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는 또 다른 기회
찬바람이 불고, 수능이 다가오고 있네요.
저에게 수능은 벌써 20년 전의 일이지만, 매년 이맘때면 마음이 조금 싱숭생숭해집니다.
20년 전, 물수능으로 유명했던 2001년 수능에서 저는 고등학교 3년 내내 받았던 성적 중 가장 낮은 점수를 받았습니다. 그 어떤 모의고사도 이렇게 낮은 점수는 나온 적 없었는데, 그 점수가 제 수능 점수가 되었지요. 뭐랄까 인생은 실전이라는 것을 굉장히 빨리 배웠달까요?
그 날의 수능은 굉장히 큰 충격이었는지, 저는 사실 수능을 마치고 그다음 해 2월 대학교 OT에 참석했을 때까지의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원서는 어떻게 썼는지, 진로는 어떻게 결정했는지도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아요.
제가 처음 진로를 결정했던 것은 초등학교 5학년이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와 함께 걷고 있었는데, 예전에 할아버지께서 의술은 있는데 형편이 어렵던 친척분께 한약방을 차려주셨는데, 그분이 갑작스럽게 돌아가시면서 할아버지께서 얼떨결에 한약방은 운영하셨다는 얘기를 해주셨어요. 할아버지 덕분에 병이 나은 동네 분들도 계시고 그랬지만 정식 허가받은 한의사는 아니었다는 것이 내심 마음에 걸렸다며 가업(?)을 이어 정식 한의사가 되면 좋겠다는 말씀을 해주셨지요. 딱 82년생인 저에게는 남동생도 있는데 여자인 나에게 가업을 맡긴다는 것에 크게 감동받았고, 반드시 내가 가업을 이어야겠다는 사명감이 들어 한의사가 되겠다는 장렬한 꿈을 꾸게 되었어요. 중학교 2학년 이후로 무난하게 한의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자랐지만, 막상 실전인 수능을 보고 나니 그 점수로는 도저히 한의대 근처에도 갈 수 없었어요. 학교에서는 재수를 권하셨지만 저는 재수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수능 점수가 확정되고, 아버지께서는 두 가지 제안을 해주셨어요. 첫 번째 제안은 공무원 시험을 볼 것. 9급 시험은 고졸로도 볼 수 있고, 수능이 끝나고 가장 머리가 비상한 시기에 공무원 시험을 보는 것이 더 좋을 수 있다. 사회생활하다가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다시 대학을 가도 되는 거고, 아니면 대학이 아닌 곳에서 하고 싶은 일을 찾을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2001년에는 지금처럼 공무원이 선망의 대상은 아니었어요. 게다가 대학 하나 가겠다고 고등학교 시절을 주말에서 등교하며 보냈는데 이대로 고졸로 멈추는 것은 스스로가 용납되지 않았습니다(하지만 이 부분은 두고두고 후회하고 있어요). 두 번째 제안은 산림학과 같은 자연친화적인 학과에 진학해서 자연에 대해 공부해 볼 것이었습니다. 아파트에서 자라면서 자연을 등한시하고, 매일 컴퓨터만 붙잡고 사는 제게 일침을 가하는 제안이었어요. 하지만 어리고 철없던 시절에 산림학과를 가면 매일 산에 가야 하는 줄 알고 너무 두려워서 꾀를 낸다고 낸 것이 원예학과로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뭔가 산에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으면서 자연친화적이라 설득이 가능할 것 같았거든요.
제가 진학하던 시기에는 특차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면접이나 논술고사 없이 수능 점수 만으로 입학을 결정하는 입학전형이었는데요, 전제 조건은 그 해 특채에 합격하면 그 해에는 다른 학교에는 원서를 낼 수 없었어요. 특차는 정시모집보다 결과 발표가 먼저 나기 때문에 당시 심리적으로 굉장히 불안했던 저는 특차로 빨리 진로를 결정하기를 원해서 고향에 소재한 국립대학교 원예학과에 특차로 원서를 접수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조간신문을 통해 제가 원서를 접수한 학과가 미달이라 바로 합격임을 확인했지요. 이렇게 고작 이틀 만에 대학 입학이 결정되었습니다.
