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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수 May 12. 2024

OO 리의 밤

고맙습니다.

 oo리에는 밤이 되면 술에 취한 대학생들이 많았다. 그 광경을 친구 손이 사는 원룸 안에서 베란다 너머로 쳐다보곤 했는데 꽤나 흥미로웠다. 그러나 그 재미는 오 분까지였다. 그 이상 쳐다보면 따분해질뿐더러 내가 뭘 하고 있나 회의감이 들기까지 한다. 그래서 우리는 보드게임을 했다.  내 침대는 아니지만 편하게 앉아 관전을 할 때도 있었고 대부분은 게임에 참가했다.


취침시간이 되면 손이 서교동의 밤, 자우림 또는 이소라의 노래를 자장가로 틀어줬다. 때때로 럼블피쉬의 '한 사람을 위한 마음'을 틀기도 했는데 그래서인지 그 노래를 들으면 oo리에서의 밤이 떠오른다.


 나도 모르는 우리 학교에 괴담이 하나 있었다. 그것을 들은 시각이 하필이면 자정이 지난 후라 잠을 설쳤다. 무서운 얘기를 좋아하지만 듣는 순간 모두를 깨우고 나 먼저 잠들어야 직성이 풀린다. 아니면 오들오들 떨며 밤을 새울지도 모른다. 항상 무서운 얘기를 꺼낸 당사자들이 먼저 잠든다. 그때마다 나는 친구 정 옆에 가서 누웠다. 우리 중 항상 정이 먼저 잠들긴 했지만, 정의 잠든 얼굴을 바라만 봐도 안심이 되었다. 예쁘고 순둥순둥한 얼굴이지만 내면에 단단함이 있었고 그 단단함에 귀신도 도망가지 않을까 하는 굳은 믿음을 갖게 만드는 친구였다. 그래서 무서울 때마다 잠든 정의 손을 꽉 잡고 잠들곤 했다.


 친구 손이 별말하지 않으면 미리 집에다 연락해서 3일 외박권을 끊기도 했다. (손에게 허락받는 것은 다음 순서였다.) 손이 속으로 욕했을 수도 있다. 때때로 우리가 더 눌어붙으려 하면 쫓아내기도 그럴 때면 우리는 뻔뻔하게 손이 좀 예민한 시기구나 하며 자리를 피해 줬다. 그렇게 며칠간 손의 집은 임시 휴업을 하게 됐다. 삼일 정도 눈치를 보면 손이 먼저 우리들에게 말한다.

"우리 집 가서 밥 먹자."

그럼 우리는 그때부터 다시 손의 집에 눌러앉기 시작한다. 손은 왜 그랬을까. 왜 그렇게 우리에게 관대했을까.


 그래도 우리 중 가장 양심 있던 친구는 정이었다. 정은 항상 나에게 아낌없이 베풀었다. 이십 대 초에 나는 항상 돈이 없었다.(지금도 없지만.) 그런 나에게 정은 자주 밥을 사줬다. 내가 카드를 꺼내면 항상 그 카드를 살포시 밀며 자기가 계산했다. 정은 학교에서 꽤 먼 곳으로 아르바이트를 가기도 했는데 그곳에서도 싹싹하고 일을 잘해서 환대받았다. 그때 당시 mbti가 유행하진 않았는데 극 I였던 내가 극 E인 정을 만나 점차 밝아지기 시작했다. 집에서 몰래 거울을 보며 정의 텐션을 따라 해보기도 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을 닮아가고 싶어 한다. ) 갑자기 '거침없이 하이킥'이 생각났다. 박해미가 빛나보였던 서민정이 그날부터 그를 따라 하자 주위에 모든 사람들이 기겁한다. 그냥 사람은 생긴 대로 사는 게 맞나 보다.


 전은 내게 꽃을 종종 선물해 줬다. 그때가 한창 드라마 '도깨비'가 유행하기도 했지만(삼신할머니가 졸업식 날 은탁이에게 목화꽃을 전해 줌.), 전은 유행에 따라 꽃을 고르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꽃말, 또는 의미를 보고 선물하는 친구였다. 목화꽃의 꽃말은 '어머니의 사랑'이었다. 해맑게 웃으며 받았는데 집에 가지고 오니 코끝이 찡해졌다.


누군가 내게 다시 돌아가고 싶은 시기가 있냐고 물으면 단연 대학교 때이다. 그때 내가 제일 많이 웃고 사랑받고 사랑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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