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가 스스로를 마라토너라 부르는 이유
'클리셰(Cliché)'라는 말이 있다. 원래 인쇄 연판을 의미하는 프랑스어였지만 현재에 와서는 '관례처럼 굳은 연출이나 플롯'을 뜻하는 영상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누구나 처음 보는 드라마의 뒤 내용을 어쩐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을 텐데, 그건 보통 그 드라마가 해당 장르의 클리셰를 훌륭하게 따르고 있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연출이나 플롯이 그렇듯 인물에게도 클리셰가 있다. 보통 직업에 대한 클리셰가 유명하다. 학교 선생님이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은 원리원칙을 중시할 것 같고, 직업 군인이라면 평소에도 명령조로 말할 것 같다. 재벌가 예비 시어머니는 어쩐지 딱딱한 얼굴로 우리 아들과 헤어져 달라며 섭섭지 않게 넣은 흰 봉투를 내밀고, 그래도 물러서지 않으면 얼굴에 물을 뿌릴 것만 같다.
그럼 소설가는 어떨까. 적어도 규칙적인 생활과는 거리가 있을 거라 생각된다. 틀에 박힌 일에 질색하고,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며, 평소에는 전 세계를 여행하며 소설 소재를 찾아다닐 것처럼 보인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심상에 젖어, 바다가 잘 보이는 노천카페에서 홀린 듯이 타자기를 두드릴 것만 같다.
현실에서는 어떨까. 물론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 그렇지 않다. 창작자들이 으레 그렇듯 대다수의 소설가는 나름대로 규칙적인 생활을 고수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렇지 않으면 소설 쓰기라는 장거리 달리기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소설을 쓰는 게 장거리 달리기라니, 무슨 어울리지 않는 소린가 싶겠지만 사실 둘은 굉장히 비슷한 점이 많다. 장거리 달리기를 완주할 수 있게 하는 게 부단한 훈련으로 다져진 근지구력과 체력인 것처럼, 소설을 쓰는 데에도 지구력과 체력이라는 요소를 빼놓을 수 없다. 소설의 첫 단추를 끼우는 건 분명 기억 어딘가에서 불쑥 떠오른 장면이나 문장, 혹은 출판사의 요구 조건 정도겠지만, 나머지 단추를 채우는 건 그때까지 단련해 온 지속성과 집중력이기 때문이다.
'노르웨이의 숲', '1Q84' 등으로 유명한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역시 자신의 저서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소설 쓰기와 달리기의 유사성을 역설한다. 그는 글을 쓰는 행위는 육체노동의 일종이며 자신은 소설 쓰기의 많은 것을 매일 아침 길 위를 달리며 배워왔다고 회상한다. 오랜 시간 동안 달리는 건 철저하게 단련된 체력이나 호흡법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고, 소설 쓰기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하루키는 3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꾸준히 크고 작은 마라톤 경기에 참가해왔을 만큼 열정적인 러너로써의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평이한 문장으로 난해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오고 가지만, 일흔의 문턱에 선 지금까지도 꾸준한 작품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데 러너로써의 하루키가 기반을 다졌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상상력에 의지해 백지 위에 체계를 잡고, 문장 사이사이 적절한 단어를 집어넣어 글의 흐름을 유지하는 건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다. 이는 실제로 몸을 움직이지 않을 뿐 머릿속에서는 그에 준하는 노동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장편 소설을 쓸 때는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몇 년에 걸친 기간 동안 이러한 노동을 감수해야 한다. 가장 처음 생각난 아이디어에 집중하면서 그 이미지를 주춧돌 삼아 더없이 세밀한 그림을 그려나가야 한다.
이는 장거리 달리기를 할 때 체력을 잘 안배해 일정한 호흡을 몇 시간 동안 유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체력이 뒷받침해주지 않는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주저앉게 된다. 하루키의 말마따나 아이디어를 소재로 바꾸는 건 재능의 영역이지만, 소재를 책으로 만드는 것이 재능만으로는 해결되기 어려운 이유다.
내가 한창 기억의 잔영을 연재할 때다. 당시 학교를 휴학하고 무작정 글쓰기에 돌입했던 나는 부족한 체력이 어디까지 아이디어를 막아설 수 있는지를 뼈저리게 맛보는 중이었다. 타자 하나하나를 두드리는 일이 중노동처럼 느껴지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손가락까지 전달되지 않았다. 여느 초보 소설가들이 그렇듯 아이디어는 발에 채일 정도로 많았지만 그걸 글로 정제하는데 필요한 집요함과 집중력이 부족했다.
절망적이었던 건 가장 처음 머릿속에 떠오른 장면이 결말 언저리에나 등장한다는 사실. 단순히 그 장면을 쓰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었건만 인물 소개가 끝나기도 전에 내 체력은 연신 '이제 그만!'을 외치고 있었다. 분한 건 둘째치고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건 나 자신이나 독자 분들께, 무엇보다 내가 창조해 낸 캐릭터들에게 실례가 되는 일이었으니까.
가까스로 에피소드 하나를 마감한 나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계속 달릴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 멈출 것인가. 하지만 완주하지 못한 마라톤에 의미 같은 걸 붙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글을 쓸 때와 최대한 비슷한 감각을 느낄 수 있는 운동이 무엇일까 생각하던 차에 달리기를 떠올렸다. 달리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하루키처럼 마라톤 경기에 참가하는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그 이후 일단 떠오른 아이디어가 손끝에서 막히는 일은 잘 일어나지 않았다. 나 역시 그가 그랬듯 길 위에서 글을 쓰는 방법을 배운 셈이다.
클리셰는 기존에 있던 참신한 시도들이 정형화되고 체계화되어 하나의 법칙처럼 고정되면서 만들어진다. 소설가 역시 어쩌면 정말로 떠오르는 심상에 이끌려 홀린 듯 작품을 써나가는 이들이 있어 그런 이미지가 만들어진 걸지도 모른다. 앞으로 나나 하루키처럼 글을 쓰는 행위를 장거리 달리기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진다면, 소설가에게는 '발로 뛰며 이야기를 짓는 사람들'이라는 새로운 클리셰가 만들어질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