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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슈가 Oct 05. 2020

짝짝이 양복의 남자

아침 6 30

우선 안방 베란다에 쳐있는 암막 커튼을 확 걷는다. 베란다 창문을 활짝 열어둔다. 밤새 들이키고 내쉬었던 공기들을 내보내고 상쾌한 공기(도시의 공기가 상쾌하기만은 않을 테지만)로 환기시키기 위해.


킹사이즈 침대 위에 널려있던 촉감이 좋은 이불도 공중에 탁하고 한번 띄운 뒤 가지런히 펴놓는다. 다시 쏙 들어가 누울 생각이 들지 않도록. 나는 아이 등교까지 챙기고 나서 운동을 다녀올 것이다. 그러고 나서 30분 정도 눈을 붙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남편이 출근했을 때 나도 아침을 시작하는 것. 그것이 일찍 출근하는 직장에 다니는 남편에 대한 내 오래된 배려였다.


아침 7시

7시가 되면 아이방으로 가서 아이를 깨운다. 지는 매일 어떻게 된 게 늘 아침마다 잠이 부족하단다. 10시에 전날도 친구와 한판만 하겠다던 핸드폰 게임을 두 판이나 한 날도. 하지만 두어 번 알람이 울리면 곧잘 일어나는 편이다.


비가 오는 날은 내가 학교에 태워다 주기도 하지만 보통 지는 마을버스를 타고 학교에 간다. 학교에 도착했다는 gps알림이 오면 그때다. 나는 크로스 가방을 메고 집 근처 공원으로 운동을 하러 나간다.


그날도 맑은 날이었다. 일 년도 더 된 그때 날씨를 어째서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지는 뒤에 나오니 조금 기다려 주시라. 까만 기본 레깅스에 엉덩이를 덮는 길이의 블루 반팔 티셔츠를 입고 집을 나서는데, 문득 베란다에 걸린 양복 상의가 나를 붙잡아 끄는 듯했다.


남편은 여의도 금융계 회사를 다니는데 매일 와이셔츠에 양복을 입고 출근을 한다. 셔츠도 색깔 있는 셔츠는 안된다. 기본 클래식한 셔츠를 입어야 한다(고 했다). 양복도 마찬가지였다. 양복 종류를 가리키는 말 중에'콤비 양복'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 바로 위아래가 패턴이나 컬러가 다른 양복을 가리키는 용어다. 짐작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콤비 양복도 안된다(고 했다).


그런데 직장 생활이라는 것이 회식도 있고, 꼭 회식이 아니더라도 고깃집에 소주 한잔을 걸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런 날이면 음식 냄새가 배일 수도 있고. 그래서 양복을 2개를 번갈아가며 챙겨주곤 했다. 그런데... 이 싸한 느낌은 뭐람?


남편의 부서는 아침 일찍 회의를 하는 날이 많았다. 회의에서는 종종 숫자를 이야기해야 하기도 해서 안 그래도 부지런한 편인 남편은 동료보다 상사보다 조금 더 이른 시간, 동이 터올 무렵이면 집을 나서곤 했다. 그날도 그랬다.


그래서 그것이 무슨 문제라도 되었느냐고? 내 시선을 잡아끌었던, 베란다에 걸려있는 양복 윗도리와 아랫도리의 색깔이 다르다! 짝짝이 양복을 준비해 준 거다. 남편은 주는 대로 입고 갔던 것이다. 남편이 출근했을 30분전은 짙은 남색과 짙은 회색 차이가 도드라지지 않을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아침 8시

8시는 다르다. 그야말로 훤하게 밝다. 남편의 양복 재킷과 바지의 색깔이 다른 것은 누가 봐도 확연히 알아볼 정도로 쉬운 문제였다. 여느 때처럼 가뿐한 마음으로 운동을 나가려고 했던 나는 슬그머니 가방을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우선 드는 생각은 나에 대한 자책이었다. 그러게 평소에 꼼꼼하다고 자부하더니, 내 이럴 줄 알았어. 아침에 얼마나 비몽사몽 정신이 없었으면 남편 양복 하나를 제.대.로. 챙겨주지를 못해...


