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파를 정리해 냉장고에 넣지 않는 이유

by 엘슈가

"먼저 달군 기름에 파를 넣고 파 기름을 내유. 그럼 늘 먹던 그 맛이 아녜유. 맛이 천차만별이에유"


아... 파가 저기에도 들어가는구나. 그러고 보니 파가 똑 떨어졌다. 이따 볼일을 보고 돌아오는 길 마트 장보기 목록에 파를 꼭 넣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두 식구가 출근한 아침 거실. 잠깐만 앉아있으려고 했는데 시간이 꽤 흘러가고 있었다. 식탁에 놓인 밥그릇과 방금 마신 커피잔을 싱크대에 대강 넣고 나는 집을 나섰다.


점심식사와 커피까지 마시는 미팅 하나. 그 지역에 간 김에 들릴 상점 한 두 군데. 그리고 우리 단지 앞의 세탁소에서 맡긴 옷을 찾고 그 바로 앞 마트에서 저녁 찬거리 장을 간단히 본 뒤에 컴백하기. 이것이 나의 계획이었다. 세탁소나 마트 하나쯤 빼놓는다고 하루가 크게 잘못되지는 않지만, 저녁을 짓다가 뭐하나 재료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든지, 예를 들어 나는 평소에 감자를 잘 먹지 않지만 닭볶음탕에는 꼭 감자를 넣는데 마침 감자가 없다든지, 하면 다시 마트에 가야 하니 번거로움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메모는 해두는 편이 좋았다.


미팅은 점심식사에 이은 커피타임도 좋았다. 사람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내가 그 시점에서 왜 그런 이야기를 늘어놨지? 생각하는 모임이 있다. 40대를 맞이하고는 그런 모임에는 잘 가지 않겠노라 생각했다. '나 실은 지금 이런 일을 계획하고 있어, 잘 될까? 잘 안되더라도 배우는 게 있겠지?'조심스럽게 생각해둔 이야기를 꺼냈을 때, '숙아, 해봐! 너에게 딱 어울리는 일인걸!' '언니, 뭘 망설여~ 지금 계획 다 있고만' 조금은 세상에 주눅 든 나를 대신해 호들갑 떨어주는 친구들이 좋다. 친구들의 반응에 나는 '그..그럴까? 그래 일단 해보는 거지 뭐!'한다. 그런 모임에 다녀오면 하루나 이틀 정도는 가슴에 가볍고 포근한 구름을 품은 것만 같았다.


계획대로 마트에서 대파를 샀다. 미리 챙겨간 장바구니에 들어가지 않아 안고 오게 되는 대파. 뭔가 소중한 것을 안고 오는 듯하다. 오늘 저녁은 계란볶음밥을 할 예정이다. 며칠 전 TV를 보는데 계란볶음밥이 나왔다. 기름에 대파를 볶아서 파 기름을 내고 거기에 계란을 풀어 휘휘 저어 익힌 뒤 미리 꺼내 식혀놓은 밥을 넣고 간장과 참기름 참깨로 마무리하는 클래식한 계란볶음밥. 함께 방송을 보던 남편이 '어릴 때 먹었던 맛이 생각나네 맛있겠다'라고 했다. 오늘은 내가 해주고 다음번엔 '자기가 어릴 때 먹었던 것처럼 해봐!라고 기회(?)를 주어야지.


사온 대파는 주방 옆으로 난 다용도실 한쪽에 둔다. 집 공간 중에서 가장 선선한 곳이 다용도실이다. 대파를 둘 때도 규칙이 있다. 구멍이 송송 난 비닐에 쌓여 있는 대파를 한쪽에 세워서 둔다. 어디에서인가 보았는데 식물은 자기가 자라던 형태로 놓일 때 가장 오래 유지가 된다는 말을 들었다.


