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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mily Chae Apr 15. 2020

길 잃은 이미지 시대의 예술가

Toby Ziegler (토비 지글러)

1994년 런던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 예술대학을 갓 졸업한 Toby Ziegler는 회화 작업에 굉장한 회의감을 느껴 한동안 작업을 중단할 정도였다. 당시 그가 느꼈을 감정은 아마 동시대 작가 누구나 느꼈을 막막함이었으리라. 선배 화가들이 수 세기에 걸쳐 이룩해놓은 것들을 물려받은 동시대 작가들에겐 그 어떤 창의성이나 새로운 표현도 지난날의 반복이나 클리셰에 지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얼마 후 다시 작업을 시작한 Toby Ziegler는 3D 프로그램으로 사물을 모델링하거나 때로 포토샵이나 구글링을 통해 이미지를 다루는 방식에 몰입하게 된다.


tbc, 2019, Oil on aluminium. Private collection.


 먼저 최근 몇 년간의 회화 작업을 살펴보면, 그는 주로 잘 알려진 고전 명화(위 작품의 경우 앵그르의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1808))를 골라 컴퓨터 작업을 통해 픽셀화한다. 그리고 이를 알루미늄 패널에 유화로 그린다. 매우 공들인 수작업이다. 그 다음에는 표면을 사포로 가차없이 긁어내 이미지를 간신히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남긴 후, 그 위에 다시 물감을 칠한다. 무작위적인 선일 때도 있고, 엉성한 격자무늬일 때도 있다. 그렇게 완성된 작업은 언뜻 추상화처럼 보이기도 하고 빛이 바라고 얼룩이 묻은 사진처럼 보이기도 한다. 

Failed study for a ouija board (4), 2017, Oil on aluminium and oak panel. Private collection.


 그는 이렇게 ‘손상된(damaged)’ 혹은 ‘완성되지 않은(unfinished)’ 이미지에 매력을 느낀다고 말한다. 디지털 시대에 우리가 마주하는 이미지들이 대부분 그렇기 때문이다. 누구나 쉽게 방대한 양의 이미지를 접할 수 있는 시대에 이미지들은 ‘데이터화’되어 여기저기서 차용되고, 패러디되고, 복제되며 떠돌아다닌다. 그 과정에서 이미지는 서사(narrative)를 잃고 결국엔 ‘보이지 않게’ 된다. 우리는 그렇게 마주한 이미지에 주관적인 해석과 기능을 불어넣고, 이는 다시 인터넷 세계로 돌아가 데이터가 된다.


Failed study for a ouija board (3), 2017, Oil on aluminium and oak panel. Private Collection.


Toby Ziegler의 작품은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를 복제하고 기계적으로 재현한 앤디 워홀을, 혹은 이미지를 흐릿하게 재현하여 작품에 대한 판단을 의도적으로 열어둔 게르하르트 리히터를 떠올리게도 하지만, 이렇게 새로운 세대가 이미지를 마주하는 과정을 시각화하는 방식은 그만의 고유한 것이다. 그는 스스로를 길 잃은 이미지들을 걸러내는 ‘체(sieve)’로 상상하며, 걸러낸 것들을 디지털 작업으로 모델링한 후 섬세한 수작업으로 재현한다. 그리고 이는 캔버스나 나무 패널이 아닌, ‘꽤 동시대적으로 느껴지는 재료’인 알루미늄 패널 위에 그려지는 것이다.


Self portrait as a Klein bottle, 2017, Pteg plastic, aluminium rivets.


그의 조각 작업도 매체는 다르지만 그 맥락은 상통한다. 평면 이미지를 3D로 모델링하여 생긴 각각의 픽셀들을 투명 플라스틱 패널로 제작하여 이어 붙인다. 혹은 점토를 고리 모양으로 층층이 쌓아 올려 사람이나 사물의 형태를 재현한 다음, 이를 3D 프린터로 다시 복제한다. 3D 프린터의 원리 역시 모델을 얇은 수평 단면으로 쪼개어 층층이 쌓아올리는 방식(coiling)이므로, 최종 결과물은 여러 층위의 단면들의 복합체인 셈이다. 



Toby Ziegler의 작품은 친숙한 이미지에서 출발하지만 그 결과물은 낯설고 비인간적이며 이질적이다. 그러나 이 작품들 앞에 선 관람자는 길 잃은 이미지들이 재현되는 과정을 가만히 들여다보게 된다. 생소하지만 사실 우리가 매일 무의식적으로 마주하고 있는, 낯익은 것들이다.


Self-portrait as reclining nude II, 1927, 2017, Cast aluminium.


글/ Emily Chae


사이먼 리(Simon Lee) 갤러리에서 제공하는 CV, 작가 소개와 국내 PKM 갤러리의 전시 자료, 그리고 2012년 PORT 매거진, 2017년 Arturner에서 진행한 작가 인터뷰를 참고하였습니다. Private collection 외 작품 이미지 출처 모두 사이먼 리 갤러리.  https://www.simonleegallery.com/artists/toby-zieg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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