다음은 예상되는 남편의 반응이었다. 벨소리라도 울리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여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양복이, 양복이 위아래가 다르잖아??? 오늘 거래처 중요한 점심 약속 있다고 내가 말했는데? 여보 듣고 있어? 그럼 나보고 어쩌란 말이야~ 아 정말 어떡하지? 일단 끊어봐 (뚜뚜뚜-)"


책임감 있고 속정이 깊은 타입인 남편은 그러나 말을 좀 세게 할 때가 있었다. 신혼 때 그럴 때가 있어서, 말투만큼은 고쳐달라고 당부했었는데, 오늘같이 결정적인 순간(?)에 저 정도는 예상되는 바였다. 어쩌랴. 내 잘못인 것을. 그는 나에게 양복을 챙겨달라고 역할을 주었고, 나는 그 역할을 하는 사람인 것을. 이 문제는 명백하게 내 잘못인 것을!


희한한 일이었다. 그때 갑자기 몇 년 전 시어머니가 하신 말씀이 떠오른 것은.

 

"얘, 애미야 아범 양복 찾아오니? 와이셔츠도 맡기니? 번거롭겠구나~"

"네, 어머님 그런데 제가 와이셔츠를 칼같이 다리는 재주가 없어서요. 세탁해서 맡겨요(미소)"

"그래, 잘해왔네. 그런데 너도 나이가 더 들면 네 남편 와이셔츠는 네 손으로 다리게 될 거야. 그만큼 남자들은 옷 입는 게 중요하더라"


며느리 듣기 싫지 않게 배려하시면서 말씀하시는 어머님이시라, 그때 당시에도 네에~ 하며 듣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 그날 그 말씀이 떠오를게 뭐람? 문득 오빠네 회사의 다른 아내들은 남편의 와이셔츠를 직접 다릴까? 나처럼 전문가에게 맡길까? 아님 남편들이 직접 다리려나? 쓸데없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오전 11시

시간은 흘러 11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마치 오기로 한 전화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선생님께 잘못한 것을 들키고 '너 교무실로 와'하는 말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직장 상사가 '엘과장, 내방으로 좀 오게'하는 말이 떨어지기만 기다리는 미생처럼. 그렇게 아무것도 못하고 안방을 서성이며 애꿎은 양복만 흘겨보고 있었다. 짝이 맞지 않는 너를 어찌하면 좋으나며.


배가 고파서 밥을 차려서 먹었던 것 같다. 나는 프리랜서 1인기업가로 집에서 글도 쓰고 일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약속이 없는 날이면 집에서 점심을 먹곤 한다. 잘 먹어야 일도 잘된다는 생각이라 특히 점심은 잘 챙겨 먹는 편이다. 혼자 여러 종류의 쌈에 고기를 구워서 견과류를 넣은 쌈장에 들기름을 한 방울 뿌려 야무지게 챙겨 먹는 날들도 있으니까.


그런데 이 날은 그럴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있는 장아찌에 밥에 물 말아서 대충 먹었던 것 같다. 내 마음은 초반에는 '혼날 것 '같은 두려움이었다가 점점 '미안한'마음으로 변하고 있었다.


좋은 양복에 좋은 시계에 와이셔츠도 맞춤으로 잘 차려입는 날렵한 여의도 금융맨들 사이에서 남편은 쓰리엑스라지 정도는 되는 양복을 입었다. 덩치가 커서 맵시는 잘 안나는 양복이더라도 항상 깔끔하게 입고 출근하게 하려고 내 나름은 노력해왔다.


