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조지아 오키프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한동안 미국의 화가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 1887-1986)의 작품에 푹 빠져 있었다. 서양 미술의 모더니즘을 이끈 화가들의 이름은 굳이 익히려 하지 않아도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었는데, 조지아 오키프라는 이름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이름만큼이나 그의 그림도 첫눈엔 조금 생소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곧 그 그림들에 순식간에 빠져들게 되었다. ‘매혹적’이라는 수식어가 정말 잘 어울리는 그림들이었다.
그의 그림이 나 뿐만 아니라 당시 관객에겐 더욱 신선한 충격이었던 이유는 그림의 소재와 표현 방식, 그리고 색채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꽃의 한 부분을 과감하게 확대하여 화면 가득 채우고, 당시 남성 화가들이 잘 쓰지 않았던 분홍빛 계열의 색채를 마치 수채화처럼 부드럽고 오묘하게 표현한 시리즈로 유명하다. ‘여성적’ 특징이 다분히 드러나는 이 시리즈는 주류 미술사에 편입되지 못하고 한동안 주변부에 머물렀지만 한 세기가 지나도 시들지 않는 매력으로 보는 이를 유혹하며 재평가되고 있다.
‘난 완전히 새로워지는 중이야. 내가 이제껏 했던 모든 것을 집어던졌어.
그것들 중 어떤 것도 또 다시 집어 들지 않을 거야. 영원히는 아니더라도 어쨌든 오랫동안 그렇게 될 거야.’
1915년 친구 애니타 폴리처에게 보낸 편지 中
오키프는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의 대학과 기관에서 미술교육을 받았다. 유럽에서 태동한 모더니즘이 아직 미국에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던 시절, 그는 미술학교에서 아카데미 화풍의 그림을 배우며 상업디자이너나 미술교육자의 길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던 중 당시 알프레드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 1864-1946)가 뉴욕에서 운영하고 있던 291 갤러리에서 열린 유럽 모더니즘 작가들의 작품을 접하게 되고, 위 편지에 적은 것처럼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그림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그러다 오키프의 그림이 스티글리츠의 눈에 들어, 그가 오키프의 작업을 291 갤러리에 전시하고 그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하면서 오키프는 전업 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알프레드 스티글리츠는 본인 역시 ‘미국 근대 사진의 개척자’로 불리는 선구적인 사진가이면서 뉴욕에서 화랑을 운영하는 갤러리스트이자 잡지 발행인, 컬렉터였다. 그가 차린 291 갤러리는 세잔, 마티스, 피카소 같은 유럽 화가들을 미국 전역에서 거의 최초로 소개했던 모험적인 갤러리였다.
스티글리츠는 수세기 동안 미술가들을 지배해 온 “미술은 이러해야 한다”는 제약 아래서 꿈틀거리며 균열을 일으키던 모더니스트들을 옹호하고 적극적으로 소개했다. 따라서 아직 한 번도 전시해보지 못한 무명의 오키프의 목탄 소묘 몇 점에서 그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를 위해 전시를 기획하고 적극적으로 홍보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키프와 스티글리츠의 관계는 단순한 아티스트와 갤러리스트의 관계에서 더 나아가 연인, 뮤즈, 그리고 부부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그들이 맺은 보다 내밀하고 특별한 관계는, 결과적으로 오키프에게 득이 되기도, 실이 되기도 했다.
291 갤러리에서 단체전과 개인전을 열면서 전업 화가의 길로 들어선 오키프는 1918년 뉴욕으로 이주하고, 그 무렵 관계가 깊어진 스티글리츠와 곧바로 동거를 시작했다. 스티글리츠는 오키프보다 스무살 이상 연상이었고, 아내와 딸도 있었지만 몇 년 후 이혼하고 오키프와 재혼했다.
이러한 스티글리츠와의 관계는 그 자체만으로 세간의 이목을 끌었지만, 평생 오키프를 따라다닌 부당한 이미지에는 또 다른 원인이 있었다. 사진작가이기도 했던 스티글리츠가 약 20여 년간 카메라에 담았던 300점 이상의 오키프의 흑백사진이 그것이다. 오키프의 신체 부위를 극적으로 확대한 사진 속 오키프는 단호하고 굳건한 얼굴을 하고 있기도 하고, 은밀하고 관능적인 모습을 하고 있기도 했다.
