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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밀리 Mar 26. 2023

도스토옙스키보다 트랄파마도어 행성이 필요한 이유

커트 보니것 『제5도살장』(1969)

도스토옙스키보다 트랄파마도어 행성이 필요한 이유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인 1945년 2월 13일, 독일 동부의 드레스덴에는 연합군이 투하한 포탄이 비처럼 쏟아졌다. 3일 동안 이어진 폭격으로 ‘엘베강의 피렌체’로 불릴 정도로 아름다웠던 도시는 순식간에 폐허로 변했다.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무려 13만 5천 명의 목숨을 앗아간 공습 현장에 작가 커트 보니것도 있었다.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혀 있던 그는 폭격 당시 고기 저장고에 내려가 있었던 덕분에 운 좋게 살아남았지만, ‘모두 죽임을 당하고 있었다’(p.221)라는 표현처럼 대학살을 눈앞에서 목격했고, 생존자로서의 트라우마는 평생을 따라다녔다.


충격과 고통으로 얼룩진 참전 경험에 관해 쓰는 일은 양날의 검이다. 전쟁이 끝난 뒤 보니것은 드레스덴의 경험을 글로 쓰려고 했지만 23년간 쓸 수가 없었다. 참극을 글로 옮기는 일이 고통의 ‘씻김굿’도 되지만 동시에 너무 아픈 ‘되새김질’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5도살장』의 1장에서 보니것(소설에서 화자 ‘나’로 등장)은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한 줄도 쓰지 못했던 이유를 밝힌다.     


이 변변찮은 책이 돈과 불안과 시간이라는 면에서 나에게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르게 했는지 말하기는 싫다. 23년 전 제2차세계대전의 전장에서 집에 돌아왔을 때는 드레스덴 파괴에 관해 쓰는 게 쉬울 것으로 생각했다. 그냥 내가 본 것을 전하기만 하면 되니까. 게다가 걸작이 되거나 적어도 큰돈은 손에 쥐게 해 줄거라 생각했다. 주제가 워낙 거대하니까. 그러나 그때 내 마음에서는 드레스덴에 관한 말이 별로 나오지 않았다…. 기억과 팰맬 담배만 남은 늙은 등신이 된 지금도 말이 별로 나오지 않는다. (p.p. 14~15)     


‘말이 별로 나오지 않았다’가 바로 그가 오랜 세월 동안 드레스덴에 관해 글을 쓰지 못한 이유다. ‘거대한’ 주제라서 작가에게는 탐날 수밖에 없는 이야깃거리지만, 쓰기 위해서는 떠올리고 기억해야 했다. 폭격의 밤에 관해 쓴다는 것은, 그날 밤을 다시 한번 경험해야 하는 일이었음을 그는 알았다.


쓰고 싶었지만 차마 쓸 수 없었던 이야기. 보니것은 이 이야기를 『제5도살장, 혹은, 소년 십자군 : 죽음과 억지로 춘 춤 (Slaughterhouse-Five, or, The Children's Crusade: A Duty-Dance with Death)』이라는 긴 제목을 달아 마침내 세상에 내놓았다. 『제5도살장』이라고 알려진 바로 그 소설이다. 원제를 그대로 살렸더라면 더 좋지 않았겠느냐는 생각이 든다. 제목이 책의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소설 속으로 들어가 긴 제목의 의미를 생각해보겠다.      


‘제5도살장’으로 가는 길 (메타픽션과 분절 기호)      


‘제5도살장’은 살육의 전쟁 상황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지만, 보니것이 전쟁 포로로 일했던 드레스덴의 도살장 이름이다. 드레스덴에 관해 쓴다는 것은 바로 이 지점, ‘제5도살장’으로의 귀환을 의미하는데 보니것이 택한 서사 방식은 특이하다. ‘본 것을 전하기만 하면 된다’라고 마음을 먹지만, 전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메타픽션’ 형식을 선택했다.


