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민 기자 enam.here@gmail.com
여성의 사회진출이 늘어난 만큼 다양한 직종에서 일하는 여성들을 만날수 있다.
이들의 일은 어떤지 궁금했다. 여러 여성 직업인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일을 소개한다.
어린 시절 엄마 손에 이끌려 악기를 배우러 학원 한번 가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나도 어릴 때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웠다. 그 나이에 악기를 배우는 건 적성을 가늠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직도 기억 난다. 나는 어릴 적부터 손이 큰 편이었고 강약조절도 잘하는 편이라 피아노 선생님이 내게 열정이 없는 걸 아쉬워했다. 바이올린도 마찬가지였는데, 당시 함께 학원에 다닌 친구는 첼로 전공으로 예술중·고등학교를 나왔고 대학 역시 첼로 전공으로 갔다.
그때 나는 어떻게든 연습을 빼고 싶어 꾀를 부렸으나 친구는 참 열심히 했다. 정작 성인이 되니 ‘그때 배워뒀으면 지금 기억은 하려나’ 싶지만, 피아노를 양손으로 연주했던 마지막 기억은 중학생 때 음악 수행평가다.
이번에 만난 김지민 씨는 25살. 대학원에 진학해 바이올리니스트의 길을 걷고 있는 전공자다. 클래식·현악기는 일반적으로 어렵다는 인식이 퍼져있지만 지민 씨는 모두가 그 매력을 알게 되길 바란다고 했다.
지민 씨는 피아노를 배우다가 바이올린을 시작하게 됐다며 이야기를 꺼냈다.
“유치원생 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도저히 흥미가 생기질 않더라고요. 그때 어디서 바이올린 수업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좀 기웃거리다가 엄마한테 ‘나 바이올린 배우고 싶어’ 했는데 그게 전공까지 이어졌어요.”
내가 바이올린을 배우며 힘들었던 점 중 하나는 바이올린이 너무 섬세했다는 거다. 몇 번째 손가락을 어디에 두고 어느 정도로 눌러가며 음을 조절하고 현을 켜는 걸 동시에 하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기자는 지금도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못한다) 섬세한 악기인 만큼 전공자여도 연습은 힘들지 않냐고 물었다.
“맞아요. 다루기가 힘든 악기죠. 연습은 체력보다 정신력 소모가 더 커요. 부족한 게 뭔지 확실히 알아야 하고 그 부분을 어떻게 연습해야 효율적인지 고민하는 걸 시작으로 완벽하게 연주할 때까지 해야 하는 게 가장 힘들어요.”
앞서 말했지만 기자는 어린 나이에 악기를 배워 업으로 삼는 건 재능이거나 적성이거나 혹은 둘 다라고 생각한다. 지민 씨에게 중간에 다른 일을 하고 싶었던 적은 없냐고 물었다. 지민 씨는 “이걸 말고 뭘 했을까 생각해보면 아무 생각이 안 나요. 그냥 운명인 것 같아요”라며 웃었다.
“전공으로 선택하게 된 계기도 정말 별 것 아니에요. 그냥 취미로 하다가 선생님께 예뻐 보이고 싶어서 바이올린 전공을 하겠다고 했어요. 그땐 진짜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었죠. 하지만 후회하냐고 묻는다면 절대 아니에요.”
바이올린은 확실히 지민 씨의 적성에 맞는 것 같았다. 기자는 어릴 때 등 떠밀려 학원에 다녔을 땐 그렇게 바이올린 배우기가 싫었는데 이제 와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바이올린은 다른 악기에 비해 배울 기회가 적다. 지민 씨는 우선 개인 악기가 필요하다는 게 가장 큰 걸림돌인 것 같다고 했다.
“우선 바이올린을 전문으로 하는 학원이 거의 없어요. 또 악기를 피아노처럼 공용으로 쓰는 것도 불가능 하고요. 개인이 바이올린을 준비해야 하니 구매·관리가 부담되는 게 사실이죠. 레슨비도 비싸고요. 그래도 요새는 레슨 선생님을 찾을 수 있는 앱이 많아져서 시간이나 장소를 맞추기는 훨씬 쉬워졌어요.”
지민 씨도 대학원을 다니며 바이올린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스케줄 조정을 할 수 있어서 학교와 학원 수업이 겹치는 날이 없어요. 오히려 학부생 때보다 편해요. 제가 아이들을 좋아해서 그런지 가르치는 보람도 있고요.”
