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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슈가 Aug 08. 2021

남편의 면도기에게 미안했던 이유

그런 날이 있다. 평소에는 삶아놓은 콩나물처럼 축축 처져 있다가도 불현듯 정리하고 싶고, 청소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 미니멀하게 살고는 싶지만 종종 삶아놓은 콩나물이 되는 나는 그런 날이 오면  기분을 놓칠세라 무엇인가에 돌입한다. 그날의 타깃은 '남편의 면도기'였다.


 하나를 사더라도 꼼꼼하게 살피고 오래  물건을 고르는 나에 비해 남편은 무던한 편이었다. 성실하고 부지런한 그에게 면도기란 얼른 면도하고 출근하는  도와주는 도구  하나였다. 남자들의 면도 생활에 대해  몰랐던 신혼의 나는 남편의 1회용 면도기가 1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가끔 턱에 상처가 생겨도 그게 1회용 면도기 때문이라는   몰랐다.


결혼  5~6 지났을 때였나, 대학생  연합 광고 서클에 몸담았던 나는 오랜만에 서클 동기들과 연말 파티를  생각에 들떠있었다. 우리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단체 사진 촬영을 했던  같다. 강남에서 사진 스튜디오를 하던 서클 후배의 스튜디오를 통째로 빌려서 음식도 먹고 술도 곁들이고 사진도 찍고 각자의 근황에 대해 프레젠테이션도 하기로 했으니 들뜨지 않을  없었다.


송년회에 빠지면 섭섭한 ‘경품 뽑기' 순서 있었다. 마니또라는 이름이었나, 그런 순서가 있나 보다 했지 명의 물건이 나에게 오리라생각지 못했다. '이번 선물은 우리 동기  자랑스럽게도 글로벌 P사에 다니는 J님이 선뜻 기증해준 자동 면도기지 말입니다! 당첨자는 뚜구 뚜구 뚜구 H! 나와주세요~~~~' 옆에 있는 동기와 ‘그때 내가 그랬네, 네가 그랬네’ 투닥투닥하며 추억 여행 중이었다. 옆에 K  팔을 툭툭 쳤다. '오~  당첨되었어~ 가서 선물 받아와' 그렇게 면도기우리 집에 왔다.


대출을 많이 껴서 신혼집을 장만한 결혼 5~6  부부들은 대개 그렇지 않을까? 대출 이자를 내느라 빠듯한 살림이었다. 특별히 면도기에 불만이 없었던 그에게 신문물(?) 자동 면도기를 내밀면서 생색을 많이 냈던  같다. '오빠, 선물이야! 어젯밤 송년회 가길 잘했지? 앞으로도 보내줘~ 이렇게 내가 운이 좋다니깐!' ' 자동 면도기 필요 없는데?! 형님 드릴까?' '아니! 오빠써봐, 좋대'


그렇게 우리  욕실에는 글로벌 면도기 브랜드 P사의 헤드가 무려 3개인 면도기가 들어왔다. 선물로 받은 거라  드라마틱하게 느껴졌다.  동기에게  차례 고맙다고 따로 인사를 전했던 기억도 난다.


"여보, 이 면도기 진짜 좋아. 부드럽게 아주 잘 깎여!"

"아, 정말? 진작 사줄걸..."

당시 대기업에 다니고 있었던 나는 월급을 받고 있었다. 나에게 필요한 생필품, 가령 화장품이라든지 출근복이라든지 구두, 가방을 사는데 인색한 편은 아니었다. 남편이 이렇게 좋아하는정작 늦게 사용하게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라도 들였으니  사용해보자 생각했다. 남편물건이었지만 우리 생활이 윤택해진 기분들었다.


전동 면도기가 우리 집에   1~2주에  번씩은 면도기를 세척했던  같다. 새벽에 출근해서 늦게까지 일을 하는 남편에게 면도기까지 세척하라고  수는 없었다. 마음에 드는 세련된 네이비 컬러의 면도기는 청소도  쉬웠다( 생각했다). 헤드 부분 작은 버튼을 누르면  하고 열리는데 그걸 흐르는 물에 닦으면 안에 있던 작은 수염 조각들이 물에 씻겨 내려간다. 이리저리 돌려가며 미세한 것들까지 씻겨 내려가게  다음 톡톡 쳐서  물기를   휴지 1~2장을 깔고 자연 건조한다. 그런  작은 버튼을 채우면 청소 !(이라고 생각했다) 면도기에는 우리 둘의 추억이 있었기에 청소마저도 기분 좋게   있었다( 믿었다).



그렇게 우리 집에 딱이었던 남편의 면도기는 무려 7~8 동안 우리와  지내주었다. 여전히 바쁜 남편의 아침 시간에 한번 고장 없이 빠르게 면도할   도와줬다. 세척하는  놓치면 남편이 했고, 깨끗한 상태일 때도  번씩 세척해줄 정도로 애착이 있었다. 어느 날이었다. 유튜브에서  영상을 보게 되었다.  영상을 보지 않았더라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살림 유튜버의 채널이었던  같다. 면도기 세척법에 대한 영상이었는데, 쉽게 말하면 헤드의 모든 부분들이 분리가 되어 간편하게 구석구석 세척할  있다는 내용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영상을 봤던 나에게  충격이었다. 여태껏 내가  것은 제대로  세척이 아니었다. 살림 고수라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엉터리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는데... 바로 남편의 면도기를 거실로 가지고 와서 티슈 2장을 깔고 헤드를 분해하기 시작했다.


