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삶의 온도는 이보다 조금 더 따뜻했으면 좋겠다
: Happy Birthday To Me
새벽 6시쯤이었을 거야. 잠에서 깨어난 게. 덜 닫힌 창문 틈으로 샘물같이 스며드는 찬 공기가 내 침대에까지 번졌어. 빌라 0.5층 반지하는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릴 만큼 고요했는데. 문 흔들리는 소리에 잠에서 깬 내가 처음으로 떠올린 것은 빗소리를 곁들인 공기의 상쾌함이었어.
눈을 떴지만 앞이 보이지 않았어. 불안한 내 미래처럼. 전날 밤새 비가 온 탓인지 햇빛이 구름을 뚫지 못한 것도 있겠지만 반지하 방에 이사 오자마자 내가 암막 시트로 창문을 덮어서 그래. 가로 46cm, 세로 63.5cm. 크기를 재서 완벽하게 검은 시트지로 덮인 창문은 닫혀있을 때면 완벽에 가까운 암실을 연출하지. 창문을 완전히 닫아버리고 나면 내가 마치 커다란 관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어.
나는 그렇게 시원하면서도 포근한 침대 위에 일정하게 쏟아지는 중력을 만끽했어. 일어나고 싶지 않을 때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 하루가 누군가에게는 정말 특별한 선물이라는 사실을 늘 되새기곤 해. 게으름을 피우는데 결심이 필요한 사람들은 그만큼 책임져야할 삶과 일이 많다는 뜻이겠지? 내게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를 내버려두는 생활이 평범한 일상인데 말이야. 나도 언젠가 억지로 성실해야만 하는 하루를 살아가길 간절히 기도하곤 해. 전날 새벽 3시까지 회식자리에서 상사들 기분을 즐겁게 하면서도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을 해내는 일상. 점심시간에 먹고 싶은 음식을 혼자 먹고 잠시 낮잠을 자는 것조차 용기를 내야만 하는 삶 말이야. 일 년에 오천 만원을 벌 예정이면서 내게 늘 부럽다고 말하는 넌 아마 이해 못하겠지.
한 시간 넘게 꼼지락거리면서 버티다가 힘겹게 몸을 뒤집어 무릎을 꿇었어. 이것은 중력이 몇 배는 더 강하게 느껴지는 내 침대에서 벗어나기 위한 일종의 준비 자세야. 무릎 꿇은 상태에서 다리에 꾹 힘을 주고 상체를 들어올려야 가까스로 침대에서 벗어날 수 있어. 아직 이곳에 적응을 못했는지 여전히 난 벽을 한참 더듬은 뒤에야 스위치를 켜곤 해. 그러면 어둡던 방이 빛의 속도로 선명해지는데. 그때 세상이 회전하는 것만 같은 어지러움을 느끼며 눈을 반쯤 찡그리곤 해.
불을 켠 다음에는 창문부터 활짝 열었어. 전날 일기예보에서는 기온이 9도 정도 떨어질 거라고 했는데 내가 느끼기에는 시원하기만 해.
다이소에서 삼천 원 주고 산 양은냄비에 물을 끓이면서 나의 하루는 시작돼. ‘배가 고파야만 시작되는 하루를 그리워할 날이 빨리 와야 할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싼값에 산 커피포트를 작동시켰어. 커피포트가 보글거리며 따뜻한 김을 내뱉는 동안, 양은냄비에 라면스프를 털어넣고 네게 전화를 걸어. “후배님 저 일어났습니다.”라고 보고하는 상상을 해. 그러면 나는 네가 웃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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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작은 머그컵이 하나 있었지만 이사 온 뒤 단 한 번도 그 컵을 쓴 적이 없어. 일 년 전에 헤어진 여자친구 컵이거든. 아. 이제는 전 여자친구구나. 화내지는 말아줘. 물건이 무슨 죄야. 그리고 나는 설거지를 할 필요가 없는 종이컵이 훨씬 편하니까. 폴리에틸렌 재질의 봉지를 뜯고 커피가루가 종이컵 바닥에 쏟아질 때마다 특별하게 만들어야만 하는 하루가 또 시작됐다는 생각이 들어. 커피 한 잔이 내게는, 전쟁같을 하루를 잘 견뎌내기 위한 창과 방패처럼 느껴지거든.
나는 덜 녹은 밑바닥을 숟가락으로 휘. 휘. 휘저은 뒤 물이 끓는 냄비에 라면 건더기를 들이부었어. 집을 떠난 지 벌써 8년이 지났는데. 여전히 나는 목적없이 습관처럼 냉장고 문을 열고 닫아. 아나운서가 된 내 친구는 이게 가난한 사람들한테만 있는 습관이라더라. 먹을 게 없는 걸 알면서도 혹시나 있을까 싶어서 그러는 거라고.
계란이 3개 남은 포장지에는 ‘2020. 01. 17 까지’라고 적혀있었어. 바로 내일이더라. 내가 이사 온지 벌써 2주가 지난 거지.
“30개 한 달 안에 절대 못 먹어.” 이사 온 첫날, 근처 마트에서 30개 묶음과 10개 묶음 사이에서 고민하던 내게 동생이 해준 말이었어. 2주 동안 내가 먹은 계란은 고작 일곱 알이었지.
나는 남은 계란을 전부 냄비에 털어 넣으면서 처음으로, 동생이 시키는 대로 하길 잘 했다는 생각을 했어.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사실이 소름 돋더라.
