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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상유리 Mar 21. 2020

내가 너무 불쌍해요, 계속 이렇게 일하는 건.

모든 것에는 시작이 있다. 가족사진을 찾았던 그날

2014년 11월, 1년간의 준비과정과 실행을 거친 대망의 교육 프로그램이 마무리되는 날이었다. 워낙 그룹에서 관심도 높았고 참가자들 또한 곧 관계사 사장이 될 사람들인지라 과정 자체에 대한 기대도 높았고 그동안 해보지 않았던 다양한 시도를 통해 여러 호평을 받았던 과정이라 마무리하는 시점까지 프로젝트 팀원들 모두 마지막까지 무사히 잘 끝내자는 단합과 흥분이 절정에 올랐었다.


교육 과정이 마무리되어 그룹의 수장이 다녀가시고, 참가 임원들도 검은 승용차를 타고 다 빠져나간 직후 사단이 벌어졌다.


“늬들은 왜 일을 그 따위로 해놓은 거야!!”


정확한 말은 기억나지 않지만 (충격 후 기억장애) 정말로 사소한 것에서 시작된 잔소리가 아예 팀 전체에 대한 질책과 과정 전체의 부실함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져 한 시간 동안이나 고함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역시 충격 후 기억장애). 언제나 그렇듯이 퍼즐을 다시 맞춰보면 중간중간에 완벽하지 않은 순간들이 있었고 보완해야 할 점들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당시에는 정말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듯한 충격으로 모두들 할 말을 잃고 묵묵히 듣고만 있어야 했다. 덕분에 그 고생을 하며 진행한 프로그램의 마무리를 자축하는 술자리 하나 하지 못한 채 다들 각자 흩어져 집에 갈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억울함이 밀려와 분노로 바뀌다 어느 시점이 지나니 현실의 내 정신은 내 몸에 붙어 있지 않고 허공을 맴돌고 있었고, 이제 기어이 손이 떨리는 지경에 와서야 시동 꺼진 차 안에 앉아 출발할 생각을 못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핸드폰에 저장된 두 살 배기 아이와 아내의 얼굴을 한참 들여야 보며 마음을 다스렸다. 혈압이 내려가고 떨리는 손이 진정이 되고 나니 정신이 들어와 운전을 할 수 있게 되어 교육장을 빠져나왔다.


대기업의 연봉도, 존경하는 선후배들도, 하고 싶은 업무를 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도 내가 만족스럽지 못하면 모두 허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번 공들여하는 모든 일들이 이리 간단히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보니 나의 능력에 대한 한심함과 만족하지 못함의 분노를 온몸으로 받아내야 하는 감정의 쓰레기통이 된 나의 처량함에 나 자신이 불쌍하고 앞으로의 희망이라는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날 가족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강변도로에서 난 다짐했다.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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