사랑 받는 연인으로서 그가 스티글리츠에게 내밀한 모습을 보여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또한 예술가의 동반자로서 스티글리츠의 작품 세계에 공감하고 동참한 것일 뿐이다. 하지만 세간에 발표된 그 사진들이 오키프의 이미지를 한정 짓고, 나아가 그의 작품들까지 단정지어버린 것은 예술가 오키프에겐 불행한 일이었다.
대부분의 대중과 평론가들은 오키프의 꽃 그림들을 농염한 성적 암시로 읽어내곤 했다. 심지어는 스티글리츠가 나서서 이러한 관점으로 오키프의 작품을 설명하기도 했다. 오키프가 늘 그 평가에 대해 부정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한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억울했을지 짐작이 간다.
‘사람들은 꽃을 보고 여러 가지를 연상합니다. .... 하지만-어떻게 보면-사람들은 꽃을 보지 않아요-제대로-꽃은 너무 작고-우리는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습니다-내가 본 것을 그리겠다-내가 느끼는 꽃을 그리겠지만 꽃을 크게 그려서 사람들이 놀라서 한참 동안 꽃을 바라보게 하겠다고.’
한편 스티글리츠와 함께 한 뉴욕에서의 삶도 양면성이 있었다. 스티글리츠를 통해 만나게 된 뉴욕의 예술가 그룹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배웠지만, 동시에 오키프는 이 도시에서 극심한 고독감과 우울감을 느꼈다. 스티글리츠와의 결혼 생활에서 점점 갈등이 깊어졌던 것도 그 고통에 한몫 했을 것이다.
결국 1929년부터 오키프와 스티글리츠는 서서히 각자의 길을 향해 멀어지게 된다. 1929년부터 1949년까지 오키프는 매년 6개월씩 뉴욕을 떠나 뉴멕시코를 비롯한 미국 서부를 여행하며 고독 속에서 그림을 그렸다.
개인적으로 이 시기의 그의 그림이 참 좋다. 사랑하지만 자신을 외롭게 하는 사람들과, 화려하지만 억압적인 시선으로 가득한 도시를 떠나 광활한 자연 아래 홀로 서 있을 때의 고독과 환희가 동시에 느껴지는 그림들이다. 부드럽고 환상적인 꽃을 그려내는 오키프도 정말 좋아하지만, 거친 바위와 동물의 뼈를 강렬하게 그린 작품에선 때로 경외감까지 느껴진다.
전쟁 등 여러 사정으로 291 갤러리를 닫고, 인티메이트 갤러리(Intimate Gallery)를 새로 운영하던 스티글리츠도 1929년 무렵 새로운 장소에 ‘아메리칸 플레이스(An American Place)’라는 이름으로 갤러리를 다시 열었다.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 이 갤러리는 ‘미국’의 현대미술, 사진작가들을 집중적으로 알리고 홍보하는 곳이었다.
앞선 두 갤러리에서 유럽의 미술을 소개하여 모국의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던 그가 ‘아메리칸 플레이스’를 세우고 죽을 때까지 그곳에 헌신한 것은, 결국 ‘미국의 예술가’를 위한 토양을 만들겠다는 평생의 신념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각자의 길을 걸으면서도 그들의 연이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오키프는 매년 겨울이 되면 외지에서 작업한 결과물을 들고 스티글리츠에게 돌아왔다. 스티글리츠는 오키프가 아닌 다른 여인과 만나던 와중에도 194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거의 매년 오키프의 작품을 자신의 갤러리에서 전시해주었다. 비록 예전처럼 열렬히 사랑하던 사이는 아니었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변함없이 서로를 믿었던 예술적 동반자였다.
평생에 걸친 특별한 인연으로 맺어진 이 두 인물의 이야기를 통해 ‘인연’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살아가면서 좋은 인연을 만나는 것은 한 사람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동시에 한 번 맺은 인연을 쉬이 끊어버리기란 참 어려운 것이다. 오키프와 스티글리츠 역시, 무명의 작가와 갤러리스트로 만나 연인과 부부로 발전했다가 다시 예술적 동반자의 관계로 돌아가는 깊고 긴 인연의 과정 속에서 상처도 받고, 손해도 보면서 가끔은 서로를 자신의 인생에서 ‘삭제’하고 싶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 지나고 보면 우리 예술 애호가들에겐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그들의 인연을 통해 형성된 삶의 굴곡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걸작들을 남겼는가를 돌이켜보면 말이다.
참고자료
책 <조지아 오키프>, 리사 민츠 메싱어, 엄미정 옮김, 시공아트.
MetMuseum - Alfred Stieglitz (1864–1946) and His Circ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