인생은 알 수 없어서 재미있다고 하지요.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지원해서 하루 만에 합격해버린 학교는 의외로 저에게 많은 재미와 감동을 주었고, 수많은 경험을 쌓아주며 제 인생을 완전히 바꿔주었습니다. 입학을 할 때에는 제 점수면 그 학과의 수석입학도 가능한 것이 아닌가 하는 오만한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수석은 저보다 훨씬 높은 점수를 받아 더 좋은 학교도 충분히 갈 수 있었지만, 이 학교에 꼭 강의를 듣고 싶은 교수님이 있어서 입학했다는 친구가 차지했습니다. 대학이란 점수에 맞춰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 싶은 것이 있을 때 오는 거라는 것을 깨달은 계기가 되기도 했고, 마음속으로 나는 수능을 망쳐서 어쩔 수 없이 여기를 다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는 너무 오고 싶어 하는 학과에 운이 좋아서 다니게 된 거라는 자기 최면의 좋은 소재가 되기도 했어요.
입학하기 전에는 대학이란 점수에 맞춰서 오는 거라고 생각했었어요. 하지만 입학해서 만난 동기들 중에는 정말 식물을 너무 좋아해서, 우리나라 농업에 큰 뜻이 있어서, 농업 연구에 관심이 있어서 온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입학전형으로 들어온 친구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제 고정관념이 많이 바뀌고 유연한 사고방식을 가질 수 있게 되었어요. 실업계 전형으로 입학한 친구와 후배들이 있었는데요, 전공이 아닌 교양과목과 대학 수학, 대학 영어, 국어와 작문, 생물, 화학 위주로 수업을 듣던 1학년 때에는 실업계 전형으로 입학한 친구들은 학업을 따라가는 것을 많이 버거워했었요. 가끔은 같은 학과라고 하기에는 우리는 좀 차이가 많이 나는 것 아닌가 하는 오만한 생각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2학년에 진학해 전공과목을 배우게 되면서 그 친구들의 도움을 정말 많이 받았어요. 전공 분야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고, 실습도 해봤던 실업계 고등학교 출신의 친구들에 비해서 농업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화분 하나 키워보지 않은 상태로 입학했던 저는 정말 멍청이였습니다. 화분에 흙 하나 제대로 담지 못하고, 아는 꽃의 이름도 없고, 식물을 분류할 줄도 모르고 조직배양이라는 것도 처음 들어본 저는 한낱 멍청이였지요.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실습수업을 따라가고 더불어 배우는 경험을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부분이 서로 다를 뿐 누가 더 잘나고 못난 것이 아니라 그냥 알고 있는 범위가 달랐던 것뿐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이 경험은 제 인생 전반에 굉장히 큰 영향을 미쳤어요. 회사를 다닐 때 제 인성에 대해 칭찬해주셨던 분이 계셨는데요, 이력서만 보시고 저를 오만한 사람이겠구나 하고 생각하셨다는데 막상 함께 지내보니 오만하지 않으면서 열린 사고방식으로 폭넓게 상황을 파악하고 유연하게 대처하는 점이 멋있다고 해주셨지요. 제가 이런 얘기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대학시절의 경험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입학 초반에는 나는 수능을 망쳐서 여기 왔을 뿐 나는 너희들보다 더 많이 똑똑하다는 오만함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리고 멍청했던 시절에는 그 감정을 제대로 숨기지도 않았지요. 하지만 대학에서 만난 선배님들과 친구들은 저를 비웃거나 비아냥거리지 않고 농업 그리고 자연에 대해 무지했던 저에게 농업에 대한 소신과 열정, 식물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온몸으로 표출하고 저를 동참시키는 방법으로 제 생각을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바꿔주었습니다. 다 함께 하는 실습시간에 흙냄새가 싫다고 울먹이고 짜증을 내던 오만하고 이기적이었던 저를 손가락질하지 않고, 다 그러면서 크는 거라며 더 많이 실습포장에 데려가고, 제 두 손에 삽을 쥐어주고, 싫다고 우겨도 경운기에 밀어 넣어 태우고 다녀주시던 선배님들 덕분에 학부를 졸업하고 석사 과정도 이어가고 박사과정까지 무난히 진학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지금까지 직장을 갖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렇듯 그 해 완벽하게 망쳐버렸던 수능은 제가 생각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문을 열고 나갈 기회를 주었습니다. 꿈꿔보지 않았던 새로운 분야에 대해 공부도 해보고, 원치 않았지만 얼떨결에 들어갔던 대학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나 가정도 꾸리게 되었지요. 주기적으로 만나 인생의 쓰라림과 씁쓸함을 함께 나누는 소중한 친구들, 가끔 보더라고 만나기만 하면 반가운 선배님들, 정기적으로 친목을 도모하고 서로 의지하는 후배들도 다 그렇게 얼떨결에 입학했던 대학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수능을 평소처럼 잘 봐서 여기에 오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아닌 이 학교 못 왔으면 어쩔 뻔했냐 하는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되더라고요.