내가 나중에 대학원을 졸업하면 성인 지도도 할 생각이 있냐고 묻자 지민 씨는 있다고 대답했다. “제 욕심은 두 가지예요. 첫 번째는 박사학위, 두 번째는 좋은 레스너가 되는 거요. 기자님이 배우고 싶다고 하시면, 제가 잘 가르쳐 드릴게요.”
지민 씨는 현악 페다고지과 학생이다. 페다고지는 교수법이라는 뜻으로 어떻게 학생을 가르쳐야 하는지, 어떤 식으로 바이올린과 친해지게 하고 흥미를 끌어낼지 배운다고 했다. 지민 씨는 이 수업이 온전히 자신만을 위한 수업은 아니라고 했다.
“제가 배운 내용을 나중에 제 학생들에게 어떻게 접목해 가르칠지 연구하는 시간이기도 해요. 교수법 외에도 화성학이나 전공 실기를 배우는 데 그런 과목들도 마찬가지죠.”
지민 씨는 좋은 레스너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바이올린 이야기와 아이들을 가르치는 이야기를 하는 내내 눈이 반짝거렸다. 어린 시절부터 쭉 바이올린을 켜면서 슬럼프를 겪은 적은 없는지 궁금했다.
“당연히 있어요. 처음엔 중학교 때 이유 없이 하기 싫어졌어요. 질리고 귀찮고 재미도 없고요. 그래서 연습을 안 해가서 선생님께 혼나고.. 의욕이 없으니까 또 연습을 미루게 되고 그랬어요. 두 번째는 입시생 때였는데 선생님이 너무 무서웠고 할 게 너무 많아서 지쳤어요. 그때는 당장 입시가 코 앞이니까 ‘이 또한 지나가리라’하는 마음으로 참고 보냈어요.”
너무 질리고, 하기 싫은 일을 ‘이것도 지나갈 거다’하며 참고 보내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건 사는 게 아니라 삶을 견디는 일이다. 지민 씨는 그때 어떤 도움이 필요했을까? 입시 강의를 하게 된다면 슬럼프를 겪는 학생에게 어떻게 해 주고 싶은지 물었다.
“입시 강의는 아직 무리지만, 그런 학생이 있다면 일단 맛있는 걸 먹으러 가자고 할 거예요. 가서 어떤 점이 힘든지, 집에서 어떤 지원을 받고 있는지 묻고 상담해 줄래요. 고칠 부분은 고칠 수 있게 하되 너무 엄하게는 말고요. 그리고 잘하는 부분은 엄청 칭찬해 줄 거예요. 슬럼프가 왔을 때 받는 칭찬이 되게 큰 위로가 되잖아요. 학생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레스너가 되고 싶어요. 그리고 여태껏 잘 해왔으니 남은 시간도 잘 할 수 있을 거고 이겨낼 수 있다고 해줄래요.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면서요.”
지민 씨는 장난스레 얘기했지만 말에서 애정이 느껴졌다. 만약 박사학위를 따면 입시생 지도도 할 거냐고 묻자 지민 씨는 “그것도 좋지만 교수가 되고 싶은 마음이 더 커요”라고 답했다.
"어쨌든 지민 씨가 그리는 미래는 바이올린을 가르치는 일이네요"라고 말하자 지민 씨는 웃으며 “맞아요. 가르치는 일도, 바이올린도 제가 사랑하는 일이에요. 바이올린의 매력을 많은 사람이 알았으면 해요”라고 대답했다.
피아노 학원에 다닐 때 선생님이 무서워 친구와 떠들지도 못하고 앞에서 연주할 때마다 떨었던 기억이 났다. 다른 선생님을 만났다면 기자는 취미로 계속 피아노를 쳤을까? 확신할 순 없지만 지민 씨 같은 선생님을 만난다면 금방 바이올린과 사랑에 빠질 것 같았다.
나는 정말로 바이올린을 배우고 싶은데 나중에 연락해도 되냐고 묻자 지민 씨는 "당연하죠!"하고 기뻐했다. 내겐 조만간 레고 맞추기, 누워서 넷플릭스나 책보기 외에 또 다른 취미가 생길 것 같다. '혼자' 하는 취미가 아닌 '좋은 선생님'의 도움이 필요한 취미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