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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밀리 May 02. 2024

너로 인해 내가 엄마로 성장할 수 있었어 - 1

목표를 향해 꾸준히 가고 있는 너를 응원한다

2004년 10월 결혼하고, 금세 아기를 가졌지만 아직 때가 아니었는지 금세 유산을 했다.

유산이 되면 아기가 금방 생긴다는 주변의 위로가 있었지만, 쉽게 아기가 생기진 않았다.

시간이 지나 2006년 새해 목표로 산부인과를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시험관 전 절차로 인공수정을 하게 됐었는데, 첫 인공수정에서 첫째 임신에 성공하게 된다.

로또보다 힘들다는 첫 인공수정에서의 임신. 그때 의사 선생님께서 로또보다 더 큰 행운을 얻은 거라고 하셨다. 그렇게 큰 아이를 가졌고 이듬해 2007년 1월에 첫딸을 낳았다.


참 순했다. 잘 울지도 않았고, 순둥이도 이런 순둥이가 없다 싶을 정도로. 그래서 지금도 친정엄마랑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할 정도로 순해도 이런 순한 애가 있을까 싶었다.

입은 늦게 트였다. 만 두 돌이 지나도 단어 몇 개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내 동생이 만 두 돌 전 이모 하면, 크리스마스 선물 해 주겠다고 할 정도로 말이 참 늦게 트였다.


그리고 자주 아팠다. 둘러업고 소아응급실 있는 곳을 찾아다니는 게 일이었다. 입원도 참 자주 했었다.

워킹맘이었던 나, 그리고 내 아이들을 돌봐주시던 우리 엄마. 그때 생각하면 가슴이 저릿할 정도로 큰아이는 참 많이 아프고, 자주 아팠다.

친정엄마가 큰아이 데리고 병원 가서 진료받고 약 받아 오는 게 일상이던 어느 날, 그날도 어김없이 진료 후 약을 받으러 약국에 갔었는데, 어떤 낯선 할아버지가 4살 정도 됐던 큰 아이를 보고 그러셨단다.

너 엄마 어디 있냐고. 너 꼭 피아노 배워야 한다고. 엄마한테 피아노 가르쳐달라고 꼭 이야기하라고.

약을 받으려 기다리던 친정엄마가 너무 놀라 큰 아이를 잡았고, 할아버지는 꼭 피아노 배워야 한다 하고는 약국을 나가셨단다. 그냥 평범한 할아버지였는데, 지금도 친정엄마는 할아버지한테 왜 피아노 배우라 하신 거냐 묻지 못한 걸 아쉬워하셨다. 뭔가 특별한 걸 느끼신 건지, 그게 아니면 그냥 하신 얘기인 건지...


하지만, 큰 아이는 여섯 살이 되고 일곱 살이 되어도 피아노를 배우겠다고 하지 않았다. 이것도 이야기하자면 참 길다. 큰 아이는 고집이 참 세서, 스스로 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야 하는 아이였기에 내가 아무리 권한다 하더라도, 스스로 필요를 느끼지 않으면 절대 하지 않는 아이라 더 이상 큰 아이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유치원을 졸업을 눈앞에 둔 어느 날 아파트 앞 피아노 학원을 지나며, 큰 아이가 이야기했다.

엄마, 나 12월부터 피아노 학원 다닐래요.

마음 바뀔까 봐 얼른 피아노 학원에 등록해서 보냈고, 너무 재미있어하며 하루도 빼지 않고 매일을 즐거워하며 피아노 학원에 갔다.

큰 아이의 음악활동은 이렇게 시작됐다.

초등학교 입학하는 날 입학식에서 큰 아이는 후배들을 위해 입학 축하 연주를 하는 오케스트라 언니, 오빠들을 보고  내 동생이 입학할 때 바로 저 자리에서 오케스트라 연주를 하겠노라 선언했고, 방과 후 악기로 바이올린과 플루트를 신청했다.  

두 악기를 조금씩 경험해 본 큰 아이는 바이올린은 그만하고, 플루트를 하겠다고 결정했고, 보통 3, 4학년 때부터 시작한다는 플루트를 큰 아이는 1학년 때부터 방과 후 수업을 통해 계속 배우기 시작했다.


큰 아이가 나에게 이야기했다. 자기의 꿈은 음악가라고.

피아니스트 같은 연주자를 이야기할 줄 알았는데, 음악가라고 해서 되물었었다. 구체적으로 뭐가 되고 싶은 거냐고. 참, 미련한 엄마다.

