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일인지 흥이 나질 않았어
나는 유난히 메모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생각이 엉뚱하기도 하고 그런 생각이 넘쳐났던 아이. 그래서 반 아이들의 '쟤 좀 이상한것 같아...'라는 말을 듣기도 했던 아이. 남을 웃겨주는 것이 좋았고 함께 웃으면서 슬픈 일 따위는 잊고 싶었던 아이. 집에 혼자 있을 때면 공책 한구석에 재미난 이야기를 메모했다가 다음날 아이들에게 말해주는 것이 낙이었던 아이.
원리를 이해하는 과목들은 잘하는 편이었지만 암기를 해야 하는 과목은 잘하지 못해서 적기 시작했다. 적고 또 적다 보면 어느새 공책 한 페이지가 선명한 사진처럼 머릿속에 통째로 기억되는 기적을 그때부터 알아버렸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이동하는 시간이 많았다. 과외를 하러 가는 광역버스 안에서도 전공과목 공부는 해야 했다. 그래서 메모하기 시작했다. 가벼운 스프링노트에 핵심만 적었다. 버스 안에서 보면 머리 아프지 않을 정도의 크기로 적었다. 나중엔 너무 잘 적어서 그 메모를 친구들이 복사해가기도 했다.
이십 대 후반 직장을 다닐 때는 상사의 지시를 잊지 않기 위해 적었다. "엘대리, 내가 얘기한 거 그거 내일까지 되지? 보고서랑 콘티랑 꼭 좀 준비해놓으라고" 어떤 날은 다음날 발표할 내용이 머릿속에서 밤새 날아갈까 봐 메모해둔 걸 머리맡에 두고 자기도 했다. 그러다 그것은 습관이 되었다.
삼십 대... 아이 엄마가 되고 메모의 덕을 봤던 건 며칠에 한 번씩 대형마트를 갈 때였다. 한 번씩 가서 필요한 것들을 모두 사 오는것 같은데도 며칠이 지나면 다시 가야 할 일이 생겼다. 아이 키우는 집 일상이란 그런 것이었다. 루틴이 되어 익숙해질 법한데도 마트만 가면 당장 필요해서 사야 할 것과 천천히 사도 될 것들이 엉켜버리는 경험을 종종 하게 된다. 그렇게 사 온 물건들은 이가 하나씩 빠진 물건처럼 양념 하나가 부족해서 요리를 못한다거나 배터리가 없어서 사온 장난감 작동을 못하곤 했다.
그래서 대형마트에 가기 전엔 꼭 적었다. 한 번에 생각이 안 나니 밥을 지을 때 한 개, 주방을 정리할 때 또 한 개, 스웨터를 입다 말고 한 개. 이렇게 꾹꾹 눌러쓴 메모는 마트에서 머릿속이 하얘지지 않게 도와주는 무기가 되주었다.
그리고 그 메모는 어떻게 하냐고요? 달아나지 않게 핸드폰 화면에 붙여두거나 지갑은 꼭 들고 가니까 지갑에 찰싹 붙여둔다. 자 그러면 마트 갈 준비 완료!
그런데...
정작 마트에 도착했더니 나의 포스트잇 메모가 없다. 어디로 간 걸까. 오늘은 주말 캠핑을 가기 전에 온 것이라 살 것도 많은데. 그 어느 날 보다 하얘지는 머릿속. 당장 차에서 내려 100원짜리 동전을 넣고 카트를 빼내 신나게 장보기를 시작해야 하는데 나는 쉽사리 차에서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뭐부터 사야 하지? 오늘 나 뭐하러 왔지?' 아이가 옆에서 "엄마 뭐해? 안 내려요?" 말을 할 때까지.
그리고 그날 마트에서 무엇을 사 왔는지도 모르게 머릿속은 온통 꾹꾹 눌러쓴 분홍색 포스트잇 생각뿐이었다. '내 메모가 어디에 떨어진 걸까? 집에 있을까? 아일랜드 식탁에? 거실 바닥에? 옷 입다가 스르르? 아니 발이 달린 것도 아닌데 참’
난 왜 더 꼼꼼하게 챙기질 못했을까? 캠핑 가서 필요한 것들을 오늘 난 잘 산 것일까? 빠뜨린 게 있으면 남편의 퇴근길에 부탁할까? 낮에 마트 간다더니 안 가고 뭐했어?라고 하면 뭐라고 답할까?'
처음에는 기껏 적은 메모를 써먹지(?) 못한 채 잃어버렸다는 생각에 실소가 나왔다. 시간이 갈수록 실소는 자책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 메모가 있었더라면 오늘 얼마나 신나게 장을 봤을까? 어렵사리 적어놓고선 잃어버리는 건 뭐람? 이럴 거면 애초에 메모를 하지 말던지...'