메타픽션은 ‘픽션 속의 픽션’, 즉 주인공이 작품 속 세계가 픽션임을 인지하는 소설을 가리킨다. 오랜 세월 쓸 수 없었지만,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드레스덴에 대해서 써보겠다는 소설 속 화자 ‘나’는 1장에 등장해서, 자신이 쓸 소설의 얼개를 얘기한다.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끝내겠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2장부터는 그가 구상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소설 속 소설이다. 화자 ‘나’로 시작한 소설은 2장부터 마지막 10장까지는 ‘빌리 필그림’이라는 주인공에 대한 관찰자 시점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빌리의 이야기가 바로 ‘나’, 즉 커트 보니것의 이야기인데, 굳이 빌리라는 주인공을 따로 내세워 소설 속 소설의 세계를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게다가 ‘나’는 5장의 포로수용소 병원 장면에서처럼 뜬금없이 빌리 앞에 등장하기도 한다.     


빌리 옆의 한 미국인은 뇌만 빼고 전부 배설해버렸다고 울부짖었다. 잠시 후 그가 말했다. “그것도 나가네. 그것마저 나가.” 뇌 이야기였다. 그렇게 울부짖은 게 나였다. 바로 나. 이 책의 저자. (p. 160)

    

‘나’의 경험을 빌리의 경험으로 쓰는 이유는, 공중에서 끊임없이 투하되던 포탄들처럼 떠올리기 싫은 기억들이 ‘나’를 덮쳐 올 때, 그 자리에 대신 세워 둘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즉 화자인 ‘나’는 빌리가 필요하다. 빌리는 ‘나’의 심리적 총알받이다. 23년 전의 기억을 되살려 글을 쓰면서, ‘나’를 타자화하는 메타픽션 서술 형식을 택한 것은, ‘나’가 대학살의 트라우마에서 여전히 놓여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와의 거리두기를 위해 보니것이 택한 또 하나의 장치는 혼란스러울 정도로 많이 쓰고 있는 ‘***’다. 나와의 거리두기는 결국 ‘드레스덴’과의 거리두기인데, 아무리 거리를 두어봤자, 이야기를 마치려면 그곳까지 가야 한다. 그런데 빌리의 기억은 쉽게 그곳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의 기억은 ‘***’에 의해 자주 분절된다. 분절된 기억들 속에서 빌리는 수시로 다른 시간대의 공간들로 이동하고 이것은 또 다른 분절을 일으킨다. 이어지는 문단이 앞의 문단과 다른 시간대의 경험을 서술하는 경우는 허다하다.


원제 아래에 ‘정신분열증적인 방식으로 다룬 소설’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는 것처럼 ‘***’는 ‘나’이자 ‘빌리’의 정신분열 상태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열어보고 싶지 않은 기억 저장고로 다가가는 퀼트적 접근방식이다. 빌리는 한 번에 훅 다가가서 드레스덴의 서랍을 열지 않는다. 그런 충격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대신에 ‘***’ 를 이용해서 참전의 기억을 전후의 기억과 섞는다. 논리로 설명이 안되는 부조리한 전쟁상황처럼, 군데 군데 흩어져 있는 포탄의 파편처럼, 빌리의 기억은 드레스덴으로 수렴하기 위해 산발적인 기억 분열을 먼저 겪는다. 분절과 분절의 연속, 수 많은 ‘***’를 지나고 나서야 빌리는 드레스덴에 도착한다. 번역본으로 총 265쪽인 소설에서 184쪽에서야 모습을 드러낸 드레스덴. 상상하기 힘든, 말로는 표현이 안되는 끔찍한 기억을 소환하는 일이 얼마나 두렵고 힘든 일인지 우리는 빌리의 주저함을 통해 알게 된다.     

 

죽음과 억지로 춘 춤      


원제에 들어 있는 ‘죽음과 억지로 춘 춤’. 무슨 의미일까. 소설에는 죽음의 장면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모두 단문으로 덤덤하게 서술되어 있다. 그리고는 끝에는 꼭 이런 말이 붙는다. ‘뭐 그런 거지(So it goes)’.     