라면이 익어가는 동안 나는 약을 삼키는 심정으로 진지하게 커피 한 잔을 입 안에 머금었어. 잠에서 깨기 위한 의식도 아니고. 하지만 입 안에 든 것으로 목을 적시면 정말로 잠에서 깨는 기분이 들어. 그리고 또 생각하지. ‘오늘은 꼭 특별한 하루를 만들어야겠다.’ 나는 작가가 될 사람이고. 그러려면 글을 써야 하니까. 맑은 정신은 기본값으로 유지해야 돼. 물론 요즘들어 나는 많이 망가져서 일기나 편지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된 글을 쓰지 못하고 있지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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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온 뒤로 글쓰기 전 눈을 감고 10분 정도 멈춰있는 습관이 생겼어. 창문 닫힌 방에서 어둠에 잠긴 채 숨만 쉬고 있으면. 생각이 멈추고 세상도 뒤따라 멈추는 것 같거든. 명상을 하다보면 지구가 회전하고 있다는 사실마저 신기하게 다가와. 그 느낌은 마치 어두컴컴한 엄마 뱃속에서 그녀의 심장박동 소리를 들을 때 느꼈던 것과 비슷할 것 같아. 얼마 전에 내 동생한테 들었는데, 아기는 3살 때까지는 엄마뱃속에 있던 순간을 기억한대. 그러다 언어를 배울 즈음이 되면 점점 그때의 기억을 잃는다는 거야. 언어를 배우는 대가로 애기 때 기억을 잃는다니. 나는 동생한테 헛소리하지 말라고 대답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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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시작한지 한 시간도 안 돼 의식이 희미해진다. 라면에 계란 3개, 밥까지 말아먹고 나니 뇌에 있어야할 맑은 피가 한심하게도 소화기관으로 가버렸나 봐. 네가 언젠가 취준생한테 낮잠은 사치라고 했을 때가 생각이 난다. 꿈꾸던 직장에 취직을 한 지금은 잘 쉬고 있는 건지. 주말에라도 낮잠은 좀 자는지. 그리고 지금 행복하게 지내는지. 문득 궁금해져.
인문대를 졸업한 너는 남자들이 앉아 쉬는 순간에도 최선을 다해 달려야 한다고 했지. 세상 물정 모르고 게으르기만 한 나는 결국 이렇게 또 침대 위에 누워서 녹음기를 켜고 목소리로 글을 써. 열심히 살면서도 내 글 읽을 때마다 질투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네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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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저녁 7시네. 너는 지금쯤 퇴근했을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이러다 일 년에 책 한 권씩 써서 매년 선물해주겠다는 약속도 못 지키는 거 아닌지 겁이 나. 하지만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이름 모를 가수의 독백이 깔끔해서 조금 더 누워있고 싶어져. 그럴 때마다 블루투스 스피커를 팔지 않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곤 하지. 교내 공모전에서 너희 학과 선배한테 1등을 뺐기고 2등 상품으로 받은 20만원짜리 보스 스피커 말이야. 솔직히 나 스피커 받았을 때 포장도 안 뜯고 미개봉 상품 11만원에 판다고 중고나라에 올렸었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한테 연락 오더라. 그런데 자꾸 몇 만원 더 깎아달라거나. 물건부터 먼저 보내달라거나. 서울 말고 경기도 오산에서 만나면 안 되냐는 등 짜증나는 요구만 해대는 거 있지? 적당히 응해주려 했지만 도저히 협상이 되지 않더라. 결국 나는 5명의 연락처에 문자로 ‘ㅗ’하나 날려준 뒤 차단해버렸어. 그리고 충동적으로 포장지를 뜯어버렸지.
그덕에 울림이 있는 삶을 살아가게 됐어. 진짜 신세계. 왜 진작 쓸만한 스피커 하나 장만하지 않았는지. 쿵. 쿵. 쿵. 쿵. 드럼 소리에서 비롯된 두근거림은 라면 맛을 잊게 할 정도로 깊어. 중저음이 또렷하게 들릴 때마다 열심히 돈 벌어야겠다는 생각 들더라. 일 년에 고작 51만원을 버는 작가가 되면 어떤 음식을 먹어도 감사하게 되는 것 같아. 작가로 살아가다 결국 작은 출판사 편집자로 취직한 선배가 그러는데. 일 년 동안 시집이 350권 팔린 거면 꽤나 많이 팔린 편이래. 물론 그 중 100권은 내가 구입했지만 말이야. 그래도 따뜻한 물이 나오는 화장실이 딸린 방에서 식사를 마치자마자 곧장 누울 수 있는 침대가 있다는 사실이 정말 감사한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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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네게서 연락을 받아서 기뻐. 생일 축하받았을 때는 고마움보다 놀라움이 더 컸던 것 같아. 오늘 내 생일을 축하해준 유일한 사람이 하필 너라서 그런 걸까. 물론 내 생일은 아직 4시간 정도 더 남았지만 말이야. 아마 나는 오늘을 잊지 못할 거야. 아버지한테 뺨을 맞았던 몇년 전 오늘보다는 훨씬 더 행복한 생일이 됐으니까. 한때 좋아했던 사람에게 축하도 받았고, 이렇게 글도 쓰고 있으니까. 만약 이 글을 보게 되면 내게 다시 연락해줄래? 어쩌면 나는 과거형이 되어버린 사람들을 내려놓고 싶지 않아서 계속 글을 쓰고 있는 건지도 몰라. 당신들을 계속 그리워했다고. 많이 보고 싶다고.
언젠가 반드시 내가 쓴 책으로 가득 채운 방을 네게 보여주고 싶어.
우리 그때까지 울지말고 잘 살아있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