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을 쌓아 깊어가는 맛
지난 주말에는 진짜로 겨울을 떠나보내는 의미로 평양냉면을 먹고 왔습니다.
슴슴한 국물이 이상하게 입맛을 당기는 평양냉면은 개인적으로 가장 많은 추억이 담긴 음식이에요.
황해도에서 태어나 625 전쟁 때 국군으로 지원하여 참전하셨던 저희 외할아버지는 냉면을 참 좋아하셨습니다. 황해도에 사실 적에는 가마솥에 육수를 우려 추운 겨울밤 내내 차게 식힌 다음 기름기를 걷어내고 여기에 동치미 국물을 얹은 냉면 육수에 뚝뚝 끊기는 메밀면을 말아드셨는데 그게 그렇게 맛있었다고 하셨어요. 야간 출출하고 할 일은 없고 심심한 겨울밤, 외할머니가 냉면을 살짝 말아주시면 그게 그렇게 맛있고 고맙고 참 그 재미가 있었다며 얘기해주시곤 하셨지요. 저희 외할아버지는 식성이 좋으셔서 대식가로 유명하셨는데, 음식 솜씨가 좋은 외할머니와 함께 사셔서 매일 맛있는 것만 드셔서 그런가 어떤 음식에도 이건 참 맛있다 하시는 법이 없으셨고, 심지어는 두 그릇을 뚝딱 드시고도 그저 먹을만했다고만 평가하실 정도로 맛에 대한 표현이 야박하셔서 외식 때마다 저희 아빠를 서운하게 하셨었지요. 그런데 황해도에서 드시던 냉면 얘기를 하실 때에는 정말 눈도 반짝이시고 다양한 수식어를 붙어 설명해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모두 황해도 분이셨는데, 딱히 북한 음식이라고 무언가를 해 드셨던 기억은 없지만 외갓집에서 먹던 냉면은 항상 평양냉면식으로 슴슴한 육수에 툭 끊기는 메밀 면발로 먹었던 기억이 있어요. 그 덕분에 저도 평양냉면을 참 좋아합니다.
대식가였던 외할아버지와는 달리, 외할아버지의 형님이신 큰외할아버지는 미식가로 유명하셨습니다. 젊으실 적에는 사업차 서울을 왔다 갔다 하시면서 유명한 식당을 자주 다니셨다고 하셨어요. 큰외할아버지는 식성이 상당히 까다로우셔서 함부로 외부 음식을 드시지 않았고, 커피 하나를 드실 때에도 좋아하시는 브랜드가 아니면 입도 대지 않으셨어요. 그래서였는지 큰외할아버지와는 함께 식사를 할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여름날 어쩌다 보니 외할아버지, 큰외할아버지 그리고 저만 한 상에서 식사를 할 일이 있었어요. 그 날의 메뉴가 냉면이었는데, 외숙모께서 연로하신 어르신들이 걱정되어 면을 잘라드리려고 한 순간 큰외할아버지가 누가 면에 가위를 대고 먹냐며 큰소리를 내셨어요. 큰외할아버지는 까다로우시다는 친척 어른들의 얘기와는 달리 제가 볼 때는 늘 말도 없으시고 볼 때마다 고양이 밥만 주시던 분이라 그렇게 큰소리를 내시는 모습을 처음 봐서 오랫동안 그 장면, 그 날의 그 상차림, 그리고 그 후로 조용히 셋이 냉면만 먹던 그 어색함이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당시 17살의 저는 이제 막 맛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알아가던 차였고, 식성에 허세가 생기기 시작할 무렵이라 큰외할아버지가 미식가로 유명하시다던데 아 냉면은 가위로 자르지 않고 먹어야 하는 거구나. 그게 냉면이구나 가위로 자르지 말고, 소리도 내지 말고 조심스럽지만 우아하게 면을 집에서 요렇게 오물오물 먹으면 되는 거겠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할아버지들과 함께 냉면 한 그릇을 비워냈었어요.
그때 기억이 있어서일까요? 필동의 유명한 평양냉면 집에 들렀을 때 중절모를 쓰고 오신 어르신들을을 뵙고는 마음이 먹먹해지더라고요. 저희 외할아버지도 서울 나들이를 가시거나, 황해도민 모임이 있으시거나, 어디 근사한 곳을 가실 때에는 중절모를 쓰셨거든요. 벚꽃이 피는 화사한 4월이 외할아버지 생신인데, 언젠가 제가 생신 선물로 드린 중절모가 너무 마음에 드신다며 활짝 웃으시던 기억이 함께 떠오르면서 마음이 시큰해졌었습니다.
