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이 의자 있잖아, 작고 너무 힘이 없어~ 이거 봐봐. 내 엉덩이도 지탱하지 못하잖아~ 그러니 이 의자 좀 버려"
"응~ 알았어 여보!!"
"엄마, 이 의자 앉으면 엉덩이에 구멍 생기는 것 같아. 나 다른 의자 앉을래"
"응~ 알았어 알았어 얼른 밥 다 먹자?"
아이는 그렇다 치더라도 남편도 그 의자를 싫어했다. 심미안 적으로도 편의성 측면에도 그 의자는 남편 취향이 아니었다. 체격이 큰 편인 그에게 그 의자에서 엉덩이를 받쳐주는 부분 면적이 한참 작기도 작았다. 그가 앉으면 엉덩이 일부와 허벅지 일부가 의자로부터 삐져나오기 일쑤였다. 그러니 그 의자가 싫기도 했을 것이다.
"여보, 여기 형광등! 형광등이 나갔어, 이것 좀 와서 갈아줘"
"응~ 알았어"
작은방 형광등이 나갔다. 저녁 때라 당장 갈아야 할 것 같아서 남편을 불렀는데 그 의자를 받쳐준 것이 화근이었다. 전등을 끼우려던 남편이 기우뚱하더니 넘어질 뻔했다. 다행히 넘어지진 않았지만...'그러길래 저 의자 좀 버리고 제대로 된 의자를 사자고!' '응, 알았어...'남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 남편도, 아이도, 그렇게 싫다는데. 본전이 생각날 만큼 비싼 의자도 아니건만(의자는 오히려 저렴한 의자에 속한다) 나는 왜 구멍이 숭숭 난 저 의자를 버리지 못하는 걸까.
"네~ 내일 늦지 않고 출근할게요, 알겠습니다"
"무슨 전화야?"
"응, 부장님. 대표님께 보고할 거 있다고 일찍 출근하라고"
대기업 홍보 부서에 근무했을 시절. 집과 제법 거리가 있었던 회사에 출퇴근하는 것은 녹록하지 않았다. 급여 조건이 좋은 회사였기에 무턱대고 그만둘 수도 없었다. 어린아이를 키우며 출퇴근 각각 한 시간 반씩. 길에 세 시간씩을 보내며 출퇴근을 했는데 그때 뭘 좀 하려면 늘 30분이 모자랐다.
출근 준비할 때도 딱 30분이 아쉬웠다. 주말에 어딜 다녀온 뒤 짐을 정리하고 쉬고 싶은데 딱 30분이 더 걸렸다. 퇴근하고 저녁 먹고 치우고 좀 쉬고 싶은데 딱 30분어치의 할 일이 날 기다렸다.
집안일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까만 빨래와 흰 빨래를 구분해서 세탁기에 넣는 것 까지는 하겠는데 빨래가 다돼서 삑삑 거리면 그걸 꺼내서 베란다 건조대에 너는 30분이 늘 부족했다. 그렇다고 나처럼 다된 빨래를 탈탈 털어서 반듯하게- 바로 입어도 될 정도로 구김이 안 가게- 잘 너는 사람이 우리 집에 없었다. 내가 해야 직성이 풀리는 내 일이었다.
가을이나 겨울에는 그나마 나았다. 한두 번 제때 너는 걸 놓치더라도 빨래에서 걸레 냄새가 나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문제는 여름이었다. 10~20분만 늦게 널어도 그날 빨래는... 투자에 타이밍이 중요하듯 빨래에도 타이밍이 중요하다는 것을. 누가 나를 대신해 꼭 나처럼 빨래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애엄마가 되고 나서 알았다.
어떤 날은 출근 전 간단히 40분 표준 코스로 빨래를 돌린다. 수건이나 런닝 티셔츠 빨래가 밀렸을 때다. 아이 밥을 주고 나도 머리를 말리고 간단히 스킨 로션을 바르고 출근을 했다. 그렇게 빨래를 하고 출근하면 그렇게 마음이 편했다. 퇴근해 돌아와 빨래를 걷어서 TV를 보며 빨래를 개는 그 시간은 나의 힐링 시간이었다.
아무 생각하지 않으며 깔깔거리며 예능을 보면서도 마냥 노는 게 아니라 손으로는 일하고 있는 시간. 마음의 안도가 되었다. 퇴근하고 세탁기부터 돌리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출근해서 일하는 동안 빨래는 빨래대로 볕이 잘 드는 거실에서 마르고 있었고 나는 나대로 퇴근해 돌아와 그들을 걷어 개면 되는 것이니 이것만큼 완벽한 분업이 또 있을까?
그런데 다된 척척한 빨래를 세탁기에서 꺼내서 베란다 건조대로 가지고 가서 너는 그 시간. 그 시간이 늘 없었다. 그렇게 하면 회사에 늦기 마련이었다. 그러다 눈에 띈 것은 구멍 숭숭 뚫린 그 의자들이었다. 4개의 의자에 빨래를 설렁설렁 펴서 옷감이 겹치지 않게 대강대강 널어놓는다. 의자에 구멍이 나있기 때문에 그렇게 설렁설렁 널어도 쉰내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방법을 안 후로 한동안 나는 살림이 재미있어졌다. 누구도 모르고, 어쩌면 알고 싶어 하지 않을 작지만 막강한 꿀팁을 나만 알게 된 것 같아서다. 깔끔한 성격인 남편이 먼저 돌아와 식탁 의자에 널려 있는 속옷이며 양말이며 수건들을 보면 기겁을 했지만, 뭐 어떠랴. 보송하게 말라있는 깨끗한 세탁물인 것을.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습관 결혼 후에 생긴 것이 아니었다...
