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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땡관 Jul 11. 2020

#24

네 삶의 온도는 이보다 조금 더 따뜻했으면 좋겠다

 한 시간이 지나있었다. 여자친구가 빌려준 에코백을 열어본 뒤에야 내가 학교 올 때 종이 한 장 들고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에코백 안에는 영어회화 책 한 권과 5천원 주고 샀지만 벌써 3년째 잘 쓰고 있는 내 필통, 그리고 일교차에 대비해 챙겨온 그녀의 분홍색 가디건이 들어있었다.


 필통에는 ‘Slow and Steady’ 라는 문구가 작지 않은 크기로 적혀있었는데. 나는 매일 사용하던 필통에 그런 문구가, 아니. 영어가 적혀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고. 그 사실에 꽤나 큰 충격을 받았다. 분명 매일 쓰던 필통인데.


 “여태 그걸 몰랐다고?” 내 대답을 들은 여자친구는 못 믿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필통에 적힌 문구의 존재조차 몰랐던 내게, 좋아하는 말이라면서 ‘슬로우 앤 스테디’를 읽어준 것도 여자친구였다. “그녀는 무심한 건 알았는데 이건 좀 심했다.”라며. 진심으로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럼 난 다니엘 헤니랑 놀고 있을게.” 강의실로 그녀를 데려다준 뒤였다. 이렇게 말하고 도서관으로 향하는 길. 축제 기간이라 학교 구석구석 이벤트 부스가 빼곡했다. 도서관 입구 바로 옆 골목에서는, 학교 홍보대사 학생들이 주관하는 부스에 많은 학생들이 줄서있었는데. 볼링처럼 공을 굴려 페트병을 쓰러뜨리는 이벤트를 하는 것 같았다. 한 여학생이 공을 굴리자. 홍보대사 여학생이 공에 맞지 않아 쓰러지지 않은 페트병를 힘차게 발로 차서 쓰러뜨렸다. 분위기가 좋아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그럴 때마다 홍보대사 학생들은 구호를 외치며 흥을 띄웠다.


 웃고 있는 사람들을 지나 도서관으로 향하면서 예전에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글이 떠올랐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사람들의 행복한 웃음소리로 가득한 교실이 내게는 그저 하루 빨리 떠나고 싶은, 끔찍하고 괴로운 악몽이었다는.. 어느 이름 모를 대학생이 쓴 서글픈 글이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도서관에 도착했지만, 나는 표지에 다니엘 헤니가 그려진 영어회화 책을 책상에 꺼내놓았을 뿐. 한 번도 펼쳐보지 않고 있었다. 전날 오픽시험을 망치기도 했고, 무엇보다 이유 모를 고독함과 공허함에 가만히 앉아 생각없이 허공을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습관적으로 그랬던 것처럼 미정리서가로 향했다.


 언제부턴가 학교 도서관에 들릴 때마다, 최근 반납된 도서들로 채워진 미정리서가로 향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그곳에 어지러이 놓여있는 책들 사이를 느린 발걸음으로 둘러볼 때면. 청춘을 닮거나, 그러지 못한 어느 누군가의 일상이나 생각을 엿보는 듯한 기분이 들어 마음이 몽글몽글해지곤 했다. 하지만 생각과 현실의 거리는, 시집과 전기기사 전공서적 사이의 괴리감 만큼이나 멀었다. 미정리서가로 향할 때마다 보물찾기를 하던 어린 시절을 꿈꾸곤 했지만. 막상 가보면 기적의 자기소개서 작성법이라던지. 토익 기본서 혹은 수식이 가득한 전공서적들이 책꽂이 하나를 가득 채운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소설책 몇 권이 물러서지 않는다는 듯. 책꽂이의 일정부피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곳을 지나는 그 순간이, 내 발걸음이 가장 느려지거나 멈춰서는, 일종의 체크 포인트였다. 걸음이 멈추면 눈은 더 빠르게, 바쁘게 움직였다. 내가 감히 쓰지 못할 문장들로 가득한 책들이 빼곡했다.