살아계실 때 더 많이 물어보고, 더 많은 얘기를 들었어야 했는데 외할아버지가 계실 때에는 막상 외할아버지의 인생사에 대해 잘 여쭤보지 못했어요. 625 참전으로 국가유공자이신 외할아버지는 그때 본인 여동생도 공산당 간부에게 시집을 갔었고, 아내의 오빠들도 모두 공산당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를 지지하셔서 남한군에 지원하고 전쟁에 참전하셨습니다. 아내와 아이도 있는데 어떻게 그런 결심을 하셨던 건지도 더 자세히 들었어야 했는데 어려서는 그 의미를 잘 몰라 제대로 여쭤보지도 못했네요. 외할아버지는 전쟁 중 서울 어느 마을을 지나던 중에 우연히 예전에 한동네 살던 분이 자네 아내와 아이가 지금 피난을 내려와 요 동네에 머물고 있다네 하고 알려주셔서 외할머니와 다시 재회하셨다고 해요. 외할아버지가 너무 덤덤하게 얘기해주셔서 아 뭐 나라가 좁으니까 지나가다가 누구 만나면 알려주고 그랬나 보다 하고 그냥 넘겼는데, 전쟁 다큐나 영화를 볼 때마다 아 우리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다시 만나신 것은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고, 그 덕분에 엄마가 태어나고 나도 태어날 수 있었구나 싶어서 뭉클하곤 해요. 그때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심정은 어떠셨는지 더 자세히 여쭤보고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새겼어야 하는데, 어린 마음에 다들 그렇게 살았는가 보다 하고 그냥 넘긴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전쟁 스트레스가 커서 그랬는지 다시 재회한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사이에는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고 해요. 더 이상 자식을 볼 수는 없겠구나 싶을 무렵 9년 만에 찾아온 아이가 바로 저희 엄마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렇게 어렵고 귀하게 태어난 우리 엄마가 낳은 첫 번째 아이이자 외할아버지의 첫 번째 손주였지요. 그래서 저를 참 귀여워해 주셨습니다. 어려서는 목마를 자주 태워주셔서 사진이 많이 남아있고, 키가 작은 제가 학교에서 제일 작을까 봐 제 고등학교 입학식에도 오셔서는 몰래 저 보다 작은 아이가 몇 명이나 있나 세어보시고는 우리 손녀가 그래도 학교에서 3번째로 작다고 우리 손녀보다 작은 애가 두 명이나 더 있으니 우리 손녀는 작은 것도 아니라며 소문내고 다니시던 것도 생생합니다.
12살 무렵이었던 것 같아요. 외할버지 생신과 사생대회가 겹쳐서 외할아버지 생신 잔치에 못 간 적이 있었어요. 그때 엄마와 남동생은 외갓집으로 가고, 저랑 아빠가 집에 남아서 제 사생대회를 준비했었는데요, 그때 아빠가 고기를 사 와서 육수를 우려 냉면을 해주시던 것이 생각납니다. 왜 갑자기 냉면을 해주셨는지는 모르겠어요. 외갓집에 못 가는 대신 외갓집에서 자주 먹던 것을 해주려고 하셨을까요? 어쨌거나 그 날의 냉면은 육수를 오래 내어 진하게 냈는데도 이상하게 맹맛이었고, 엄마가 없어서 그런가 그 맛이 안 나네 하면서 아빠와 함께 투덜거리며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사실 냉면 육수는 고기로만 하는 게 아니라 동치미 국물이 섞여야 하는데 아빠가 그걸 몰랐던 것 같아요. 그 사생대회에서는 장려상을 탔어요. 외할아버지 생신도 빼먹고 나갔는데 1등을 하지 못해서 침울했는데, 외할아버지가 그래도 황해도민 손주 중에는 네가 1등이니까 1등인 거다! 하고 용기를 북돋아주셨지요. 그 후로 종종 1등이 아닐 때에는 그래도 아마 황해도민 손주 중에는 내가 1등이니까 1 등인 셈 치자! 하고 혼자 몰래 힘내곤 했어요.
성격도 중요하지만, 입맛이 맞는 사람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도 참 중요합니다.
대학시절부터 교제한 남편과는 입맛이 대부분 잘 맞는 편인데요, 그중에서도 특히 평양냉면처럼 슴슴한 음식을 좋아한다는 점이 특히 잘 맞습니다. 저희가 함께 대학을 다니던 시절에는 칡냉면, 세숫대야 냉면이 유명했었어요. 가위 없이는 먹기 힘든 쫄깃한 냉면 면발과 매콤한 다진 양념을 풀어 매콤 달콤하게 먹는 세숫대야 냉면은 친구들과 힘든 실험을 마친 후 피로를 달래주는 좋은 피로회복제였습니다. 그런데 저희 둘은 이 매콤한 냉면은 맛있긴 하지만, 이것을 물냉면이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물냉면이라 함은 자고로 하얗고 멀건 국물에 대충 끊으면 끊기는 면발을 꼭꼭 씹을수록 퍼져 나오는 그 메밀향이 합쳐져서 내는 그 맛이 있기 때문이다! 하고 우기곤 했지요.
