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레오나르도 다 빈치, '모나리자'
어떤 작품이 너무나 유명하면 오히려 그 작품의 진가를 알아보기 힘들게 된다.
이 말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만큼 딱 들어맞는 작품이 있을까. 이 작품을 르네상스 미술 수업 시간에 마주했을 때 정말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콩알만 한 시절부터 수없이 마주했던 이미지였지만 정작 단 한 번도 이 작품을 주의 깊게 살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작품은 너무도 유명한 나머지 우리가 궁금해 할 틈을 주지 않는다.
<모나리자>를 루브르 박물관에서 실제로 만날 행운을 얻은 독자도 있겠지만, (나는 가보지 못했다) 이 작품을 보기 위해 먼 길을 왔을 관람객들에게도 <모나리자>는 그 모습을 쉽게 내보여주지 않는다. 방탄유리로 겹겹이 싸여 있는데다가, 그 앞을 둘러싼 수많은 인파 때문에 관람객들 뒤통수만 구경하다 왔다는 사람들도 있다.
이렇게 미술작품계의 ‘슈퍼스타’들을 마주할 때면 늘 마음 한 켠에서 의구심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 작품은 대체 왜 이렇게까지 유명한 걸까? 무엇이 그렇게 대단한 걸까? 더불어 나처럼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을 쉽게 떨쳐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런 생각도 들 것이다. 이 작품은 얼마 정도 할까? 대체 어떤 사람이 이런 작품을 소유하고 있을까? 이 글에서는 <모나리자>의 유명세를 한꺼풀 벗겨내고, ‘당연하지 않은’ 그림을 바라보듯 궁금증을 풀어나가려 한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 <모나리자>는 현재 파리 루브르 박물관의 소장 작품이다. 박물관 소장 작품이기 때문에 되팔릴 가능성이 거의 없어 값어치를 책정하는 것이 어렵지만, <모나리자>는 역사상 가장 높은 보험료를 지불했다는 기네스 기록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1962년 12월 기준 1억 달러였고, 현재 물가 기준으로는 8억 1000만 달러, 한화로 9,136억 원 정도이다) 그 값어치는 상상 초월이다. 그런데 애초에 <모나리자>가 어떻게 루브르 박물관에 들어가게 되었을까?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이탈리아 사람인데 말이다. 미술품이 작가의 고향을 떠나 다른 곳으로 떠나게 되는 데에는 수많은 배경이 있다.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전쟁을 통한 약탈인데, 조금 후에 소개할 ‘빈센초 페루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착각한 것과 달리 <모나리자>는 레오나르도가 프랑스에 올 때 제 손으로 챙겨온 후 그대로 프랑스에 남은 것이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술의 나라’하면 프랑스를 떠올린다는 것을 생각하면 프랑스 사람들은 프랑수아 1세(Francis Ⅰ, 재위기간 1515~1547)에게 고마워해야 할 것이다. 프랑수아 1세는 프랑스 르네상스를 이끈 왕이자, 프랑스 왕실 컬렉션을 시작하여 훗날 루브르 박물관의 토대를 만들었으며, <모나리자>를 프랑스로 가져오게 한 인연을 만든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 전성기를 꽃피우고 있을 무렵 프랑스의 왕들은 이탈리아 미술에 완전히 반해있었는데, 특히 프랑수아 1세는 레오나르도를 만나고 그의 재능에 단박에 빠져버렸다. 그래서 이 왕은 레오나르도에게 파격적인 연금을 제시하며 그가 프랑스에서 말년을 보내도록 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레오나르도는 3년 후 프랑스에서 생을 마치게 되고 그가 이탈리아에서 가져온 <모나리자>와 <암굴의 성모> 등의 걸작도 그대로 프랑스에 남게 되었다. 프랑수아 1세는 레오나르도가 프랑스에 남긴 작품을 모조리 구입하여 프랑스의 왕실 컬렉션의 시작을 알렸다.
왕이나 교황과 같이 권력을 가진 통치자가 문화와 예술에 애정을 갖고 조예가 깊은 사람이라는 건 정말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나 근대 이전에는 대부분의 예술작품이 의뢰(commission)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권력과 자본을 가진 이들이 당대의 훌륭한 예술가를 알아보고 대접하는 환경이 조성되면 당연히 예술가들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역량을 꽃피울 수 있게 된다. 의뢰의 목적이 순수하게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든, 자신의 부나 가문의 명예를 과시하기 위해서였든 간에 말이다. 다빈치나 미켈란젤로와 같이 몇 세기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하는 거장들이 동시대에 한꺼번에 등장한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다.
<모나리자>는 이후 몇 세기 동안 프랑스 궁전에 보관되어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다가,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며 함께 제기된 ‘왕실 컬렉션은 민중의 재산이다’는 주장에 따라 드디어 19세기에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많은 부호들이 루브르 박물관을 후원하면서 박물관과 그 안에 전시된 작품들의 유명세도 점점 올라갔지만, <모나리자>가 지금의 ‘슈퍼스타’가 된 것은 1911년에 일어난 시끌벅적한 도난 사건 때문이었다.