들고나갔던 가방을 대강 정리해두고 손도 깨끗이 씻는다. 힐끔 시계를 보니 5시. 아이는 학원에 있을 시간이고 남편은 슬슬 남은 일을 정리할 시간일 것이다. 여기서 10~20분만 늦게 돌아오면 그렇게 저녁 시간이 분주할 수가 없는데 5시면 차분하고 느긋하게 저녁을 준비해도 되는 시간이다.


그런데도 나는 대파를 정리해서 냉장고에 넣을 생각이 없다. 살림을 잘하는 여자들은 대파를 사면 씻어 뿌리를 자른 뒤 총총총 자르거나 손가락 길이만큼 잘라서 밀폐용기에 넣어 반은 바로 먹기 위해 냉장실에 반은 오래 두고 먹기 위해 냉동실에 보관한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한 베테랑 살림 블로거의 대파 정리 포스팅에서 본 대파의 하얀 머리 부분은 어쩜 그렇게 윤기가 나는지, 한눈에 봐도 뽀득뽀득하게 잘 씻어졌음이 느껴졌다. 나는 다용도실 한쪽에 세워둔 대파가 오래 가기만을 바랄 뿐(가끔 손가락으로 물을 튕겨 싱싱해지길 바라는 마음을 실천에 옮긴 적도 있다) 대파가 가장 맛있을 때를 싱싱하게 좀더 오래 보관하기 위한 노력까지는 하지 않는 것이다.


나도 가끔 대파를 잘 정리해서 냉장실, 냉동실에 각각 넣을 때가 있다. 그때는 바로 '내가 하고 싶을 때'이다. 설렁설렁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돌이켜보면 순간순간 나를 갈아 넣으며 살고 있다고 느껴질 때가 많았다. 하루하루 에너지가 비축량보다 소모량이 더 큰 느낌이 들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정말 중요한 일 아니면 섬세 스위치를 좀 내리자'생각했더니 삶에 평온이 찾아왔다. 누군가에게 '엘슈가님은 참 설렁설렁이신 것 같아요'라는 말을 들었을때 잘 살고 있구나 생각도 들었다.


대파, 잘라서 넣을 수 있지만 대파를 정리해 냉장고에 넣다 보면 저녁 지을 시간은 부족할 것이다. 배고픔 최고조에 이른 채로 집으로 뛰어 들어오는(?) 가족들은 일정 시간 식탁에 앉아 기다리는 시간을 보낼 것이다. 나는 기껏 준비하고도 '저녁 따뜻한 밥한끼 먹느라고 이 고생들인데 좀더 일찍 차려 줄걸'후회 아닌 후회를 했을 것이다. 그러니 오늘은 대파를 정리하기 좋은 날이 아닌 것이다!


다용도실에 둔 대파는 10개 중 마지막 1개가 남았을 때는 말라버려서 먹지 못하게 되 버린다. 그 사실도 알고 있지만 나는 대파를 정리하고 싶을 때 정리하고 그렇지 않을 때는 다용도실에 세워두는 지금의 내 사이클이 좋다.


아등바등 노력하다가 현관에 다와서 계란 한 판이 깨졌던 날이 있었다. 그때의 나도, 그 일상도 소중하지만 이렇게 힘 빼고 자연스럽게, 어떤 면은 설렁설렁 보내는 지금 일상도 소중하다. 다시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대파를 쫑쫑쫑 야무지게 썰어 크기가 딱 들어맞는 밀폐용기에 담아 냉동실 한통, 냉장실 한통 넣어두는 것이 어색하지 않게 그 감각도 유지하면서 내 일상을 보내고 싶다.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면서. 마냥 갈아넣지 않으면서. 김수현 작가의 에세이'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나 '애쓰지 않고 편안하게' 제목처럼. -끝-


* 브런치에 연재하는 모든 콘텐츠(글, 사진 포함)의 저작권은 생산자(원작자)인 엘작가에게 있으며 무단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이를 어길 시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음을 고지합니다. 저마다의 소중한 저작권 보호에 동참해주세요! Copyright2020.엘슈가.All rights reserved.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우리 집엔 반투명 휴지통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