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101가지 방법.
지금도 그런 책이 있는지 모르지만, 내가 어릴 때 우리 집 책꽂이에는 아이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101가지 방법이라는 책이 있었다.
12살, 9살 많은 형과 누나 그리고 12살 어린 여동생이 있던 아빠는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도시로 나가 하숙 생활을 시작했단다. 아빠의 어린 시절엔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서먹했던 형과 누나, 방에서 키우던 병아리, 들에서 만난 너구리, 가끔 집에 갔을 때 쑥쑥 자라 있던 막내 여동생에 대한 이야기는 있어도 부모님(나의 할아버지와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많지 않았다.
엄마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린 동생들과 또 가까이 살던 사촌 동생들,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 얘기는 들었어도 지방 현장에서 일하느라 집을 자주 비웠던 아버지와 장사로 바빴던 어머니(나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와의 추억은 별로 얘기해주지 않으셨다. 아마도 딱히 자주 이야기를 나누진 않으셨던 것 같다.
격동의 60~70년대. 부모들의 삶은 팍팍하고 바쁘게 돌아갔고 부모와 자식 간의 교감은 턱없이 부족한 시대를 살아오셨지만, 내 자식에게는 사랑한다는 얘기를 자주 해야 한다고 생각하셨는지 우리 집에는 두어 권의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나 행복에 대한 책이 있었다. 가끔씩 나도 꺼내보던 그 책에 담긴 얘기들은 이따금 나의 현실에 나타나곤 했다.
아침에 신발을 신는데 쪽지가 나와서 꺼내보면 오늘도 사랑한다고 쓰여있거나, 도시락 가방을 열고 반찬통을 꺼내는데 그 사이에 툭 오늘 점심에도 엄마 아빠가 많이 사랑해라고 쓰여있거나, 토요일 수업을 마치고 집에 가면(국민학생들은 토요일에도 학교에 갔었다), 화살표를 따라오라고 하고 그 마지막에 사랑한다고 쓰여있는 등등. 약간 간지럽고 짓궂은 방법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표현해주셨다. 도시락 뚜껑을 열었을 때 하트 모양으로 박혀있는 완두콩. 김을 오려 붙인 하트 모양이 올라간 밥. 기방에서 책을 막 꺼냈는데 딸려 나오는 엄마의 쪽지. 가끔은 놀리는 아이들 때문에 쑥스러웠지만 싫지 않았다. 사랑한다는 표현은 자라면서 계속 쌓여 때론 부모님이 나를 크게 꾸짖거나 화를 내실 때에도 날 싫어하진 않으실 거란 확신과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두 분 다 감정이 풍부하고 많이 표현하시는 분들은 아니다. 오히려 잘잘못을 판가름하고 올바름을 가르치는데 더 익숙하신 분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고 아낀다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책도 사서 읽고 노력하셨던 것 같다.
내가 원래 칭찬을 잘 못해.
내가 원래 감정 표현을 잘 못해.
그냥 내 성격이야. 표현 잘 못하도 네가 대충 알아줬으면 좋겠어.
꼭 말로 해야 알아? 눈치라는 게 있는데. 이게 내 성격이니까 대충 네가 이해해줘.
사회생활을 하면서 이런 얘기를 제법 많이 들었다.
하지만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내 감정을 남이 추측하게 하면 안 된다.
감정이란 내가 표현하고 그것이 상대에게 전달되었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감정을 표현하는 것도 연습이 필요하다. 그 연습이 쌓여야 진심을 누군가에게 전할 수 있고, 상대방을 진정으로 설득하려면 반드시 내 진심이 전달되어야 한다.
쑥스럽다, 부끄럽다는 핑계로 대충 알아주겠지 하고 넘기는 감정들이 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다.
우리는 분노, 짜증을 표출하는 데에는 익숙하다.
내가 화를 못 내는 성격이라 그런데 대충 내가 화가 났다는 것 좀 알아줘.라고 말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짜증, 분노, 억울함 등 부정적인 감정에는 대체로 솔직하다. 그러나 고마움, 만족함, 존경함 등 긍정적인 감정은 표현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오히려 부정적인 감정은 조금 숨기고, 긍정적인 감정은 최대한 표현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감정에는 진심이 담겨야 한다. 듣기 좋은 소리도 삼세번이라고 했다. 진심을 담지 않고 남발하는 칭찬과 감사인사는 결국 짜증만 유발할 뿐이다. 감정은 꼭 필요할 때 진심을 담아서 전해야 힘이 실린다.
지나간 모든 것들은 다 되돌릴 수 없지만, 특히 감정은 더 그렇다. 진짜 고마웠을 때, 상대방이 진짜 멋있어 보였을 때, 일을 정말 잘해서 고맙고 나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그 순간 내 진심을 담아 전하지 않으면 소용없다.
그런 느낌이 들었을 때 주저하지 말고 긍정적인 내 감정을 진실되게 표현할 수 있는 멋쟁이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