 

시트를 덮은 늙은 남자의 주검이 바퀴 달린 침대에 실려 지나갔다. 남자는 한창때는 유명한 마라톤 선수였다. 뭐 그런 거지. (p. 64)
스폿이라는 이름의 개가 있었지만, 죽었다. 뭐 그런 거지. (p. 84)
68일 뒤 드레스덴에서 총살대가 쏜 총알로 그의 훌륭한 몸에는 구멍이 잔뜩 뚫리게 된다. 뭐 그런 거지. (p. 110)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당하거나 죽었다. 뭐 그런 거지. (p. 138)     


‘뭐 그런 거지(So it goes)’는 시간 여행이 선사한 달관과 초월의 표현이다. 소설 속 소설의 주인공 빌리 필그림은 ‘필그림’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시간 여행자’다. ‘시간에서 풀려난’ 그는 1955년에 살다가, 다시 1941년으로 가기도 하고, 다시 1963년으로도 간다. 심지어 자신의 출생과 죽음도 여러 번 경험한다.


테드 창의 단편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는 빌리의 시간 개념은 지구인의 시간 개념이 아니다. 트랄파마도어 행성에 사는 외계 생명체들에게 납치되는 경험을 한 이후로 빌리는 그들처럼 시간을 본다. 그에게는 과거, 현재, 미래가 순차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쭉 뻗은 로키산맥을 한눈에 보듯이’ (p. 112) 각기 다른 시간대가 함께 동시에 존재한다.


‘미래의 기억’(p. 189)이라는 모순된 표현도 그래서 가능하다. 전우 에드거 더비가 등장하는 장면마다 ‘결국 총살당하는 에드거 더비’라고 쓴다든지, 연설 중 암살당하는 자기 죽음에 대해서도 ‘나는 잠시 죽을 때입니다’라고 무심하게 표현하는 것 모두 새로운 시간 개념 안에서는 가능한 일이다.


 수시로 넘나드는 시공간 속에서 빌리는 테이프 되감기로 반복해서 보듯 아는 사람들의 죽음을 너무 자주 본다. 그들의 죽음에 익숙해진다. 슬프지도 새롭지도 않다. 그들이 다른 시간대에는 살아 있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죽음은 별스러운 것 없는 이벤트다. 죽음이란 한눈에 들어오는 로키산맥 어느 지점에 다른 삶의 경험과 함께 존재하는 하나의 경험일 뿐이다. 죽지만 다른 시간대에서는 살아 있으므로 특별한 의미도 갖지 않는다. 그래서 빌리는 끔찍한 죽음이든, 편안한 죽음이든, 심지어 무생물의 죽음(모순되는 말이긴 하지만)이든, 모든 죽음의 끝을 ‘뭐 그런 거지(So it goes)’로 완성한다. 죽음은 그에게 케이크 한 조각을 먹는 일처럼 가볍다.


화자인 ‘나’가 빌리 필그림을 시간으로부터 ‘풀려나게’ 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죽음의 현장에 대한 기억을 순화시키는 자기 방어기제의 발동이면서, 동시에 전장과 드레스덴에서 목격한 끔찍한 죽음들을 초현실의 공간에 두는 ‘나’의 특별한 애도다. 외계의 시간 개념에서는 죽음이란 것이 이토록 가벼우며 실제로는 죽지도 않는 것인데, 왜 그토록 죽음을 슬퍼해야 하는지 냉소함으로써, ‘나’는 전쟁터에서 목격한 수많은 끔찍한 죽음의 기억을 중화한다. 죽음은 이제 함께 춤을 출 수 있을 정도로 가벼워진다. ‘죽음과 억지로 추는 춤’이 완성된다.      


소년 십자군     


1장에서 ‘나’는 전쟁의 기억을 보완하기 위해 전우 버나드 V. 오헤어와 재회하는데 그의 아내 메리가 드레스덴을 소재로 소설을 쓰겠다는 ‘나’에게 한 마디 던진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쓰지 않을거죠. 그렇죠.”(p. 28)


