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날이 있다. 평소에는 삶아놓은 콩나물처럼 축축 처져 있다가도 불현듯 정리하고 싶고, 청소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날. 미니멀하게 살고는 싶지만 종종 삶아놓은 콩나물이 되는 나는 그런 날이 오면 그 기분을 놓칠세라 무엇인가에 돌입한다. 그날의 타깃은 '남편의 면도기'였다.
뭘 하나를 사더라도 꼼꼼하게 살피고 오래 잘 쓸 물건을 고르는 나에 비해 남편은 무던한 편이었다. 성실하고 부지런한 그에게 면도기란 얼른 면도하고 출근하는 걸 도와주는 도구 중 하나였다. 남자들의 면도 생활에 대해 잘 몰랐던 신혼의 나는 남편의 1회용 면도기가 1도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가끔 턱에 상처가 생겨도 그게 1회용 면도기 때문이라는 걸 잘 몰랐다.
결혼 후 5~6년 지났을 때였나, 대학생 때 연합 광고 서클에 몸담았던 나는 오랜만에 서클 동기들과 연말 파티를 할 생각에 들떠있었다. 우리는 그 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단체 사진 촬영을 했던 것 같다. 강남에서 사진 스튜디오를 하던 서클 후배의 스튜디오를 통째로 빌려서 음식도 먹고 술도 곁들이고 사진도 찍고 각자의 근황에 대해 프레젠테이션도 하기로 했으니 들뜨지 않을 수 없었다.
송년회에 빠지면 섭섭한 ‘경품 뽑기' 순서도 있었다. 마니또라는 이름이었나, 그런 순서가 있나 보다 했지 이 운명의 물건이 나에게 오리라고 생각지 못했다. '이번 선물은 우리 동기 중 자랑스럽게도 글로벌 P사에 다니는 J님이 선뜻 기증해준 자동 면도기지 말입니다! 당첨자는 뚜구 뚜구 뚜구 H! 나와주세요~~~~' 옆에 있는 동기와 ‘그때 내가 그랬네, 네가 그랬네’ 투닥투닥하며 추억 여행 중이었다. 옆에 K가 내 팔을 툭툭 쳤다. '오~ 너 당첨되었어~ 가서 선물 받아와' 그렇게 그 면도기가 우리 집에 왔다.
대출을 많이 껴서 신혼집을 장만한 결혼 5~6년 차 부부들은 대개 그렇지 않을까? 대출 이자를 내느라 빠듯한 살림이었다. 특별히 면도기에 불만이 없었던 그에게 신문물(?) 자동 면도기를 내밀면서 생색을 많이 냈던 것 같다. '오빠, 선물이야! 어젯밤 송년회 가길 잘했지? 앞으로도 보내줘~ 이렇게 내가 운이 좋다니깐!' '나 자동 면도기 필요 없는데?! 형님 드릴까?' '아니! 오빠가 써봐, 좋대'
그렇게 우리 집 욕실에는 글로벌 면도기 브랜드 P사의 헤드가 무려 3개인 면도기가 들어왔다. 선물로 받은 거라 더 드라마틱하게 느껴졌다. 그 동기에게 몇 차례 고맙다고 따로 인사를 전했던 기억도 난다.
"여보, 이 면도기 진짜 좋아. 부드럽게 아주 잘 깎여!"
"아, 정말? 진작 사줄걸..."
당시 대기업에 다니고 있었던 나는 월급을 받고 있었다. 나에게 필요한 생필품, 가령 화장품이라든지 출근복이라든지 구두, 가방을 사는데 인색한 편은 아니었다. 남편이 이렇게 좋아하는데 정작 늦게 사용하게 해 준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라도 들였으니 잘 사용해보자 생각했다. 남편의 물건이었지만 우리 생활이 윤택해진 기분이 들었다.
전동 면도기가 우리 집에 온 뒤 1~2주에 한 번씩은 면도기를 세척했던 것 같다. 새벽에 출근해서 늦게까지 일을 하는 남편에게 면도기까지 세척하라고 할 수는 없었다. 마음에 드는 세련된 네이비 컬러의 면도기는 청소도 참 쉬웠다(고 생각했다). 헤드 부분 작은 버튼을 누르면 탁 하고 열리는데 그걸 흐르는 물에 닦으면 안에 있던 작은 수염 조각들이 물에 씻겨 내려간다. 이리저리 돌려가며 미세한 것들까지 씻겨 내려가게 한 다음 톡톡 쳐서 큰 물기를 턴 뒤 휴지 1~2장을 깔고 자연 건조한다. 그런 뒤 작은 버튼을 채우면 청소 끝!(이라고 생각했다) 이 면도기에는 우리 둘의 추억이 있었기에 청소마저도 기분 좋게 할 수 있었다(고 믿었다).
그렇게 우리 집에 딱이었던 남편의 면도기는 무려 7~8년 동안 우리와 잘 지내주었다. 여전히 바쁜 남편의 아침 시간에 한번 고장 없이 빠르게 면도할 수 있게 도와줬다. 세척하는 걸 놓치면 남편이 했고, 깨끗한 상태일 때도 한 번씩 세척해줄 정도로 애착이 있었다. 어느 날이었다. 유튜브에서 한 영상을 보게 되었다. 그 영상을 보지 않았더라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살림 유튜버의 채널이었던 것 같다. 면도기 세척법에 대한 영상이었는데, 쉽게 말하면 헤드의 모든 부분들이 분리가 되어 간편하게 구석구석 세척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 영상을 봤던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여태껏 내가 한 것은 제대로 된 세척이 아니었다. 살림 고수라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엉터리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는데... 바로 남편의 면도기를 거실로 가지고 와서 티슈 2장을 깔고 헤드를 분해하기 시작했다.
