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알던 속옷 가게 직원은 누구였을까
인터넷 쇼핑몰의 도매 거래처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낮에도 영업을 하는 곳과 자정 무렵 오픈하는 밤 시장이 주력인 곳이다. 낮에도 영업하는 곳은 소매 손님도 받는 곳이 많았으며 가격대가 낮은 편은 아니었다. 대신 나같은 소매업체가 주문하기도 픽업하기도 편리한 장점이 있었다. 반면 자정 무렵 오픈하는 밤시장 거래처의 상품은 가격대가 좋고 묶음 단위가 큰 것들이 많았다.
자정 무렵에 오픈하는 거래처와 일을 하려면 초저녁에 한숨 자두는 것도 좋다. 보통 물건을 발주할 때 수량이 중요한데, 지쳤거나 졸린 상태로 주문하면 나중에 엉뚱한 걸 많이 받고 필요한 걸 부족하게 받는 불상사가 생기기도 한다. (의외로 많다)
2019년 봄이었다. 낮에 거래처를 투어하고 있었는데 나는 '속옷'이라는 목적성이 있었다. 여름 더위를 많이 타서 정말 시원한 속옷이 필요했는데, 나부터도 꼭 필요해서 구입한 속옷이 두고두고 손이 자주 가고 잘 입게 되었던 것이다. 보통 이런 경우면 고객들도 좋아한다.
이전에는 잠옷을 대량으로 잘 팔았던 적은 있었지만 속옷을 판매했던 적은 없었는데, 이상하게 속옷을 취급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해 여름도 참 더울 것이라는 예보를 들어서였을까?
속옷 사입을 해보니 속옷 전문 쇼핑몰이 있는 이유가 있었다. 또 구매자 입장에서는 자주 구매하는 브랜드, 쇼핑몰 있는 이유도 있었다. '사이즈'가 문제였다. 참 이 사이즈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성의 없이 센티미터만 올려놓기는 싫었다. 그런 이유로 반품이 쏟아지는 것은 더욱 생각하기 싫었다. (남이 피팅해본 속옷이라니...!)
그래서 내가 고안해 낸 방법은, 우선 안전지대를 활용하는 것. 블로그 이웃을 대상으로 판매해보고, 사이즈 조언을 구한 뒤 본격적으로 익명의 고객에게도 판매를 시작 하자는 나름의 판매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블로그에 상세 내용을 올리고 결제창만 온라인 쇼핑몰을 활용하게끔 프로세스를 만들었다. 구매 후 사이즈 조언, 후기를 남겨주신 분께는 작은 선물을 드리는 이벤트도 기획했다.
엘슈가 언더웨어 런칭 판매 포스팅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정말 두고두고 잘 사용하는 것만을 판매하자는 모토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엘슈가 언더웨어도 그중 하나였는데, '사이즈'라는 난관을 맞닥뜨리기도 했지만, 결과는 의외였다.
대박이 난 것이다.
상품을 알아보는 안목, 특유의 꼼꼼함, 끝까지 해내는 집요함을 알아채는 고객과 더운 여름이라는 시기성이 맞물려 그해 인견 언더웨어의 주문량은 엄청났다. 구체적인 사이즈 상담은 블로그 댓글로 받고, 사이즈 결정을 한 고객은 그제서애 쇼핑몰 결제를 가능하게 했던 터라, 보통의 업무보다 2~3배 늘어난 업무량이었지만 내심 기분이 좋았다. 내가 의도한 대로 따라오는 고객들이 신기하면서도 한편 고마웠다...
인견이라는 천연섬유 유래 소재로 국내 공장에서 만드는 그 속옷의 도매 거래처는 자정이 넘어 문을 여는 곳이었다. 보통 자정에서 새벽 한 시 사이에 주문을 넣곤 했는데 식구들이 곤히 자고 있을 시간이므로 카카오톡을 활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렇게 톡으로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양쪽 모두에게 여러모로 편하기도 했다. 수량을 잘못 넘긴 것이 나인지 거래처가 잘못 들은 것인지 파악하는 것은 통화로 했다면 파악하기 어려운 일일 테니까.
일은 2~3배 늘어났어도, 내 고객들도 나와 같이 편하고 통풍이 잘되는, 심미안마저 갖춘 스킨 (또는 블랙) 톤의 심플한 속옷을 함께 한다고 생각하니 신이 났었다. 또 자정 넘어 나는 약간 비몽사몽 간에 주문을 넣어 횡설수설을 할 때가 있어도 어째 그 속옷 매장 직원은 실수 한 번을 한 적이 없는 것이다!
