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는 괜찮겠냐만은
언제 그랬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어차피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수용하는 편인데 '미리 조심했으면 안 일어났을 일'에 대해서는 자책을 하는 편이다. 조금 있으면 저녁을 준비할 시간이라 더욱 신경이 쓰인다. 다치지 않았다면 휘뚜루마뚜루 휘리릭 처리했을 일을 조심스럽게 시간도 최소 1.5배 더 걸릴 생각을 하니 더욱더. 그러나 누구를 탓하랴, 내 실수인 것을.
손가락을 베었다. 정확히는 오른쪽 검지 손가락 지문 있는 부위를. 살짝 스치기만 한 정도면 바로 밴드를 붙여놓으면 금세 베인 곳끼리 붙어서 아무렇지도 않게 되는데 이번엔 어쩐 일인지 안쪽까지 깊숙이 베었다. 아마 쇼핑 몰 일을 하다가 날카로운 무언가를 잡아끌다가 그랬던 것 같다. 바로 밴드를 꼭 붙여놨지만 얇은 밴드 사이로 자꾸만 피가 묻어났다.
베이고 난 다음 맨 처음 타격을 입은 일은 집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었다. 주부이다보니 기본적으로 매일의 요리와 설거지가 있는데 고무장갑을 끼더라도 주방 일을 할 때마다 쓰라리고 아팠다. 그다음은 쇼핑몰 업무다. 엘슈가 샵은 제품 중 ‘엘라스틱 헤어타이(elastic hairtie)'라고 해서 손으로 직접 만든 핸드메이드 액세서리가 있는데 그 작업은 물론이고, 택배를 포장할 때마다 상처가 난 부위가 따끔따끔했다. 안 베었으면 느끼지 못했을 통증인데 베이 고나니 선명하게 느껴지는 통증이라 더 자책감이 들었다.
베인 지 2~3일이 지났을까? 이번엔 깊이 베어서인지 쉬이 낫질 않는다. 그래서 생활의 지혜 이런 쪽으로 정통한친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참다 참다가...
"언니, 잘 지내지? 형부도 잘 지내시고? 언니 일은? 요즘 바쁘진 않고? 언니 그래도 늘 조심해서 다녀"
"응 막내야 어쩐 일이야 낮에? 무슨 일 있어? 목소리가 안 좋아 뵌다?"
"언니, 나 있잖아 사실은 손이 깊게 베었어. 그냥 베인 게 아니라 깊숙이 베어서 물 닿을 때마다 너무 아파 언니. 내 가 하는 일 알지? 쇼핑몰 배송일 말이야. 일할 때 손을 많이 쓰는데 너무 아파. 참 말하고 나니 소소하다. 그런데 언니 나 정말 너무 신경이 쓰여. 밴드도 물 닿으면 금세 젖어버리고, 젖으면 더 쓰라리고 바로 갈아줘야 하고 언니, 뭐 방법이 없을까?"
"막내야, 방수 밴드 있어. 내가 찾아서 사진 보내줄게. 그거 붙이면 하루는 끄떡없어. 에고 손 많이 쓰는데 얼른 나아야지 어쩌냐?"
"아 그래 언니? 나 잊고 있었던 것 같아. 역시 울언니 답네. 고마워 언니, 그럼 사진 좀 부탁해!"
친절하게 조언 해주었지만 언니의 목소리에서는 '귀엽다 귀여워. 그깟 손 다친 걸 가지고 세상 힘들어하는 동생이라니.. 후훗'이라는 뉘앙스가 느껴졌다. 그렇다! 나는 지금 '그깟 손가락 하나' 베어놓고는 세상 힘듦을 다 이고 지고 사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그렇게 느끼는 언니가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안 아프진 않았지만 어쩌면 제 몫의 아픔들을 하나씩 이고 살아가는 각각의 아픔들에 비하면 '손가락 하나'베인 것은 애교스러운 아픔일까?
하지만, 베인 사람이 쇼핑몰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문제는 조금 달라진다. 상품을 하나하나 검수하고 우리 상점만의 포장지로 정성스럽게 다시 포장을 하고, 제품에 어울릴 마스킹 테이프를 골라 붙이고, 택배박스를 접어서 꼼꼼이 테이프를 붙이고 검수한 제품을 박스에 넣는 일. 이 과정에서 손이 쓰이지 않은 과정은 단 하나도 없다. 손을 베이고 나면 알게 된다. 온라인 상점을 운영하는데 얼마나 품이 많이 가는지를.
어쩌면 나는 '베인 손가락'도 손가락이지만 언니에게 오랫만에 전화해 응석을 부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자매라고 해도 서로 바쁘다보면 이런 일 아니고 통화할 일이 있나 싶다. 언니의 삶도 미루어 짐작컨데 결코 호락호락한 삶은 아닌듯 하다. 하지만 언니는 내가 전화 할때마다 편안하게 부드럽게 받아주곤 했다. 그것이 어떤 일이든 간에.
일주일 정도가 지나자 깊게 베인 상처가 아물었고 물이 닿아도 더 이상 따끔거리지 않게 되었다. 당연히 더는 밴드를 붙이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사람의 기억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강한 듯 하다. 한참 후까지도 오른쪽 검지 손가락을 물에 닿지 않게, 구부리는 나를 발견하곤 하니까
손을 다쳐도 이런데, 다친 마음은 더 그렇지 않을까? 생각을 해본다. 상처를 주고 사과를 하고 용서를 하고 잘 지내기도 한다. 분명히 나아졌다고, 아물었다고 생각하는데 어떤 면에서는 여전히 힘든 그런 관계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또한 어떠하랴. 혼자 해결이 안 되면 내가 언니에게 전화해서 세상 진지하게 물었던 것처럼 주위 사람에게 털어 놓기도 해야지. 일반 밴드로 안되면 그땐 더 센 방수밴드를 붙여야지. 그렇게 치료해 나가는 수밖에 달리 나은 방법이 있을까.
짐작하셨겠지만 쇼핑몰 일을 할 때 다쳐서는 안 되는 부위는 ‘손'이다. 어떤 일을 하건 다쳐서야 되는 부위가 있겠냐만은, 쇼핑몰을 하지 않더라도 손은 다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건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특히 나와 같이 손을 많이 쓰는 일을 하는 분들은 꼭 기억해주시면 좋겠다. 손을 베인다는 것. 간단해 보이지만 결코 간단하지 만은 않은 문제라는 것을. 손을 주로 쓰는 온라인 작은 상점을 8~9년 운영해오면서 몸으로 배운(?) 꿀팁이랄까. 하지만 베인다 손 치더라도 너무 절망은 마시길. 상처난 손은 결국은 아문다. 다만 시간이 좀 필요할 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