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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보람 Jul 31. 2023

댄저 클로즈 : 롱탄 대전투 (2019)

영화 속 군인정신


호주군의 전통과 국제평화를 위한 노력      


호주군과 6.25전쟁  

    

호주는 1950년 7월에 참전국으로는 세 번째로 6.25전쟁에 참전했다. 일부 부대가 일본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 영국에 이어 참전할 수 있었다. 해공군이 먼저 우리 국군을 지원했고, 지상군은 1950년 9월 27일에 한반도에 도착했다. 이후 박천지구 전투, 가평 전투, 마량산 전투 등에서 호주군은 매번 열세인 상황에서 공산군을 상대로 치열히 싸웠으며 작전목표를 달성하였다.        


호주군과 베트남전쟁      


호주는 냉전기가 한창이던 1960년대부터 동남아시아의 전진기지를 담당하는 군사안보적 역할을 했다. 1962년 베트남전쟁에 호주군을 파병한 것도 이런 국가정책의 일환이었다. 호주군은 1973년까지 약 5만 여명을 전장에 투입했으며 519명이 전사하고 2,398명이 부상을 입었다. 


베트남전에서 호주군은 가장 어려운 임무에 투입되었는데 그 이유는 첫째, 호주군 장교, 부사관 중 상당수가 6.25전쟁, 인도차이나-말레이시아 분쟁(1962-66)에 참전했던 베테랑이었고, 둘째, 우수한 엘리트 장병을 선발하여 재편성한 정예 부대 위주로 파병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1966년 ‘롱탄 전투(The Battle of Long Tan)’은 호주 장병의 군인정신과 전투력이 매우 잘 드러난 사건으로 오늘날까지 ‘포위 상황 하 전투의 교과서’라고 불리고 있다.      


롱탄 전투(The Battle of Long Tan) 

     

서막과 전개       


1966년 8월 제1호주특임대 예하의 D중대는 남베트남의 푸옥 투이(Phước Tuy)에 있는 롱탄 마을에 주둔 중이었다. 이때 북베트남인민군(PAVN)과 베트남공산군(VC)의 연합군이 D중대가 배치된 곳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이들은 약 1개 연대(+) 규모였다. 


전투는 8월 16일 베트남 연합군의 기습사격으로 시작되었는데 공격하는 베트남 연합군 선두부대는 약 700명 가량이었고 예비병력까지 합치면 약 2천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에 반해 D중대는 약 100명 수준이었다. 


8월 18일부터는 치열한 교전이 이어졌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지형을 잘 아는 베트남 연합군이 사방에서 호주군을 포위했다. 이때 스콜성 호우로 전방관측이 제한되어 방어하는 호주군의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설상가상으로 항공화력 지원까지 제한되어 이대로라면 D중대가 전멸할 가능성도 있었다. 상급부대에서는 인접한 A중대로 하여금 D중대를 증원하도록 하였으나 베트남 연합군의 포위를 쉽사리 뚫을 수 없었다.    

  

위기와 전투 종결       


이에 D중대장 해리 스미스(Harry Smith) 소령은 진내사격을 결심했다. 진내사격은 교전 중인 보병의 최후수단으로서 적의 예봉을 쳐내기 위해 ‘내 머리 위로 폭격해달라’는 요청을 상급부대에 하는 것이다. 상황이 심각하다고 생각한 호주군 사령부는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폭격기와 헬리콥터를 동원한 항공화력 지원을 실시했고 여기에 진내사격이 효과가 있어 D중대는 급한 불을 끌 수 있었다. 


베트남 연합군은 해가 지기 전 총공격하지 않으면 호주군을 격멸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서둘러 병력을 총동원했다. D중대는 사방팔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혼신의 힘을 다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이때 인접 A, B중대 지원병력과 제1장갑차중대의 장갑차가 베트남 연합군의 봉쇄를 뚫고 들어와 D중대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장갑차의 화력이 베트남 연합군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내고 있을 때, D중대와 B중대가 연결에 성공했다. 증원된 A중대가 D중대의 측후방 감제고지를 점령하고 장갑차들이 사격지원진지를 점령하자 베트남 연합군은 추가 공격을 포기하고 19시 15분 경 철수했다.      


평가      


전투에서 베트남 연합군은 245명의 전사자, 350명의 부상자 피해를 입은 채 퇴각했다. D중대를 포함한 호주군 작전 투입병력 중 전사자는 18명, 부상자는 24명이었다. 전투의 결과를 보나 피해 규모를 보나 호주군의 승리였다. 


연구자들은 전투 승리의 요인을 세 가지로 꼽는다. 우수한 무기체계(항공기, 헬리콥터, 장갑차), 뛰어난 사격 유도술, D중대의 우수한 소부대 전투기술이 그것이다. 호주군 팜플렛은 롱탄 전투를 이렇게 평가했다. “호주군 보병-장갑차-헬리콥터-폭격기가 합동전투를 수행함으로써 불리한 전투환경(날씨와 지형)과 절대적인 수적 열세를 극복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전투를 직접 지휘했던 D중대장 해리 스미스는 어떻게 당시의 일을 회고했을까? 지난 2021년 90세의 노병 해리 스미스는 다음과 같이 인터뷰를 남겼다. 


“나는 전투경험을 바탕으로 내가 원하는 부대가 되도록 훈련시켰어요. 그것은 싸워서 이기는 부대이지요. 나는 부하들이 최고의 상태에서 전투하길 바랐습니다. 중대원이 사격, 팀워크, 군인 정신 등 모든 면에서 최고가 되게 훈련시켰어요. 나는 그게 전투에서 이기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전투경험을 바탕으로 내가 원하는 부대가 되도록 훈련시켰어요. 그것은 싸워서 이기는 부대이지요. 나는 부하들이 최고의 상태에서 전투하길 바랐습니다. 중대원이 사격, 팀워크, 군인 정신 등 모든 면에서 최고가 되게 훈련시켰어요. 나는 그게 전투에서 이기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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