에서 이런 소리가 나왔다. 이렇게 어렵게 담은 김치 넣을 데가 마땅치 않아서 고민인 건 정작 나라고. 아니 다른 것 같으면 밖에 내놓기라도 하지. 김치는 이틀만 내놔도 못 먹는데, 주부인 내가 제일 답답하지 않겠냐고. 일박 이일 김장하고 집에 오면 냉장고 정리해서 다 버리고 김치통 작은 거로 바꿔서 몇 개로 나눠 넣기까지 피곤한 건 나라고. 또 넣을 데가 없어 조금만 가져오다 보니 얼마 안가 또 가야 하는 일의 반복까지.
여기까지 읽은 분들은 궁금할 것이다. “김치 냉장고 하나 사시죠? 이렇게 까지 고민이라면?” 또는 이 이야기를 하고 싶을지도 “김치 냉장고 살 돈이 늘 모자랐나요?” 묻고 싶을 것이다.
생활비가 늘 넉넉했다고 할 순 없지만, 김치 냉장고 살 돈이 정말 없었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유명 가전 3사에서 매년 미는 대표 모델은 300만 원 가까이 하지만, 허리까지 오는 모델은 100~150 정도 하고 하다못해 매장 전시용은 조금 할인된 가격에 살 수도 있다. 3월에 보너스를 받는 남편이 한 번은 “당신이 그렇게 고민하는 김냉 그냥 사”고 권하기도 했다. 김치는 어떻게 다 넣었는데 김치 국물은 들어가지 않아 따라 버렸을 때도, 반나절 베란다에 내놨을 뿐인데 시어버린 김치에 속상했어도 어째 나는 김치냉장고에는 시큰둥하기만 했다.
“엄마~ 아빠 그러려니 해~ 낼이면 엄마한테 미안하다고 하실 거야”
“우리 막내 어쩜 이렇게 말을 예쁘게 해?알았어~ 이제 자”
“근데 엄마, 다음부터는 뭐 사 오면 냉장고에 넣을 때 정리 좀 해. 상해서 버리면 아깝잖아요“
“응 알았어~~ 꼭 그렇게 할게요 우리 막내 공주님”
엄마는 다섯 아이를 키우셨다. 아빠가 지방에서 작은 제조업 공장을 하셨는데 공장 아저씨들 점심까지 챙겨야 했다. 레시피 같은 건 없었지만 손맛이 있는 엄마 요리는 늘 맛있었다. 또 다섯 아이들이 상에 머릴 맞대고 둘러앉아 먹으니 뭔들 맛이 없었을까? 게다 엄마의 요리에는 ‘푸근함’이 있었다. 대충 해서 그때 맛과 이번 맛이 달라도 딴지 거는 사람 없었다. 그때는 그래서 맛있었고 지금은 또 다르게 맛있었으니까.
설거지는 아이들 몫이었다. 상을 차려낸 엄마는 그걸로 엄마 일이 끝이라고 생각하셨다. 낮에 동네 아줌마들이랑 양장점에 모여서 노시다가 네다섯 시쯤 집으로 퇴근하는 게 엄마의 소소한 일과였다. 손에 들린 검은 봉지엔 장봐온 반찬거리가 들어있었다. 그걸 반찬으로 만들면 문제 없었는데 냉장고에 넣으면 문제가 되었다. 한번 들어간 검은 봉지는 좀체 나오는 법이 없었다. 기억력 좋고 꼼꼼한 아빠는 그게 늘 불만이었다. 엄마는 그랬다. 정리와 거리가 멀었다.
냉장고 한대로는 안 되는 살림 규모가 되었어도, 매해 주변에서 귀한 김장을 나눠 주는데 마냥 좋아할 수 없었어도, 심지어 김치 냉장고를 살 돈이 생겼어도, 김치 냉장고를 살 수 없었던 나는 어느 날 불현듯 그 이유에 우리 엄마가 있음을 깨달았다.
부엌 정리의 즐거움, 갑자기 찾아온 누군가가 냉장고를 열어도 아무 거리낌 없는 상태, 누군가가 냉장해야 하는 귀한 것을 주어도 마냥 기뻐할 수 있는 여유를 나는 모르고 살았던 것이다.
겉으로만 보기에 나는 냉장고 정리를 잘할 것처럼 생겼다. 거실이나 방들, 욕실은 반짝반짝 잘도 정리하고 치우면서 냉장고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졌다. 비좁고 정리 안된 냉장고 때문에 늘 불편했으면서도 냉장고 정리는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살았던 것 같다.
