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닉스'만' 하면 안되는 이유
소리와 글자의 관계를 가르치는 파닉스.
각각의 소리 조각(음소)이 어떤 부호(철자)와 연결되는지, 약속처럼 정해져 있는 규칙만 알게 된다면 처음 보는 단어도 발음할 수 있고, 처음 듣는 단어도 쓸 수 있습니다. 파닉스가 제대로 이뤄졌다면, 아주 어린 친구들도 incomprehensible이란 단어를보고 알맞게 발음할 수 있고, incomprehensible이란 단어를 듣고 알맞게 쓸 수 있습니다.
해외여행 중 아래 사진의 글자를 유창한 발음으로 읽고 의기양양했던 제 모습이 기억 나는군요.
하지만 제 기세는 친구의 다음 질문에 무너집니다.
“우와~! 근데 ‘카이로프랙틱’이 무슨 뜻이야?”
“글쎄, 무슨 쇼핑몰 이름인가?” (아니요. Chiropractic은 신경과 근육, 골격을 다루는 수기치료법입니다. 도수치료와 비슷한 개념이예요.)
무시무시한 철자와 길이의 단어를 유창한 발음으로 읽을 수는 있어도, 무슨 뜻인지는 모르는 상황. 제가 이 단어를 ‘안다’고 말 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Phonics, 즉 음성학적인 지식은 허울 뿐인 능력이 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저 단어의 의미를 알고, 저 장소의 정체를 아는 것이니까요.
이와 같이 언어 학습의 핵심은 ‘의미’이고, 철자를 결정하는 데 소리보다는 의미가 더 큰 기여를 하기 때문에 ‘의미‘를 다루지 않는 파닉스는 완벽하지 못한 지도법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사실 저희 세대는 제대로 된 파닉스 없이 영어 잘만 배웠어요. 중고등학교 6년간(저는 초등학교 때 영어 교과 수업이 없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배운 영어로 지문 해석 잘 하고 문제 잘 풀어서 수능 치뤘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스피킹은 평가에 포함되지 않았고, 리스닝과 라이팅 비중도 그다지 크지 않았으니 소리와 철자의 관계를 다루는 파닉스의 필요성은 그다지 공감되지 않았구요.
다만, 매우 비효율적으로 (무식하게) 공부한 점은 인정합니다. 영단어의 한글 뜻을 눈과 손으로만 기계적으로 외웠습니다. 가끔 영단어 시험을 오디오로 내시는 고약한 분이 계시면, 단어 옆에 조그맣게 적힌 발음기호 [ ɪn|kɑːmprɪ|hensəbl ]를 어찌 저찌 한글화 (‘인캄프리헨서블’) 하여 기계적으로 외우긴 했지만요. 발음기호를 ‘분석’하지 않고, 철자만 읽고 발음할 수 있었다면 영어 학습이 얼마나 편해졌을까요?
분명 파닉스는 영어 학습 효율과 효과를 매우 높이는 교육인 점은 맞습니다. 저희 때야 시키면 시키는 대로 억지로 공부했지만, 요즘은 학습 동기부여와 만족도를 중시하는 시대입니다. 파닉스를 거치지 않고 비효율적으로 단어를 암기하는 수업, 특히 발음기호를 외우는 수업은 찾아보기 어렵죠. 물론 스피킹과 리스닝이 필요한 의사소통능력이 부상하게 된 점도 ‘소리’를 다루는 파닉스의 필요성을 인정하게 된 부분이고요.
다만, 파닉스 학습이 제대로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의미 학습이, 더 정확하게는 어휘 학습이 반드시 병행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단어는 ‘의미’를 다루는 최소 영역이거든요.
단어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당 단어가 주변에 어떤 단어들과 어울리는지, 어떤 패턴과 함께 어우러져 문장을 이루는지를 함께 보는 것이 권장되고요.
저희는 파닉스만 보고 있는데, 스케일이 굉장히 커지죠?
그래서 파닉스를 단어학습과 패키지로 ‘제대로’ 배우게 되면, 파닉스 시리즈 만으로 어휘-패턴-문장으로 자연스럽게 확장할 수 있어 문해력의 기초가 되는 리딩 스킬까지 얻어갈 수 있어요. 스피킹과 라이팅 스킬은 덤이고요. (아무래도 여전히 독해력이 우선순위의 상위를 차지하는 환경이다보니…)
그래서 저는 파닉스만 속성으로 완성하는 커리큘럼을 가급적 추천하지 않습니다. 특히 학습자가 영유아나 유초등이라면 ‘속성’이라는 개념은 좀 잔인하지 않나, 생각이 들어요. 차라리 영어 학습을 더 일찍 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충분한 시간을 갖고 파닉스와 함께 쓰기 활동과 어휘 학습을 자연스럽게 병행하는 것을 권장 드리고요.
파닉스는 미국에서조차 유치원부터 초등학교 2학년까지 3년에 걸쳐서 배웁니다. 그만큼 중요하고, 또 어렵다고 여기기 때문이예요. 사실 이렇게 배워도 청소년, 어른이 돼서도 단어를 잘 못 읽거나 철자를 틀려적는 원어민들이 많습니다. 물론 이는 영어와 한글의 특성이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요.
다음 포스트에서는 파닉스와 병행, 혹은 연결하기 좋은 어휘 학습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