분해할수록 충격이었다. 우선 헤드가 이렇게 몇 개나 되는 layer로 분리가 된다는 것에 충격. 그 사이사이 이물질이 많이 끼어있다는 것이 충격이었다. 이걸 깨끗하다고 믿고 아침마다 즐겁게(?) 면도를 해왔을 그이에게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나는 왜, 면도기에 대해 뭘 안다고 이 면도기가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 매뉴얼을 읽지 않고 면도기 박스에 소중하게 모셔두었던 걸까. 그 박스는 몇 번의 이사로 지금 어디에 두었는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면도기 헤드 청소가 시작되었다. 동원된 도구는 부드러운 솔과 면봉, 그리고 티슈 총 3개의 헤드를 과학적으로 분해해서 정성스럽게, 집요하게, 세척했다. 이물질을 닦은 뒤 원래대로 조립하는 게 중요했기에 테이블에 부품들을 다시 조립하기 쉽도록 그룹 지어 놓았다. 묵은 때가 벗겨지는 순간이 재미마저 있었다. 대망의 그 순간은 오고야 말았다. 대략 한 시간 정도 걸린 것 같다. 이 감흥을 주체할 수 없어서 아이에게 '이것 좀 보라며 면도기가 이렇게나 분리된다 이렇게 때가 나왔다!'라고 수선을 떨었다. 아이는 이물질에 미간을 찡그렸다. 조립도 다 했고, 남편도 곧 올 시간이었다. 오늘의 모험담을 이야기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 끝으로 늘 그래 왔듯 흐르는 물에 가볍게 헹구고 바짝 말리면 준비 끝!
30분 정도 지났을까? 말랐겠지 싶어 전원을 켰다. 이물질이 있을 때보다 모터 소리가 더 청명할 것 같았다. 남편이 오기 전에 그 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런데, 소리가 나지 않았다. '응? 충전이 덜 되었나? 그래, 요즘 충전에 소홀하긴 했어' 30분 정도 충전시켰다. 아직 남편이 오기 전이다. 전원을 켰지만 면도기 작동되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왜 이러지?' AS센터에 연락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요일이었다. 연결이 된다한들 10년이나 된 모델에 AS를 친절히 알려줄 것 같지 않았다. 그것보다 뇌리를 스치는 건 당장 내일 아침이었다. 깔끔한 편인 남편이 양복을 입고 출근하는데 수염이 덥수룩? 상상이 가질 않았다.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집 앞 마트로 갔다. AS를 받더라도 당장 쓸 면도기가 필요했다. 예전처럼 남편의 면도기가 돌아와 준대도 여분의 면도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 나쁜 선택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간 면도기를 사보지 않아서인지 마트에 어떤 면도기가 있는지 몰랐다. 가장 비싼 것으로 골라 사 가지고 올라왔다. 전동 면도기는 아니고 날을 바꿔 쓰는 면도기였다.
계산을 하면서도 엘리베이터를 타면서도 누군가에게 묻고 싶었다. '뭐가 잘못된 것이냐고' 더 아껴주고 더 잘 쓰고 싶어서 깨끗이 청소해준 것인데 우리 집에서 10년을 잘 일해준 면도기가 이제와 작동이 안 되다니. 좋은 물건 아껴가며 잘~ 쓰는 것을 보람으로 삼는 나에게는 너무 가혹한 일이었다. 이럴 일이면 일일이 분해해서 세척하지 말 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올 그이에게 무엇이라고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 이 정든 물건이 작동하지 않는 이유가 나조차도 황당한데...
"띠리 띠리리링"
"왔어? 배고프지~~?"
우리는 우선 밥을 먹었다. 그리고 남편은 스포츠 경기를 봤다. 주방을 정리하고 남편에게 면도기 이야기를 해줬다.
"응 내일부터 이거 쓸게. 저 면도기 오래 썼지~ 요즘 골골하더라고. 바꿀 때 되었지~~ 나 이거 한번 써보고 싶었어"
그렇게 말해주는 남편이 고마웠다. 오래된 남편의 구 면도기에게 알 수 없는 미안함이 몰려왔다. 그렇게 열일해 주었는데... 있을 때 더 잘해줄걸. 일찌감치 구석구석 세척해주고 돌봐줄 걸. 수명이 다해갈 때가 돼서야 깨끗하게 세척해주다니. 그동안 일만 했던 면도기야 미안하다.
아직 그 면도기는 버리지 못했다. 언젠가 다시 전원을 연결하면 뾰로롱 하고 작동이 될 것 같은 일말의 희망이 없지 않기도 하지만, 10년을 함께했던 정으로 쉽사리 버리지 못하겠어서다. 이 일을 겪고 느낀 점이 있다.
비단 면도기뿐일까. 애써주는 게 고맙고, 마음을 표현하고 싶고, 더 잘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 마음이 들 때 표현해주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고맙고, 더 잘해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표현해야겠다. 나중에 해야지 하면 늦다. 반짝반짝 깨끗해진 다음 다시는 켜지지 않는 남편의 구 면도기처럼. 좋은 인연이 내 곁에 언제까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일 수 있다.
남편의 면도기에게 배웠다. 언젠가 남편이 구 면도기를 보면 '아직 안 버렸냐'라고 놀라겠지만, 한동안 간직하게 될 것 같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