“수육도 새우도 먹을 만큼 먹었으니 한 바퀴 돌고 올까요?”
김장을 가져다주시러 어머님이 오신 날이었다. 포기김치, 알타리, 도라지 무침, 오이지무침 맛있는 김치에 반찬까지 해오셨고 우리는 수육과 새우 버터를 준비해서 식구들 모두 평소보다 과식했다.
남편과 아이는 강아지와 놀라고 하고 나와 어머님은 집을 나섰다. 끝장을 보기 위해서다. 뭘? 짐작하는 그것, 김치 냉장고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어머님, 저희 김치 주실 때는 제발 작은 통에 주세요~ 정말 들어갈 데가 없어요~ 해도 어머님은 늘 가장 새 통 큰 통에 담아주셨다. 이번도 마찬가지다.
내 생애에 김치 냉장고를 산다면 지금이 최적기로 느껴졌다. 디데이도 어쩜 그리 잘 잡았는지 마침 11월의 블랙프라이데이 주간이다. “어머님 우선 김냉 대표 브랜드 D사 거기부터 가봐요 우리” “그래, 그러자. 거기가 젤 낫다~” 우리의 외출은 비장했다. 하지만 매장에 들어서니 비장함은 위축으로 변했다. 예상대로 직원은 올해의 대표 모델을 추천했고 작은 것을 원한다고 하니 이내 포지션을 바꿔 심드렁해졌다. 안경을 고쳐 다시 나를 쳐다보는 것이 이전에 작은 모델에만 관심 보이고 가격 물어보고 돌아갔던 나를 알아보는 것 같기도 했다. ”네~ 돌아보고 올게요 “
매장 한 군데만 가서 결정하는 법은 내 사전에 없었다. 어려운 어머님을 모시고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우리는 배가 부르다. 배를 꺼뜨려야 할 미션이 있었다. 두 번째 세 번째 가전 매장도 그 근처에 있었다. 김냉은 역시 D사였다. 나머지 두 곳 S사와 L사에는 좀 작은 모델은 한정적이었다.
우리 어머님은 김치냉장고 박사셨다. 집에 김냉을 포함 냉장고가 5대 있으시다. 어머님의 인사이트에 따르면 “문을 위로 여는 형태는 매번 김치통을 다 꺼내야 아래에 있는 걸 꺼낼 수 있기 때문에 애미 너의 어디다 쓸 수 없이 얇아빠진 팔로는 안된다” 며 확고하셨다. 대신 스탠드형으로 작은 리터를 사라고 하셨다. 감탄했다. 디자인이나 색깔만 보던 나 같은 하수는 절대 알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런데 D사에서 마음에 꼭 드는 작은 김냉을 만났다. 가격대도 나쁘지 않았다.
지금까지 이 김냉을 만나려고 내가 김냉을 사지 않았나? 생각이 들었다. 색깔도 그레이 색으로 어디든 어울렸다. 확신을 가지게 된 건 이 포인트였다. “고객님 이 냉장고는 김냉으로 쓸 수도 있지만, 와인냉장고나 술장고로도 쓰시는 분 많아요” 와~ 이거 뭔가 멋지다! 언젠가 내가 혼자 청소하기 어려운 넓은 평수로 이사 갔을 때 내 서재나 다이닝룸에 놓아도 아무렇지도 않게 잘 어울리는 녀석이었다. 15년 동안 없이 살았으면서 이 김냉을 놓치면 안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우린 이토록 운명이었다.
운명적 만남이 예견된 배송 날. 배송도 어쩜 그렇게 빨리 오던지… 배송되기까지 며칠을 기다려야 했다면 어디까지 왔는지 몇번이나 모니터링했을 것이다.
나의 김치냉장고는 김치 냉장고 자리에 쏙 들어갔다. 김치냉장고 놓으라고 만들어진 자리에 더할 나위 없이 착 어울렸다. 마치 원래 거기에 있었던 것 같은 착각마저 일으켰다. 출근과 동시에 그래프와 숫자로 늘 긴장해있는 남편에게 잘 보내지 않는 내용의 톡을 보냈다. 김치냉장고 사진을 찍어 전송하며, 정말 마음에 든다고. 이거 안 샀으면 어쩔 뻔했냐고. 엄연히 말해 남편이 사준 것도 아닌데, 고맙다고 보냈다.