어제 남편과 함께 능라도에서 평양냉면을 먹으면서 문득 옛이야기를 했습니다. 결혼하기 전 날 평양냉면에 제육을 잔뜩 먹었던 기억을요. 저희가 결혼할 무렵, 남편과 저는 성남과 서울에서 근무하고 있었고 결혼은 충북 청주에서 했습니다. 토요일 결혼을 위해 금요일 오전에 잠깐 출근해서 업무 정리만 하고 청주로 내려가던 중, 가는 김에 예전에 어머님께서 일하셨던 수원 평양냉면 집에 한 번 가보지 않겠냐고 해서 들렸어요. 내려가는 길에 가볍게 면요리나 먹으려고 했다가 평양냉면은 국물까지 싹 해치우고 제육은 야무지게 상추까지 싸서 싹싹 먹고 내려갔던 기억이 새록새록 났습니다. 결혼 전에는 결혼식에 맞는 드레스 없을까 봐 그렇게 조마조마했었는데, 바로 내일이 결혼인데도 무슨 생각에 그렇게 싹싹 먹어치웠는지 몰라요. 아마 결혼 전에 가장 배불리 먹었던 신부였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날 냉면이 참 맛있고, 상추까지 내어주는 푸짐한 제육도 기가 막히게 맛있었어요.
평양냉면 집에서는 돼지고기를 얇게 썰어낸 것을 제육, 소고기를 얇게 썰어낸 것을 수육이라 합니다. 돼지고기는 따끈하게 먹어야 제맛이라 알고 있었는데, 요 차갑게 나오는 제육이 냉면과 함께라면 굉장히 매력적으로 변해요. 꼭꼭 씹으면 씹을수록 고기와 비계의 고소하고 녹진한 맛이 베어 나와 육수, 그리고 메밀향과 잘 어울립니다. 물론 녹두와 돼지고기를 갈아 뜨끈하고 고소하게 부쳐낸 녹두전과 숙주, 돼지고기 그리고 두부로 담백한 맛을 자아내는 평양만두도 평양냉면과 잘 어울리는 찰떡궁합이지요.
결혼하고 첫 번째 여름의 어느 날, 시부모님과 함께 평양냉면을 먹으러 갔습니다. 저는 저희 외갓집에서는 가장 큰 손주이기 때문에 늘 누나이고 언니니까 어른스러워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을 받곤 했었는데요, 막내이신 시아버님의 막내아들과 결혼하고 나니 집안의 가장 어린 어른이 되었지요. 서른이란 나이에도 시댁에서는 굉장히 저를 아기처럼 봐주셨는데요, 그래서인지 시부모님께서 요즘 애들은 이런 슴슴한 냉면 안 좋아하던데 괜찮은지 신경을 많이 써주셨어요. 하지만 냉면이라 함은 무릇 메밀로 만든 평양냉면이 으뜸이니 천천히 먹어보면서 적응해야 한다며 메뉴 선택권을 주진 않으셨지요. 그런데 원래 이런 평양냉면을 좋아하던 터라 거침없이 씩씩하게 한 그릇 뚝딱 비우고 식성에 대해 인정받았던 추억도 있습니다.
평양냉면을 판매하는 가게도 많고, 가게마다 묘하게 다 다른 맛을 냅니다. 그런데 저는 어느 가게를 가더라도 저만의 평양냉면 먹는 방법이 있는데요, 일단은 아무것도 더하지 않고 국물 맛을 본 다음, 면만 건져서 먹어보고, 그다음에는 면을 먹고 국물을 더 먹은 다음에 꼭꼭 씹어서 육수와 어우러지는 면의 향의 느껴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는 고기 한 점을 싸서 같은 방법으로 육향과 메밀향 그리고 육수의 감칠맛을 느껴보지요. 그 후에 겨자를 넣거나, 식초를 넣거나 하는데요, 가끔은 아무것도 넣지 않고 한 그릇을 다 비워내기도 합니다.
입으로 먹지만, 코로 느껴야 마무리되는 몇 가지 음식들이 있다고 생각해요. 저에게는 평양냉면이 그렇습니다. 천천히 꼭꼭 씹을 때 코로 느껴지는 구수한 메밀향을 느끼면 제가 어른이 된 것 같기도 하고, 그리운 추억이 한껏 올라오는 것 같기도 하고, 이렇게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음미하면서 먹는다는 여유도 느끼곤 합니다. 그리고 젓가락을 내려놓으면서 역시 난 황해도민의 손녀야! 하고 마무리하곤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