지금은 스타일러(스팀 기반 옷 관리 가전)도 있지만, 이걸 사기 전에는 남편이 퇴근해오면 양복을 탈탈 털어서 페브리즈를 착착 뿌려두고, 음식 냄새가 신경이 쓰인다 싶으면 따뜻한 목욕물 받을 때 욕실에 일부러 걸어서 스팀을 쏘여주었다가 추운 베란다에 밤새 내놓으면 다음날 또 뽀송한 양복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손님들과 이야기하길 좋아하는 동네 세탁소 아저씨는, 양복을 찾으러 가면 가끔 이야기를 나누는데 '양복이 3~4년은 된 거 같은데, 라벨을 보면 상태가 차암~ 좋아요. 관리를 잘하신 것 같아요'나 듣기 좋은 말을 하셨던 건지 어떤 건지는 몰라도 뿌듯하기도 했었다.


정오 12시

그런데, 그렇게 들인 공이 하루 아침에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중요한 점심 약속에서 상대 회사의 상무나 부장 정도 되는 키맨, 의사결정권자가 "김차장, 그런데 김차장 양복은 그게 뭔가? 허허허" 하는 광경이 자꾸만 그려졌다. 남편의 대응도 그려졌다. '그게... 제가 요즘 하도 열심히 일해서 아침에 그만, 헛헛헛" 그러고 돌아와 나를 원망하겠지... 열두 시란 말이야. 이제 그만 전화를 하라고!


오후 1시

직장인들의 점심 식사는 대개 12시 반이면 끝난다. 우리도 신혼 때 서로 점심을 잘 먹었는지, 무엇을 먹었는지 안부를 묻는 스위트 한 통화를 매일같이 했었는데(지금은??) 남편은 12시 30분에 12시 40분에 전화를 하곤 했다. 그 말은 무슨 이야기냐 오후 1시면 비즈니스 식사가 끝났을 시간이란 말이다. 그러니 어서 전화를 하라고!


1시를 알리는 분침이 12에 딱 걸리는 순간 나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두세 번이면 받는 사람인데, 대여섯 번이 지나도 받지 않았다. 그러다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 "어, 나야 왜?", "오빠... 혹시...", "응 왜? 무슨 일 있어?"

"양복! 양복 미안해!", "응 무슨 말이야?", "내가, 내가 양복을 짝짝이로 챙겨줬잖아. 그래서 오빠 윗도리랑 아랫도리가 다른 걸 입고 갔잖아. 미안해. 앞으로는 내가 더 잘 챙길게... 정말 미안해..."


"괜찮은데? 날이 더워서 재킷은 출근하자마자 의자에 걸어두었는데? 그랬었어? 에이 뭐 그럴 수도 있지. 걱정 마. 아, 나 회의. 이따 보자" (덜커덕 전화 끊어지는 소리)뚜뚜뚜뚜-


거실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던 것 같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괜한 걱정 한 보따리를 하느라 정작 못했던 내 해야 할 일이 생각 나서였는지, 괜히 전화까지 해서 말해버렸다! 고 생각이 들어서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남편도 정말 그렇게 양복 윗도리를 의자에 걸치고 입고 다니지 않았는지, 혹시라도 내가 걱정하고 자책할까 봐 생각나는대로 대강 둘러댄 것인지, 아니면 거래처 부장에게 한소리를 들었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우리 부부의 시간 14년

다만 조금은 알겠는 것은, 이게 우리 부부가 서로를 생각하는 방식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양복을 챙겨주는 아내의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하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내 잘못만은 아니라고 우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남편도 이 부분은 전적으로 아내 역할이고 아내의 잘못이라고 성을 내며 책임을 물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결정적인 순간에는 종종 자신의 책임으로 떠안는 편이었다. 상대방을 감싸주곤 했다.


그렇게 우리의 시간이 흐른다. 어떨  팽팽하게 어떨  느슨하게...어떨  뜨거웠다가 어떨  미지근하게...어떨  차갑기도 했지만 다시 따뜻하게 데워지면서...그렇게 부부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베란다에 걸려있는 짝짝이 양복이  이상 눈에 거슬리지 않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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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단 타이틀 이미지 정보: Photo by Ruthson Zimmerma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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