 “글을 쓰고 싶었다. 공대생이지만 소설가를 꿈꾸고 있다. 그러나 글은 쓰지 못하고 있다.” 이것 봐라. 얼마나 모순되는 문장들의 나열인지. 작가를 꿈꾸는 내가, 취직준비를 시작한 뒤로 ‘효율’에 더 집착하게 되었고. 가성비를 따지기 시작한 내게 독서란, 참으로 비효율적이고 쓸모 없는 취미였다. 그럼에도 ‘글’에 중독된 사람 마냥 책에 손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내가 결국, 이런 주제조차 없는 글을 쓰게 된 것도.


 넋을 놓고 걷다보니 어느새 시집들로 가득 채워진 서재들 틈새를 걷고 있었다. 일반화하는 것 같긴 하지만, 국어국문학과 학생들조차 시집을 좋아하는 친구들은 드문 것 같았다. 미래에 대한 불안함과 막막함에 마음의 여유가 없는 친구들을 보면 종종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나는 또 한 번. 보물찾기하는 심정으로 책을 찾았다. 내가 찾는 책이 뭔지조차 몰랐지만. 손이 가는 책을 펼칠 때마다 그 책이 나의 현재 상황에 꼭 맞는 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그닥 신중하게 고르는 게 아님에도 그랬다. 때로는 독하고 모난 말도, 둥근 말도, 다양한 이야기를 건네는 문장들을 느리게 곱씹을 때면 마음이 고요해지는 것을 느꼈다.


 여자친구의 수업이 끝나기까지는 아직 한 시간 반 정도 남아있었다. 유명작가들의 단편소설집을 보이는 대로 집어들고 구석지고 사람이 적은 곳으로 자리를 옮긴 나는, 김애란 작가의 소설책과 황인찬 작가의 시집을 펼친지 몇 분 만에 ‘나도 이런 글 쓰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들고 말았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것은 분명 큰 행복이라던데. 나는 책을 읽을 때마다 하고 싶은 마음이 커져서 오히려 불행해졌다. 불행을 피하기 위해선 결국 더 큰 공포 속으로 뛰어드는 수 밖에 없었다. 내게는 ‘글을 쓰는 일’이 너무나 큰 두려움이었고. 내게 선택지는 2개 밖에 없었다. 글을 쓰지 못해 불행해하거나. 글을 쓰면서 내가 쓴 글을 두려워하거나. 읽을 만한 글이 아니라면 글 쓰기 만큼 비효율적이고 무가치한 행위가 또 있을까. 이런 생각이 여러 번, 펜을 움켜쥐려는 내 손을 붙잡았다. 글을 쓰려면 종이가 있어야 하고, 글 쓸 만한 소재도 필요했다. 아무지 좋은 재료가 있다한들, 내가 그 소재를 맛있게 써낼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없었다. 그 밖에 내가 글을 쓸 수 없는 까닭은 계속해서 지어낼 수 있었다. 『내가 글을 쓸 수 없는 101가지 이유』라는 제목의 책마저 쓸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문득. 얼마 전 다녀온 대림미술관 전시회에서 작가 인터뷰를 옮겨적은 것이 생각이 났다.


 “I think we're all a little bit like cooks at the end. We just use the ingredients and just create something quite special about it. Anything you look at can be the starting of an idea. We just need to look properly. Just going all around the world, always with my sketchbooks and trying to imagine how I would see the world. I've always had my little world, and I've always been drawing non-stop.”


 (나는 결국 우리 모두가 요리사와 같다고 생각해. 우리는 늘 주변에 있는 재료로 특별한 무언가를 만들어내잖아. 주변의 모든 것들이 아이디어의 시작점이 될 수 있어. 그저 제대로 관찰하면 되는 거지. 여러 나라를 여행할 때면 그곳이 어디든지 스케치북을 챙기고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지 상상하곤 해. 내게는 언제나 '작은 세상'이 있거든. 그리고 스케치북에 나만의 작은 세상을 끊임없이 그려내지.)


 나는 이 문장을 일주일 동안 하루 10번도 넘게 입으로 읊조리며 암기했지만, 결국 오픽시험에서는 써먹지 못했다. 문장들을 써먹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말이다. 아마 이번에도 IH는 받지 못하겠지. 그래서 더 영어회화 책을 펼칠 자신이 없었다. 무엇보다 불행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고 싶었고. 잠시나마 내가 작가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결국, 어떻게든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에 닿기까지 정확히 한 시간이 지나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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