그때 큰 아이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음악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난 8살짜리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이제 막 피아노 학원 다니고, 이제 막 악기를 배우는 아이한테 무슨 답을 들으려 했던 건지. 뭔가 조급한 마음이 앞서서 진로를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음악 한다고 하면 보통 다섯 살 때부터 시작한다는데, 그 아이들에 비해 늦어도 한참 늦은 것 같고, 음악은 전혀 문외한인데, 음악 쪽에 아는 사람도 없어 아무것도 도움이 되어줄 수 없을 것 같다는 불안함이 엄습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즐겁고 재미있게 시작한 음악공부가 마냥 신나고 즐거웠을 리가 없었다.

언젠가 그 우여곡절을 이야기할 날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피아노를 그만두겠다고 선언하기도 했었고, 그래도 음악은 계속하고 싶으니, 플루트를 전공하겠다고 한 적도 있었다. 그러다 다시 또 다른 계기로 인해 피아노를 다시 시작하겠다고 하기도 했었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예중 준비까지 같이 했었다.


예중 준비를 하는 기간 동안 수없이 나 혼자 많은 고민을 했었다.

큰 아이가 6학년일 때, 회사를 그만두고 프리랜서로 전향한 뒤에 큰 아이를 데리고 같이 마스터클래스를 가거나 콩쿠르를 갔었는데, 어릴 때 너무 좋아서 즐기며 피아노를 치던 모습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기계적으로 연주하는 것처럼 보였다.

연주할 때 느껴지는 느낌은 무뚝뚝함 그 자체였는데, 아직 어려서 인걸로 늘 포장했지만, 의무감으로 연주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 심난했다.


마스터 클래스를 받던 어느 날 교수님이 큰 아이의 연주를 듣고는 물어보셨다. 넌 이 곡을 들을 때 어떤 느낌이 드니? 잠시 고민하던 큰 아이는 입시요.라고 대답을 했다. 6학년의 귀여운 대답(?)이라고 하기에는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곡을 즐기고 해석해서 연주하는 게 아니라 정말 큰 아이는 기계적으로 연주하고 있었다는 게 증명된 듯했다. 교수님은 이 곡에서 봄을 느껴보렴. 봄이 오면 어떤 생각이 드니라고 물었지만, 큰 아이는 아무 대답하지 못했다. 이 날의 큰 아이 모습을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건 과연 이 아이가 연주자로 성장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나 스스로에게 많이 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직 어리니 모른다. 사춘기가 지나면 달라진다.라는 수많은 설명들이 따라왔지만, 나는 고민할 수밖에 없었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연습도 열심히 하지 않았다. 열심히의 기준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피아노를 하루에도 몇 시간씩 쳐야 한다는데 30분도 간신히 치는 큰 아이를 보면 답답했다.(거의 누워만 있었다 �)

연습실에 넣어 문을 잠그고, 식사 때가 되면 김밥 한 줄 넣어줘서 그걸 먹고 울면서 연습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릴 때 엄마가 혹독하게 연습하게 시킨 게 너무 싫었지만, 결국 그게 시간이 지나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결국 엄마인 내가 다그치고 혼내서 억지로라도 연습을 하게 했어야 했을까. 나도 그렇게 단호하고 혹독한 엄마가 되어야 하나 속으로 너무 갈등하고 있었다.

큰 아이는 피아노 앞에 오래 앉아 있는다고 해서 효율이 느는 것은 아니라고 하면서, 단 한 시간을 치더라도 집중해서 치면 서너 시간 설렁설렁 연습하는 것보다 낫고, 본인은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에 굳이 긴 시간 연습을 할 필요는 없다고 이야기를 하니, 이걸 반박할 요령도 없었다.

정말 연습 얼마 안 했는데, 정작 레슨 받으러 가면 선생님은 연습 많이 했나 보네! 라며 칭찬을 하실 때도 있으니, 나는 더더욱 반박도 못하고 강요도 못하고 마음속만 애태울 수밖에 없었다.


입시날짜는 다가오는데 뚜렷하게 달라지는 건 느끼지를 못하겠고, 큰 아이는 여전히 기계처럼 치고 있는 걸로 느껴지고, 부드러운 느낌이 어느 날은 나오다가도 다시 또 무뚝뚝해진 연주를 들으면 마음속 깊숙이까지 답답해지는 일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렇게 입시일은 왔고, 썩 괜찮지 않은 순서로 예중 입시에 참여했고, 결과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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