김치 냉장고가 들어오고 전원을 켜고 그 김냉에 딱 맞게 나온 김치통에 김치를 정리해서 넣은 날. 맨 위칸에는 남편이 좋아하는 사케도 넣고 내가 좋아하는 파란 맥주도 호기롭게 5~6캔 넣어 칸을 가득 채웠다. 고작 김치냉장고 하나 산 게 뭐 그리 호들갑 떨 일인가 싶지만, 나는 그날만큼은 행복했다. 나에게도 김냉 전용 내 김치통이 생겼다!
명석하고 동네에서 평판도 좋으셨던 아버지는 어째 셈에는 약한 분이셨다. 내가 십 대일 때 가장 가까운 지인에게 사기를 당하셨다. 어머니는 그 일을 계기로 앓아누우셨고 대체로 앓아누운 날들이 많으셨다. 원래도 정리에 소질이 없으신 분이 앓아누우니 집안이 어수선해진 건 수순이었으리라. 나는 그렇게 살림을 정리하는 법을 못 배우고 자랐다. 정리의 즐거움, 정리의 효용, 정리의 레버리지를 솔직히 몰랐다. 특히 주부의 개인적인 영역인 냉장고 정리는 더욱 더.
그런데, 우리 시어머님은 신이었다. 정리의 신. 그것도 냉장고 부문에서. 신혼 때 시댁에 가서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그 신비한 세계에 대한 감흥을 잊을 수가 없다. 뭐가 들었는지 모르겠는 애매한 통은 없었다. 내 냉장고 야채칸은 야채들이 비닐에 담긴 채 켜켜이 숙성(?)되기 일쑤였는데- 야채가 상하면 갈색의 물이 생긴다는 것을 나는 안다- 어머님의 야채 통은 야채들이 숨 쉬고 있었다. 그러다 나에게 말을 걸 것 같았다. 마치 가전 광고에나 나오는 현실성 없는 냉장고였다.
그런 어머님을 만나 정리를 배우게 된 것 같다. 그간 내가 정리, 미니멀 라이프, 살림하는 법에 대한 무수히 많은 영상과 블로그를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나를 드라마틱하게 변화시키지 못했다. 나를 김치냉장고 사게 만들지 못했다. 내가 김치냉장고를 산 건 어머님 영향이 크다.
30대 초반까지만 해도 나는 운명에 순응하며 사는 순리자였다.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순응하며 사는 게 내 분수라고 생각했다. 부부가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실제 많이 버는데도 돈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모래알 같았다. 가끔 부부가 머리를 맞대고 가정 경제 결산을 하는 날이면 한쪽은 쓸쓸하게 자리를 떴다. 고성이 오간 날도 있었다. 더 열심히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어쩌란 거지? 대상을 모르겠는 원망이 솟기도 했다.
그때부터였다. 미친 듯이 공부했다. 경제 흐름 읽는 법, 돈 버는 법, 사업하는 방법, 돈 그릇 키우는 법, 운좋게 하는 법, 운명을 바꾸는 법, 사업을 확장시키는 법… 닥치는 대로. 시도하고 실행했다. 실수는 반복하지 않고 고쳐나갔다. 그렇게 나는 어릴 적 냉장고에서 썩어가던 검은 봉지를 내 삶에서 떠나보내려 노력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성과도 얻었다. 이제 우리는 가계부 결산할 때 다투지 않는다.
‘당신 정말 열심히 했네’
‘당신이 고생 많았지. 행운도 있었고.’
‘우리 이 행운 꼭 지켜나가자’
다짐이 그 자릴 채웠다. 나도 믿는 구석이라는 게 생겼다. 누가 만들어 준게 아니었다. 내가, 우리 부부가 만든.
이 심플하고 멋진 김냉은 나에게 그런 존재다. 비록 누구도 냉장고를 정리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나는 40이 넘어 비로서 터득하게 되었다.
그냥 살라고. 니가 무슨 김냉이냐고. 너는 김냉을 가질 자격이 없다고 어디선가 들리던 목소리를 끊어냈다. 앞으로 이 냉장고를 다이닝룸 한쪽에 두고 손님이 시원한 것을 찾으면 꺼내주는 서브 냉장고로 쓸 날을 위해 즐겁게 고군분투할 것이다.
갑자기 띠리링 친한 지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혜숙아, 우리 형님이 김치 정말 잘 담그시거든. 이번에 백김치가 정말 잘되어서 좀 주셨는데 지금 아파트로 갈게, 받으러 나올 수 있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