그러다가 나는 내가 적은 메모가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오늘 장만 보러 가려는 것이 아니었다! 간 김에 새로 생겼다는 플랜트 카페에 가서 식물들도 구경하고 아이는 코코아를 시켜주고 나는 거기만 판다는 커피 한잔을 마실 참이었다. 어떤 메뉴를 주문하면 좋을지도 내 메모에는 적혀있었다.
또 지난번에 사용하지 못한 인테리어 소품 할인 쿠폰도 쓸 참이었다. 그때는 당장 필요한 게 아니라서 사지 않았지만지금은 똑 떨어지기도 했거니와 쿠폰 사용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아서 이번에 쓴다면 참말로 나이스 타이밍이었다. 그 쿠폰도 포스트잇에 함께 붙여 두었던 것이다. 그런데 메모도 쿠폰도 없으니 할인이 다 무슨 소용이냔 말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의 메모에는 단지 사야 할 것들만 나열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시간 순 동선 순으로. 내가 가장 연상하기 좋은 방식으로 적혀있었다. 그래서 그 메모가 있으면 장을 보기가 훨씬 수월했다. 메모에 의지해서 이동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그 시간에 난 또 엉뚱하고 기발한 생각들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메모가 사라졌다. 밝은 대낮이 갑자기 캄캄하게 느껴졌던 건 기분 탓일까.
또 메모를 어딘가에 흘려서 누군가가 주웠을 때,
"어머, 이건 정말 고급 정보야 ! 꼭 기억해야 돼!"라는 반응보다는
"어머, 이 사람은 뭔데 이걸 이렇게 시시콜콜 적어놨대? 이 동그라미는 또 뭐고?" 하는 반응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마저 들었다. 억울했다... 나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그 메모에 그렇게 반응하지는 않을 텐데! 알 수 없는 누군가를 붙잡고 설명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이제와 다 무슨 소용이랴. 나에겐 지금 메모가 없다. 두 손 무겁게 사 온 물건들이 이날 따라 풀 죽어 보였다. 색마저 바래 보였다면 그 또한 기분 탓일까.
"엄마 나는 뭘 들어줄까요?"
집에 도착했다. 아파트 주차장이다. 내려서 사 온 물건들을 정리해야 할 시간이었다.
"응 가벼운 것. 바닷가에서 신을 운동화만 가지고 내리면 될 것 같아, 고마워”
여느 날과 다르게 내 목소리에 힘이 없는 것을 알아차렸을까? 아이는 졸리고 배고파서 짜증이 날 시간인데도 보채지 않고 순순히 차에서 내렸다.
"엄마, 근데 이거 엄마꺼 아니에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10층 버튼을 막 눌렀을 때였다. 아이가 엘리베이터 안 거울에서 뭔가를 떼서 건네며 말했다. 아이의 고사리 같은 통통한 손에 들려있는 것은 번호까지 매기고 다른 색깔로 동그라미까지 친, 내 메모였다!
나는 반가움에 눈물이라도 나올 것만 같았다. 눈물 대신 웃음이 튀어나왔다. 미주알고주알 잘도 적어놓고선 이걸 엘리베이터에 떨어뜨리고 출발했다니... 그리고 이웃 누군가가 그걸 주워서 엘리베이터 거울 잘 보이는 곳에 붙여두었던 것이다.
다행이다. 내 메모가 불필요하게는 보이지 않았구나. 누군가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처럼 보였기에 붙여놓은 거 아닐까? 구겨져서 쓰레기통에 버려지지 않았구나. 우리가 영영 못 만날 신세는 아니었구나.
다시 나에게 돌아온 메모야 반갑다. 네가 없어서 난 몇 가지 중요한 걸 빠뜨렸지 뭐야. 또 새로 생긴 카페에 오늘은 가지 않았어. 웬일인지 흥이 나지 않더라고.
나에게 메모는 무언가를 시작할 때 항상 옆에서 응원해준 선배였고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할 때 조차도 웃으며 함께해준 코치였고 엄마가 되어서 장을 보러 갈 때면 늘 함께한 수다스럽고 쿵작이 잘 맞는 친구였다.
머릿속에 엉뚱한 아이디어가 많아서 되레 루틴 한 일들이나 잊으면 안 되는 중요한 일들은 놓치기 일쑤였던, 좀 특이한 어린 아이가 영영 길을 잃지 않도록 도와준 곰살맞은 언니 같고 푸근한 엄마 같은 존재였다.
메모는 사십여 년 동안 나를 가장 나답게 해주는 동반자였다. 평생 함께하고 싶은 무던하고 든든한 친구다. 토라지거나 삐지지 않는 나의 친구다. 네, 저는 메모 덕후입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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