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나의 '책상머리 안식년'에 대한 원대한 계획을 말할 수 없는 한 사람이 있었다. 가장 가까이에 있지만 가끔 가장 멀게 느껴지는 사람. 성실과 끈기, 의리를 삶의 덕목으로 삼는 사람. 그래서 가끔 답답하게 느껴지는 사람.
럭셔리한 여의도 증권가에서 근무했지만 짜장면과 새우깡, 초코파이를 좋아하고 비누 하나로 샤워를 끝내는 사람. 20년 넘게 ‘을’로 살아서인지 ‘을’의 태도가 몸에 배어버렸다고 말하는 사람. 일과 가정 중에 무엇이 더 중요하냐는 질문을 받으면 가정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일이라고 답할 사람.
그동안 가정 경제를 함께 일궈준 아내가 고마우면서도 내색은 안하는 사람. 앞으로도 함께 이끌어 나갈 것을 철썩같이 믿고 있는 사람. 그런 남편에게만큼은 나의 안식년 계획을 말할 수 없었다.
부동산 사무실과 집 등 가장 가까이에서 생활하는 사람을 속이기는 어려웠기에 매일이 007 작전이었다. 남편이 별 뜻 없이 물어본 ‘지금 뭐해?’라는 톡메세지에 혼자 가슴이 콩닥거렸으며, 사무실 책상에 늘어놓은 알수 없는 손글씨들, 영상 제작용 스토리 보드 같은 것들을 그가 유심히 보는 것 같으면 별거 아니라며 치우기 바빴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그게 그에게 도리인 것 같아서다. 나를 철썩같이 믿고 있는 그의 앞에서 대놓고 조금 쉬어 보겠다고 하는 건 왠지 그를 괴롭히는 일 같아서다. 어떻게 해서든 이 업을 일궈나갈 사람에게 시작부터 초를 치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배우자에게 털어놓고 위로도 받고 함께 대책을 마련하는게 잘 맞는 부부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좀 달랐다. 힘든 일이 생겼을 때 서로에게 먼저 털어놓기 보다는 일단 힘든 시기를 버텨보는 것. 다 지나고 난 다음 덤덤한 말투로,
"당신은 몰랐겠지만, 이런 일이 있었어. 왜 말 안하기는. 당신도 힘든데 내가 보태서 뭐하게. 그리고 나 이런 일들 시작했어. 앞으로 잘 되도록 노력해볼게”
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부부도 세상엔 존재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 부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