물론 입학하고 바로 만족했던 것은 아니에요. 수능을 보고 나서 3년 정도는 마음이 완전히 아물지는 않았었습니다. 수능 소식이 들려오면 아무 데나 가서 심술을 부리고 싶기도 했고, 다시 수능을 보는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던 기억이 있어요. 어느 쌀쌀한 밤에는 왜 그 문제를 그렇게 풀어서 여기서 이러고 있을까 하고 울다 지쳐 잠들기도 했지요. 하지만 그 또한 지나갔을 뿐 망쳤던 수능은 제 인생을 망치진 않았습니다.
단 한 번의 시험으로 너무 많은 것이 결정되는 것은 억울하다고 생각했던 시절들도 있었어요. 하지만 시간이 더 오래 지나고 나니 그 한 번의 시험이 내 인생을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순간들이 후회되었습니다. 그 또한 제 인생의 다양한 경험 중 하나일 뿐이고, 나에게 주어진 수많은 기회 중 하나였을 뿐이며, 그 한 번에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하기에는 19살의 나이는 어리고 제 인생을 길었습니다.
그리고 인생을 돌고 돌아 원하는 방향으로 가게 되는 걸까요. 할아버지께서는 한의학 서적을 보고, 한약을 달여 치료를 하셨다고 했어요. 그리고 저는 식물을 배우면서 식물을 추출하고 유용 성분을 뽑아 효능을 분석하고 사람들에게 유용한 식물소재를 개발하는 업을 직업으로 삼게 되었지요. 짧았지만 생약 회사에서 한방원료를 추출하고 생약제제를 개발하는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한의대는 가지 못했지만 조금 다른 방법으로 할아버지께서 하셨던 일을 이어하게 되었어요. 직진으로 갈 수 있었지만 조금 돌아갔을 뿐 지나고 나서 돌아보니 원하는 방향을 향해 걷고 있었고 조금 아프고 힘들긴 했지만 그 과정마다 소중한 추억을 쌓으면 성장해왔습니다.
이제 또 찬바람이 불고, 또 다른 학생들은 수능시험과 대학입시를 준비하고 있겠지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말이 평소처럼 해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순간에 평소처럼 하는 평정심을 갖기에는 19살은 아직 많이 어리고 마음이 불안정한 시기 아닐까요. 저 또한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수능을 앞둔 학생들에게 평소처럼 하면 된다는 말을 할 수는 없지만 이 말은 전하고 싶습니다.
수능이 중요한 것은 네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첫 번째 관문이 될 수 있기 때문이야. 그래서 최선을 다해야 하지. 하지만 그 결과가 반드시 네 최선에 대한 증명은 아니야. 그저 우리가 마주칠 수 있는 수많은 결과 중 하나일 뿐이지. 수능이 네 인생의 모든 것을 결정하지는 않고, 그저 방향을 정하는 수많은 관문 중 하나일 뿐이란다. 우리는 가끔 한 번에 원하는 방향으로 시원하게 가지도 하지만, 때로는 뜻하지 않게 아주 많이 돌아가기도 해. 그리고 가끔은 내가 원했던 방향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가기도 한단다. 하지만 인생은 그 순간에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면 시간의 차이일 뿐 결국엔 내가 가장 행복한 방향으로 가게 되더라. 때로는 정신없이 지나왔는데 돌아보니 너무 행복했던 시간들도 있어. 수능시험의 결과가 어떻건 우리는 또 많은 기회를 만나게 되고 많은 선택을 해야 하지. 그러니 그 과정과 결과를 너무 두려워하지 말고, 너무 실망하거나 좌절하지도 말고 그저 최선을 다한 후에는 주어진 결과에 맞춰 최고의 선택을 하면 된단다. 결과를 알 수 없기에 인생은 늘 두렵고 무섭지만, 누구나 공평하게 결과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재미있기도 해. 더 많은 것들을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져야 하는 진짜 네 인생의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하는 것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아줌마가 살아보니까 수능 그거 망쳐도 그 후에 잡을 수 있는 수많은 기회가 또 있더라. 두려움과 긴장감으로 스스로를 작아지게 만들지 말고 피할 수 없으니 즐기자.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