특히 팬티의 경우 공장에서 찍혀 나오는 사이즈와 실제 고객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사이즈 표가 약간 달라서 내가 중간에 변환(?)을 해서 전달해야 했는데 직원분이 그걸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는 것 아닌가? 한마디로 내가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었던 것이다. 매번. 게다가 적절 한때 ‘알겠어요!’ 또는 ‘주문량 최고’’라은 의미의 귀여운 이모티콘을 날리는 것은 어떻고.
이런 거래처 직원을 만나면 커피라도 사주고 싶을 만큼 고맙다. 내 일을 덜어주고 주문 실수로 떠안아야 하는 재고량을 줄여주니 돈도 벌어주는 것 같다. 또 케미도 통해서 상호 사기진작에도 도움이 되니까?
해당 거래처에 주문을 넣은 지 2주가 되었을까? 직접 통화할 일이 생겼다. 사고가 생겨서는 아니고, 상품이 한창 잘 나가는 때에 브래지어 물량이 끝났다는 통보를 받아서이다. 이 브라팬티 세트의 핵심은 통풍이 잘되는 브래지어인데, 메인 상품이 품절되었다니 너무 아쉬웠다. 그래서 자정이 넘은 시간이어도 남은 물량이 있냐고, 다 넘겨달라고 사정(?)을 하려고 전화를 했는데...
"안녕하세요, 엘슈가샵이에요~ 저 많이 했던 인견 세트요, 정말 끝났나요? 남아있는 것 모두 저희에게 넘겨달라고 말씀드리려고요"
"네, 끝났어요~ 한 장도 없습니다"
"...?"
놀랐다. 그런데 내가 놀란 포인트는 한 장도 없다는 말을 들어서가 아니었다. 직원분 목소리에서였다. 센스 있는 여성분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직원분이 남성분이었던 것. 아니 그러고 보면 속옷가게 직원이라고 다 여성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가만있어 보자. 난 그동안 그에게 얼마나 많은 tmi를 해왔던 것이냐...'브래지어는 편해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 이 브라는 정말 착용하고 자도 모를 만큼 편하다!'라든지 '패드가 두꺼운 브래지어는 여름에 땀이 찰 때가 있는데, 이 브라는 그런 면에서 통풍 최고!'라든지...'팬티는 어떻고요! 어쩔 땐 안 입은 것 같다니까요'라든지 그렇게 오지랖을 떨었던 것이다!
이 직원분은 어째서 또 그렇게 카톡상 상냥하고 일을 잘해서, 나를 헷갈리게 만들었나...? 하악 우리가 인생에서 철썩 같이 믿고 있는 것들은 얼마나 진실이더냐~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을 때엔 멘붕에 빠졌다고 할까.
그렇게 인기가 많고 나에게도 큰 수익을 가져다주었던 엘슈가 인견 언더웨어 상하의 세트는 올해는 진행을 하지 않았다. 일이 2~3배가 많아서 그랬느냐고? 아니다. 속옷가게 직원이 남성인걸 알고 쑥스러워서 그랬느냐고? 그것도 아니었다. 뚝심을 가지고 10여 년 이상 속옷만 제조해온 공장이 올해 4월경 더 이상 물건을 생산하지 않는다고 했다.
물건을 고를 때만큼은 꼼꼼하고 까다로운 매의 눈을 가진 내 마음에 쏙 들었던, 실용적이고 심플한 속옷 만을 만들어내던, 다소 연로한 사장님이 운영하던 남양주 소재의 공장도 코로나의 여파는 피해 갈 수 없었는지 제작을 중단하고 쉬어가기로 했단다. 아예 공장을 닫은 건 아니라는 말과 함께.
고객에게 내가 좋아하는, 그래서 사이즈 선택 팁을 드릴 수 있게 된, 메이드 인 코리아 속옷을 더는 판매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서운했다. 서운함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음에 쏙 드는 편안한 속옷을 더는 나도 살 수 없다는 소식이 나를 서운케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나에겐 새것 같은 속옷 세트가 3세트나 있다는 것이었다. 얼마나 다행이란 말인가!
온라인 상점을 운영하면서 마음에 드는 좋은 제품들을 마음껏 고를 수 있는 기회가 있고, 그것들과 함께 일상을 엮어간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팍팍한 쇼핑몰 업무에 빼놓을 수 없는 작아도 확실한 행복이랄까. 이 속옷을 입다 보면 잠시 쉰다는 그 공장도 어느 날인가 생산을 재개하지 않을런지. 나는 또 그러면 시장을 돌다가 그 물건을 발견하게 되지는 않을런지. 유난히 덥웠던 그해 여름처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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