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시대, 시는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는가
정말 어마어마한 책을 읽었습니다. '시를 잊은 그대에게' 류의 대중 강의서(?)인 줄 알았거든요. 그냥 작가회의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했다기에 샀는데, 한 방 맞은 기분이네요. 이 책은 언제나 증언하는 목격자로 살리라 마음먹은 한 재일조선인의 처절한 기록이었습니다.
지은이 서경식은 일제시대 생존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온 재일조선인 가족으로서, 일본에서 온갖 차별을 경험하며 자랍니다. 열다섯 살에 그토록 그리던 '조국'에 왔지만, 군사독재의 공포가 서린 '조국'은 그저 가난하고 어쩐지 낮선 곳이었죠. 1971년 두 형님들이 한국 유학 중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자, 관념으로서의 모국과 현실에서의 모국에 대한 저자의 이질감은 더욱 커지게 됩니다.
이 책의 부제는 '절망의 시대, 시는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는가'입니다. 경계에 던져진 저자는 끝 없이 자신을 타자화하며, 문학에서 희망을 발견하죠.
한 줄의 시(詩)보다, 어쩌면 굶주린 이 앞에 놓인 밥 한 그릇이 훨씬 중요한 거 아닌가 생각했어요. 틀린 말은 아닙니다. 더 나아가 매일 전쟁이 벌어지는, 인간 이성이 사라진 처참한 현실에서 과연 시가 무슨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걸까요? 난징대학살, 관동대학살, 유대인 대학살,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두고, 시인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이 책은 이에 대한 한 재일조선인의 고뇌어린 기록입니다.
저자는 상처입고 소외된 마이너리티들을 어떻게 이어줄 것인지, 역사에서 마이너리티들이 잊히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시인에게 부과된 커다란 과제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다양한 시인이, 다양한 이유로 시를 쓰는 만큼, 시인의 과제에 대한 고민이 다를 수는 있어요. 그런 과제 따위는 없다고 말하는 시인들도 있구요. 저 또한 본격적으로 시를 쓸 때, 시의 역할론과 무용론의 사이에서, 시란 어떤 관점을 취해야 할지, 어떤 기능을 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 고민한 적이 있었거든요.
하지만, 문학에 대한 저자의 관점에 동의하느냐 동의하지 않느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학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마이너리티들의 역사를 다시 써내려갔는지 알게 되면, 인간은 왜 시를 쓰면서 시인이 되는지, 인간은 왜 문학이라는 형태로 굴절된 역사에 저항하는 것인지 가슴으로 느낄 수 있을 테니까요.
주제가 다소 무겁지만, 저자의 체험이 녹아들어 있는 만큼 생각보다는 잘 읽히는 책이었어요. 재일조선인 1세(저자의 어머니)의 삶을 통해 살펴본 언어에 대한 이야기, 가족애와 애국심이 어떻게 다른지 등 저자의 다른 논의들도 너무나 좋았구요. 결론적으로 저는 이 책을 통해,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를 좀 더 객관적인 시선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해요.
처절하지만 아름답게, 아무런 쓸모없을 것 같지만 역사 속에서 생생히 살아 있는 '시'라는 형식을 가슴으로 느끼고 싶은 분들에게 일독을 권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