분해할수록 충격이었다. 우선 헤드가 이렇게  개나 되는 layer 분리가 된다는 것에 충격.  사이사이 이물질이 많이 끼어있다는 것이 충격이었다. 이걸 깨끗하다고 믿고 아침마다 즐겁게(?) 면도를 해왔을 그이에게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나는 , 면도기에 대해  안다고  면도기가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매뉴얼을 읽지 않고 면도기 박스에 소중하게 모셔두었던 걸까.  박스는  번의 이사로 지금 어디에 두었는지도 르는데.


그렇게 면도기 헤드 청소가 시작되었다. 동원된 도구는 부드러운 솔과 면봉, 그리고 티슈  3개의 헤드를 과학적으로 분해해서 정성스럽게, 집요하게, 세척했다. 이물질을 닦은  원래대로 조립하는  중요했기에 테이블에 부품들을 다시 조립하기 쉽도록 그룹 지어 놓았다. 묵은 때가 벗겨지는 순간이 재미마저 있었다. 대망의  순간은 오고야 말았다. 대략  시간 정도 걸린  같다.  감흥을 주체할  없어서 아이에게 '이것  보라며 면도기가 이렇게나 분리된다 이렇게 때가 나왔다!'라고 수선을 떨었다. 아이는 이물질에 미간을 찡그렸다. 조립도  했고, 남편도   시간이었다. 오늘의 모험담을 이야기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 끝으로  그래 왔듯 흐르는 물에 가볍게 헹구고 바짝 말리면 준비 !



30 정도 지났을까? 말랐겠지 싶어 전원을 켰다. 이물질이 있을 때보다 모터 소리가  청명할  같았다. 남편이 오기 전에  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런데, 소리가 나지 않았다. '? 충전이  되었나? 그래, 요즘 충전에 소홀하긴 했어' 30 정도 충전시켰다. 아직 남편기 전이다. 전원을 켰지만 면도기 작동되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 이러지?' AS센터에 연락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요일이었다. 연결이 된다한들 10년이나  모델에 AS 친절히 알려줄  같지 않았다. 그것보다 뇌리를 스치는  당장 내일 아침이었다. 깔끔한 편인 남편이 양복을 입고 출근하는데 수염이 덥수룩? 상상이 가질 않았다.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집 앞 마트로 갔다. AS를 받더라도 당장 쓸 면도기가 필요했다. 예전처럼 남편의 면도기가 돌아와 준대도 여분의 면도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 나쁜 선택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간 면도기를 사보지 않아서인지 마트에 어떤 면도기가 있는지 몰랐다. 가장 비싼 것으로 골라 사 가지고 올라왔다. 전동 면도기는 아니고 날을 바꿔 쓰는 면도기였다.


계산을 하면서도 엘리베이터를 타면서도 누군가에게 묻고 싶었다. '뭐가 잘못된 것이냐고' 더 아껴주고 더 잘 쓰고 싶어서 깨끗이 청소해준 것인데 우리 집에서 10년을 잘 일해준 면도기가 이제와 작동이 안 되다니. 좋은 물건 아껴가며 잘~ 쓰는 것을 보람으로 삼는 나에게는 너무 가혹한 일이었다. 이럴 일이면 일일이 분해해서 세척하지 말 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올 그이에게 무엇이라고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 이 정든 물건이 작동하지 않는 이유가 나조차도 황당한데...


"띠리 띠리리링"

"왔어? 배고프지~~?"

우리는 우선 밥을 먹었다. 그리고 남편은 스포츠 경기를 봤다. 주방을 정리하고 남편에게 면도기 이야기를 해줬다.

"응 내일부터 이거 쓸게. 저 면도기 오래 썼지~ 요즘 골골하더라고. 바꿀 때 되었지~~ 나 이거 한번 써보고 싶었어"


그렇게 말해주는 남편이 고마웠다. 오래된 남편의 구 면도기에게 알 수 없는 미안함이 몰려왔다. 그렇게 열일해 주었는데... 있을 때 더 잘해줄걸. 일찌감치 구석구석 세척해주고 돌봐줄 걸. 수명이 다해갈 때가 돼서야 깨끗하게 세척해주다니. 그동안 일만 했던 면도기야 미안하다.



아직  면도기는 버리지 못했다. 언젠가 다시 전원을 연결하면 뾰로롱 하고 작동이   같은 일말의 희망이 없지 않기도 하지만, 10년을 함께했던 정으로 쉽사리 버리지 못하겠어서다.  일을 겪고 느낀 점이 다.


비단 면도기뿐일까. 애써주는  고맙고, 마음을 표현하고 싶고,  잘해주고 싶다는 '마음' 있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마음이 들 때 표현해주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고맙고,  잘해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표현해야겠다. 나중에 해야지 하면 늦다. 반짝반짝 깨끗해진 다음 다시는 켜지지 않는 남편의  면도기처럼. 좋은 인연이  곁에 언제까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일  있다.


남편의 면도기에게 배웠다. 언젠가 남편이  면도기를 보면 '아직  버렸냐'라고 놀라겠지만, 한동안 간직하게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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