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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슈가 Oct 20. 2020

또 레몬을 죄다 버리고 말았다

지난달에도 지지난 달에도

이사 온 동네에 있는 마트는 유독 과일이며 채소가 저렴했다. 저렴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상태도 싱싱하고 좋았다. 이 동네에 이사 오면서 우리 집 밥상에 좀 더 자주 채소가 올라갔다면 조금 과장일까...


그날도 퇴근하며 저녁 찬거리 장을 보는데, 투명한 팩에 든 노랗고 싱싱한 레몬 가격이 믿을 수 없는 가격대였다. 내가 잘못 본건가... 뒷걸음으로 다시가 확인해도 레몬 한팩에 2990원. 장바구니가 가득 차 있어도 담지 않을 수 없는 가격대였다.


이 글을 보며 주부들이 레몬을 왜 사는지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계실까 설명을 하면, 내 경우는 첫 번째로 레몬청을 담기 위한 용도로 산다. 날씨가 쌀쌀해지기 시작할 때 따뜻하고 신 음료를 마시면 오려고 했던 감기도 달아나는 것 같았다. 누구나 집에 하나씩 다 있는 것 같은 레몬청 담을 때 쓰기 좋은 제법 큰 유리병에 설탕반 레몬반이 담겨있는 광경을 보면 어느샌가 황홀하다.


그래서 이 날도 나는 레몬을 샀다. 가만있자... 레몬청을 언제 담그지? 요 며칠 그리 바쁜 일도 없으니 주중에 주방 빨리 마감하는 날 뚝딱 담그면 되겠다, 생각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뚝딱'이라는 표현은 좀 맞지 않아 보이긴 한다. 뚝딱은 무언가를 손쉽게 만들어내는 재주가 있는 사람들의 용어니까...


우선 저녁을 지었다. 찬은 몇 개 없어도 사온 반찬은 없는 밥상은 종종 내 목표가 된다. 상추나 양배추, 파프리카나 생오이 등 남편이 좋아하는 생채소도 한두 개 곁들이는 것. 나는 생채소를 좋아하지 않지만 생채소를 좋아하는 그를 위한 배려였다. 남편이 돌아와 식탁에 앉았고 아이도 그날따라 배가 고팠는지 한 그릇을 싹 비웠다.


남편이 설거지를 해줄 때도 종종 있었지만 그날은 아니었다. 설거지까지 마무리하니 9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좀 앉아서 쉬었다 담글까, 레몬청?' 나는 소파에 편한 자세로 누워(?) 티브이를 보며 한동안 깔깔거리다가 주방으로 와 레몬을 힐끔 쳐다보았다.  '내일 담가도 되잖아! 오늘 급하게 하느니 내일, 차분히 열 고르게 예쁘게 담자'  레몬은 아직 싱싱해 보였다.


다음날도 그 다음 날도 사는 게 리드미컬하게 변화가 있으랴...비슷비슷한 날들이었다. 너무 힘들어 죽겠다는 말이 나올 정도는 아니지만, 일이 없어 무료한 날들은 아니었다. 저녁을 지어먹고 좀 쉬어야지 하면 그렇게 몸이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사람을 만나는 일이 많고 만나면 있는 에너지를 힘껏 다 쓰고 오는 편이어서인지 집에 오면 그저 누가 나에게 말 좀 안 걸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좋아하는 책이나 읽고 영상이나 보면서 낮의 긴장을 좀 내려놓고 충전하는 일. 남편도 바랬지만 나 역시 바라는 일이기도 했다.


그렇게 금요일이 왔다. 오늘은 레몬청을 담가야 한다! 하지만 나는 금요일 예능과 약속이 되어 있었던 몸. 그 날도 레몬청을 담그지 못했다. 토요일은 아이와 남편과 놀이동산에 다녀왔다. 그런 날은 하루가 없어지는 듯 후딱 가버린다. 그런 날은 다음날 낮까지 게으르고만 싶다. 일요일 5시. 저녁을 준비해야 할 시간이다. 또 다음 주에 챙겨야 할 일들이 하나씩 떠오르는 시간대 이기도 하다.


