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플 시럽을 사보았다
편안하고 폭신한 침구. 새것은 아니지만 새것 같은 침구에서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다가 통창으로 들어오는 깨끗한 햇살이 톡톡 잠을 깨우면 일어나 조식을 먹으러 가는 경험. 일 년에 며칠 안 되는 ‘여행’이라고 불리는 일정에 꼭 빠뜨리지 않는 시간이기도 했다.
누군가 '조식을 먹을 때 어떤 메뉴를 좋아해요?'라고 물으신다면 그때그때 떠오르는 것을 이야기하면서도 조리사 모자를 쓴 호텔 조리사가 그때그때 구워주는 따끈한 팬케이크를 빼놓지 않곤 한다. 호텔에서 먹는 팬케이크는 어째서 집에서 하는 것과 달리 구름처럼 폭신하고 봉긋하고 아주 살짝 달달한 것인지... 왜 집에서 내가 만들면 그 맛이 안나는 것인지... 여기서 한 가지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면 팬케이크 위에 뿌리는 메이플 시럽이다.
투명하고 꿀보다는 살짝 가벼운 텍스처에 살짝 어떤 나무향이 나는 것만 같은 시럽. 메이플 시럽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이십 대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회사 동료가 해외여행을 다녀와서 사온 작고 투명한 병에 들어있는 시럽. 그때 본 메이플 시럽 병은 플라스틱이 아닌 유리병이었다. 저 희귀하고도 작은 유리병에 들어있는 먹을 것이 얼마인지는 잘 몰랐지만 그것을 깨지지 않게 한국으로 가지고 들어와 선물했다는 것만으로도 오래 기억에 남는 선물이었다.
예전에는 메이플 시럽이 강남의 고급스러운 푸드마켓에나 가야 살 수 있었던 식자재 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제는 집 앞 마트에서도 쉽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어느 날 퇴근 후 딱 저녁에 필요한 것들만 사러 들린 집 앞 마트에서 계산 줄을 기다리는데 메이플 시럽이 보였다.
‘사두면 유용하게 먹을 것 같은데 한병 사볼까?' 싶다가도 ‘손님 이쪽으로 오세요'라는 계산대 직원분의 순서 알림에 '다음으로'미루고 어느 날은 '장바구니가 꽉 차 손이 부족해서'미루고 어느 날은 '굳이 오늘?' 하면서 미루곤 했다. 당장 없으면 안 되는 식재료가 아니어서 그랬겠지만, 왠지 머릿속에 메이플 시럽은 '잘 사는 사람들'이나 갖추고 사는 '대단한 시럽'으로 여겨져서 그랬다는 생각을 이제야 해본다.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외출했다가 집에 돌아오면서 저녁 찬거리를 사러 대형 체인이지만 골목 구석구석에 들어와 있는 마트에서 장을 보고 계산을 기다리는데 점원 분이 '손님 1만 원만 더 채우시면 2000원 할인권을 드려요'라고 말했다. 나는 평소에 그런 할인권이라면 자다가도 눈을 번쩍 뜨는... 그래서 대답했다. '아, 그럼 채울만한 것을 좀 더 찾아볼게요, 제건 보류로 해주시고 다음분 계산부터 먼저 해주세요!' 그리고 계산대 주변에 1만 원짜리 상품을 찾아보는데 어느새 나는 메이플 시럽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게 거기에 있었는지 어떻게 그렇게 정확히 알고 있었는지는 미지수다.
그렇게 나는 내 생애 첫 메이플 시럽을 샀다. 이 것도 역시 유리병에 들어있었다. 장바구니에 여러 개 상품과 섞이게 들고 오지 않고 이것만 내 본래 가방에 넣어 소중하게 집으로 모셔(?) 왔다. 그리고 가끔 구워 먹다가 말다가 했던 팬케이크를 다시 구워 생애 처음으로 집에서 메이플 시럽을 뿌려서 먹어보았는데...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고? 팬케이크에 넉넉히 뿌린 메이플 시럽 맛과 풍미는 생각보다 밍밍했다. 단풍나무 수액에서 추출했다는 메이플 시럽 아닌가? 호텔에서 먹었던, 진하고 쓴 모닝커피맛과 대비되던 진하고 달콤한 향으로 기억되었던 메이플 시럽 맛이 영 밍밍하게 느껴졌다. 내가 산 것은 어떤 호텔에서도 본 그리 나쁘지 않은 브랜드였음에도 말이다.
어쩌면 나는 메이플 시럽을 사서 집에 놓고 사는 일상에 대한 환상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얼마 하지도 않는 메이플 시럽 한병을 사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걸렸는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여전히 고군 분투 중이지만 이미 메이플 시럽 한 병쯤 사놓고 먹으며 살아도 되는 날들이었다. 그렇게 좋아하는 맛이면서도 시럽 한병 사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인지 이 작고 갈색의 시럽이 뭐라고 보고 있노라면 미소가 지어진다.
그런데 맛은, 맛은 어떠했나? 막상 사서 곰곰이 생각하며 먹어보니 그렇게까지 기대하던 맛까지는 아니었다. 어쩌면 세상 이라는게 그렇지 않을까?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가지기 위해 노력하고 그걸 가지기까지 애가 닳는. 하지만 막상 가지고 난 뒤에는 조금 허탈한.
메이플 시럽이 있는 일상은 달라질 줄 알았던 나는 생애 첫 메이플 시럽을 가졌지만 내 일상은 크게 변한 게 없었다. 이 메이플 시럽을 알뜰살뜰하게 잘 먹기위해 봉긋하게 팬케이크 굽는 실력은 나날이 향상 중이라는 것을 빼고는.
아. 얻은 것은 하나 더 있다. 더이상 이 작고 확실한 행복들을 유보하지 않겠다고. 제 2의 메이플시럽은 무엇이 될지는 모르지만, 알게되면 금방 사서 먹겠노라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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