1911년 8월 22일 아침, 화가 루이 베루드가 루브르 박물관을 관람하던 중 <모나리자>가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웃긴 사실은 그림이 사라지고 루이가 발견할 때까지 24시간이 넘도록 아무도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박물관의 관리가 허술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모나리자>가 20세기 초까지도 지금만큼의 대중의 관심을 받지는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아무튼 그때부터 박물관을 폐관하고 국경을 봉쇄하는 등 급히 수사를 진행했지만 2년 동안 그림의 행방은 감감무소식이었다. 그 과정에서 시인 아폴리네르와 화가 피카소가 용의선상에 오르기도 하는 등 사건은 세간의 관심을 끌었고, 특종을 찾는 신문 기자들의 좋은 소재가 되었다.
2년이나 지난 1913년 12월, 피렌체 미술상 알프레도 제리에게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도난 작품을 내가 갖고 있고, 화가가 이탈리아인이니 이 작품을 내 나라 이탈리아에 돌려주는 것이 꿈이다’는 내용의 편지였다. 이 편지의 주인공은 루브르 박물관에서 유리공으로 일했던 빈센초 페루자였다. 빈센초는 ‘빼앗긴’ 걸작을 고국에 되돌려주면 자신이 영웅이 될 것이라 생각했나보다. 아무튼 이 편지의 내용이 사실인지 확인하러 동행한 우피치 미술관장은 작품이 진품인 것을 확인하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이탈리아와 프랑스 양국 간의 복잡한 상황으로 인해 빈센초에 대한 처벌은 7개월로 흐지부지 끝났지만, <모나리자>는 루브르 박물관에 돌아와 4cm 두께의 방탄유리와 이전보다 훨씬 치솟는 대중의 관심을 동시에 얻게 되었다.
<모나리자>는 1911년의 도난 사건으로 지금의 과한(?) 관심과 인지도를 얻게 된 것이 사실이다. 엄청난 기대를 품고 간 관람객들에게 간혹 실망을 안겨주기도 한다는 이 아담한 사이즈의 초상화는, ‘명화’하면 떠오르는 상징 혹은 전형처럼 여겨지기까지 한다. 이처럼 미술작품의 값어치나 인지도가 꼭 작품의 내재적 가치에 따라 결정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 예전의 내게는 굉장히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미술품이 ‘예술성’이라는 틀 속에서 고고히 자리를 지키고 서있는 것보다, 사람들 인생살이에 이리저리 부대끼며 예측하지 못한 가치나 역사성을 지니게 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지금은 오히려 재미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해서 <모나리자>가 얻는 인기가 아예 터무니없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모나리자>는 그 유명세 때문에 그 묘한 아름다움을 맞닥뜨렸을 때의 충격이 무뎌진 안타까운 케이스인 것 같다. <모나리자>를 30초 이상 가만히 바라본 경험이 있는가? 피렌체의 부유한 상인의 아내 리자 게라르디니(조콘다 부인)의 초상으로 알려진 화면 속 여인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부드러움에 빨려들어갈 것만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든다. ‘극사실주의 세밀화’를 그리는 사람들도 여럿 보았고, 심지어는 사진이라는 매체가 존재하는데도 이 여인의 미소는 오묘한데, 이제 막 ‘도상화’된 인물 표현에서 벗어나 사실적이고 개인적인 인물의 묘사를 보기 시작한 당대인들이 느꼈을 충격은 어떠했을까? 아마 당시 이 그림을 본 사람들에게는 옆으로 움직이면 그림 속 여인의 눈동자도 자신을 따라 움직일 것만 같은 소름 끼치는 경험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모나리자의 미소에서 이러한 오묘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레오나르도가 사용한 스푸마토(sfumato)라는 기법의 영향이 크다. 스푸마토란 이탈리아어로 ‘흐릿한’, ‘자욱한’이라는 뜻으로, 의도적으로 윤곽선을 흐릿하게 만드는 기법이다. 특히 사람의 표정을 결정짓는 눈꼬리와 입 가장자리의 묘사가 압도적이다. 올라갈 듯 말 듯한 오묘한 입 가장자리와 그 주변의 피부 표현이 만질 수 있을 것처럼 생생하면서도, 붓으로 그렸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부드럽고 자연스럽다. 또 팔걸이 위에 조심스레 얹은 손과 손가락의 피부표현, 그리고 대기원근법을 사용하여 뒤로 갈수록 자욱해지는 풍경묘사가 이 여인을 더욱 신비롭게 한다.
내 평생 한 번이라도 방탄유리와 수많은 인파 없이 이 그림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는 날이 올까? 너무 유명해서 그 아름다움을 모니터 스크린으로밖에 만끽할 수 없다는 것이 <모나리자>의 비극이다.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