주방 한쪽 잘 보이는 곳에 올려두었던 레몬 팩을 자세히 들여다 본다. 팽팽하고 동글동글하고 윤기가 났던 레몬은 어느새 쭈글쭈글해지고 윤기가 하나도 없다. 크기도 좀 더 작아진 것 같다. 이걸 먹는다고 본래 영양이 전달될까 싶기도 하다. 게다가 레몬청은 숙성했다가 먹는 음식 아닌가? 여기서 몇 주를 더 있다가 먹을 텐데...몸에 도움이 될 확률보다는 사람 잡을 확률이 높아 보인다.


'그래도 버리긴 아까운데...' 그중에서 제일 싱싱한 놈을 골라 베이킹소다를 묻혀 닦아본다. 그리고 1/4조각으로 잘라 방금 따라놓은 생수에 꾹 짜 넣어 본다. 그리고 벌컥벌컥 들이켜본다. '음... 시다. 아직 맛있어!' 이렇게 8개의 레몬 중 하나는 해결했다. 나머지는 어떻게 하지? 고민하는데, 어째 이 고민이 낯설지가 않다?


나는 지난달에도 레몬을 샀다. 그때도 같은 마트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도 레몬청을 담그려고 레몬을 샀었다. 그렇지만 나는 지난달에도 레몬청을 담그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처럼 똑같이 고민을 했던 것이다. 생각해보니 몇 달 전에도 레몬을 샀고 고민을 하다 버렸었다. 이쯤 되면 레몬이 고민인 것이 아니라 내가 고민이다!


나는 왜 진득하니 차분하게 앉아서 레몬청을 담그질 못할까? 쫑쫑쫑 가지런히 레몬을 썰어 레몬 한층 유기농 설탕 한층 그렇게 소독한 유리병에 켜켜이 꽉차게 담고 뚜껑을 닫은 뒤 하루밤은 거꾸로 두는 방법도 알고 있으면서. 시중에 파는 레몬청은 너무 달고 못 미더워서 직접 담그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알고 있으면서. 지인들이 그렇게 담가 먹는 것이 참 부럽고 배울 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심지어 집 앞 마트에서는 저렴한 가격대에 싱싱한 레몬이 '날 사가시오' 하고 싱싱함을 뽐내며 기다리고 있는데도 나는 레몬청을 담그지 못했다. 애초에 나는 레몬청을 담그고 싶어는 하지만 담글 수 없는 사람인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나를 닦달한 듯 무슨 소용이랴. 레몬은 시들었고 쪼그라들었고 이미 영양가치가 줄었을 것이다. 나는 가격도 좋고 싱싱한 레몬을 볼 줄 알고 살 줄 아는 안목은 지녔지만 차분하게 앉아 레몬청을 담그지는 못하는 성향이다. 그렇지만 뭐 어떠랴, 그 밖에 잘하는 것도 많은데. 퇴근 후 오랜 시간 요리한 것처럼 뚝딱 저녁 짓는 것도 잘하고 또 치우는 건 어떤가? 10분만에 뚝딱 치우는 것도 잘한다. 피곤에 절어 퇴근한 날도 편한 복장으로 10분만 누워 쉬면 낮의 스트레스를 싹 잊는 것도 잘하는 것이다. 아이의 영어책을 온몸으로 연기하면서 읽어주는 것도 잘하고 아이 간지럼 태워서 1초 만에 웃기는 것도 잘한다. 새벽부터 출근했다 퇴근한 남편이, 일할때는 세상 믿음직한 남편이 집에만 오면 어린애처럼 투정 부리는 것도 나는 스트레스는 안 받으면서 받아주는 것도 잘한다. 그러니 너무 나를 닦달하지는 말자.


그래서 나는 앞으로 레몬을 절대 사지 않는 사람으로 남을까? 나는 앞으로도 마트에서 싱싱하고 저렴한 레몬이 보이면 또 살 것이다. 그러다 또 버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나는 겨우내 두고 먹어도 좋을 상큼한 레몬청을 담글 생각에 설레이는 마음까지는 버리지 않을 것이다. 레몬청은 솜씨 좋은 사람이 만들면 된다. 나는 내가 잘하는 것을 하면 된다. 그러고보니 솜씨 좋은 둘째 언니가 생각났다. 생각난 김에 언니에게 전화라도 해볼까. '언니, 싱싱한 레몬 필요하지 않아? 언니 언제 올 거야 우리 집에? 레몬이 아주 좋단 말이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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