"빨래를 또 했어? 오~~ 부지런하네"
"으.. 으응(멋쩍은 미소)"
지방에서 고등학교를 나와 서울에 있는 사립 대학에 입학했을 때 기숙사 생활을 했다. 당시 학교 기숙사는 신축 건물이라 경쟁률이 셌다. 지방에 잘 사는 친구들은 다 모여든 듯했다. 샤워실도 새 것, 세탁기도 새 것, 침대도 새 것, 책상도 새것, 식당도, 휴게실도 모두 다 새 것이었다.
친구의 눈에 내가 자기보다 자주 빨래를 하는 것처럼 보였는지 어느 날 나에게 물었다. 또 빨래를 했냐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친구들보다 빨래를 자주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왜일까 생각해보니 나는 입을 옷이 그리 많지 않아서였다. 여자들 옷이 많다고 해도 입는 옷만 입지 않던가. 당장 내일 중요한 약속(미팅...??)이 생겼는데 오늘 입었던 옷을 또 입고 싶으면 빨래를 했다. 그리고 두 명이서 쓰는 기숙사 방 의자에 널어놓는다. 그래야 라디에이터 온기에 또는 에어컨 찬 바람에 옷이 잘 말랐기 때문이다.
꽤 오래전부터 있던 이 습관이 내가 의자를 고를 때 구멍이 숭숭 뚫린 디자인의 의자를 사게 만들었던 것 같다. 의자를 살 때는 몰랐지만 돌이켜보니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동안 나만 아는 이유로 그 의자들을 애정 하며 잘 써왔는데 이제 남편과 아이는 구멍 뚫린 의자를 제발 버리라고 하는 것이다.
"오늘은 꼭 구매 버튼을 누르고 말 거야"
구멍이 숭숭 난 의자 대신 쓸 원목 의자를 오늘은 꼭 고르겠다고 다짐을 했다. 의자 종류가 너무 많아서, 가격이 너무 비싼 것들만 보여서, 막상 골랐는데 오크로 할지 월넛으로 할지 결정을 못해서 등의 이유로 계속 새 의자를 들이는 것이 늦어졌다.
형광등 사건이 있은 후로 더는 미루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날 나는 드디어 의자를 주문했다. 구멍 숭숭 난 플라스틱 의자가 아니라 구조적으로 아름다우면서도 튼튼한 원목의자를. 요즘이 어떤 세상인가. 의자 배송도 총알처럼 왔다. 하루인가 이틀 만에. 이럴 거면 그동안 왜 그렇게 꼼지락 거렸는지 허무하다 싶을 정도로 신속하게 새 의자가 집에 왔다.
의자 쇼핑은 대성공이었다. 한참 라탄 열풍으로 라탄 소재의 의자가 유행이었는데, 라탄 소재 의자로 했으면 조금 질릴 뻔했다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 산 의자는 그렇게 유행을 타지 않으면서도 심미안적으로 예쁘다. 이건 호텔 가구 큐레이팅을 하는 전문가가 해준 코멘트였다. 예쁘기만 한가? 튼튼하기도 하다. 무엇보다 엉덩이를 받쳐주는 부분이 넉넉할 만큼 넓다. 남편에게 새 의자가 어떤지 물으니 정말 마음에 든다고 했다.
이제 나의 구멍 숭숭 난 의자들은 버려야겠지...?
구멍 숭숭 난 의자가 거실에서 안 보인다고 해서 버렸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나를 잘 모르는 얘기다. 구멍 숭숭 난 의자들은 서재방에, 욕실에, 주방 한 구석에 여전히 자리하고 있었다. 보호색이라도 된 양 흰 의자는 흰색 벽 앞에, 까만 의자는 다용도실 안에. 테이블에는 새 의자가 버젓이 있어서인지 가족들은 그 의자가 아직 우리 집에 있는지 잘 모르는 눈치다.
그럼 이 구멍 숭숭 난 의자를 언제 쓰냐고? 식구들이 출근, 등교한 후 빨래가 많은 날 베란다 건조대에 널지 못한 빨래들은 여전히 이 의자에 널어진다. 그런 시간에는 보통 거실 베란다 문을 활짝 열어 두어서인지 건조대보다 빨리 마르는 경우도 있다. 그러고 보면 의자에 난 이 구멍들은 애초에 이렇게 하라고 만들어진 것 같기도 하다.
아침 집안일을 대강 마치고 한쪽에 노트북을 펼치고 일을 시작하노라면 빨래는 빨래대로 구멍 숭숭 난 의자에서 마르기 시작하는 그 시간, 그 완벽한 분업이 나는 여전히 좋다. 대학 시절 기숙사 생활할 때, 나만 빼고 다 부유한 것 같은 친구, 선배, 후배들 사이에서도 기죽는 걸 모르고 꿋꿋이 내 아르바이트를, 공부를, 취미를, 일상을 알뜰살뜰 챙기며 하루하루 잘 살아냈던 그 때의 내가 떠오르는 것 같아서...그래서일까 아직 나는 이 구멍 숭숭 난 의자를 버리지 못하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