질문으로 던진 이 한마디는 사실상 이제 갓 어린 아이티를 벗은 소년 병사가 전쟁터에서 얼마나 끔찍하게 죽어 나가는지 그 실상을 묘사하는 소설로는 쓰지 않을 것 아니냐는 비난에 더 가깝다. 전쟁은 어른들이 하는 것 같지만, 막상 피와 살점이 튀는 전장에서 총을 들고 싸우는 사람들은 어린아이티를 막 벗은 소년병들이다. 그들이 어떤 처참한 죽임을 당하던지 상관없이, 대부분 전쟁소설은 스티븐 크레인의『붉은 무공훈장(Red Badge of Courage)』에서 볼 수 있듯이 영웅을 탄생시키며 끝나고 영웅담 안에서 어린 소년들의 피는 잊힌다. 메리는 소년병 대신 영웅이 등장하는 책과 영화에 대한 비판을 이어간다.      


틀림없이 아이가 아니라 어른이었던 척할 거예요. 영화라면 프랭크 시내트라와 존 웨인, 아니면 다른 매력적이고 전쟁을 사랑하는 추잡한 늙은 남자들이 두 사람을 연기하겠죠. 그럼 전쟁은 그냥 멋지게 보일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전쟁을 또 많이 하게 될 거예요. 그리고 그 전쟁에 위층에 있는 애들 같은 어린아이들이 나가 싸우게 되겠죠. (p. 29)    

 

기껏 해봤자 전쟁 영웅 이야기나 쓸 것 아니냐는 메리의 힐난에 화자 ‘나’는 이렇게 답한다.    

  

내 명예를 걸고 말하는데, 거기에는 프랭크 시내트라나 존 웨인이 말을 역은 없을 겁니다. 이렇게 하죠. 거기에 ‘소년 십자군’이라는 제목을 붙이겠습니다. (p. 29)     


소설의 제목에 ‘소년 십자군’이 들어간 이유를 설명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환기하면서까지 이 소설을 쓰게 되는 작가의 책임이 느껴지는 장면이다. 그의 다짐처럼 소설에는 존 웨인이 역을 맡을만한 영웅이 등장하지 않는다. 아이처럼 무기력한데다 전쟁 후유증에 평생 시달리는 빌리 필그림이 주인공이고, 그의 주변에 있던 군인들도 빌리 나이 또래의 철없는 아이들이다. 유일하게 나이 많은 ‘더비’라는 인물은 고작 찻주전자 하나 훔쳐 나오는 바람에 총살당한다. ‘소년 십자군’이라는 제목에는 자신들이 누구에 의해서 어디로 내몰렸는지도 모르고,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죽어간 어린아이들에 대한 애도의 마음이 들어 있다.      


평화롭게 사는 법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한참 지난 시점에 나온 이 소설을 그저 참전 경험이 있는 한 작가의 뒷북치는 이야기라고 접어두지는 못할 이유가 있다. 소설이 나온 시점은 미국의 베트남전 참전이 한창이던 1969년이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도 교훈을 얻지 못한 인류가 또다시 마련한 전쟁터로 소년병들이 내몰리고 있던 때였다. 전쟁의 참상을 직접 겪은 보니것은 전쟁을 습관처럼 하는 사람들에게 경고하기 위해서라도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만 그는 고통스러운 역사적 기억을 덜 아프게 소환하기 위해 SF라는 형식을 빌렸다. SF는 보니것식 경험 재가공법이자 다른 방식으로 비틀어 써 내려간 ‘사실적’ 이야기다. 빌리와 함께 정신 병원 침상에 누워 있던 로즈워터의 말처럼, 세계대전을 겪으며 정신 분열을 일으킬만한 부조리를 경험한 전후세대에는 도스토옙스키의 사실적 묘사보다는 트랄파마도어라는 외계 행성에서 내려다본 지구의 전쟁 이야기가 더 위로될지도 모를 일이었기에.


하지만 놀라운 것은, 어울리지 않는 상황의 배치와 부조리한 말들, 그리고 혼란스러운 시공간의 이동 속에서도 우리는 주인공의 기억을 따라가며 전쟁을, 드레스덴의 그날 밤을 상상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하룻밤 사이에 ‘달의 표면’(p.221)이 되어버린 한 아름다운 도시와 그 도시에서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영문 모를 끔찍한 죽임을 당했던 수많은 사람들. 그들을 떠 올리며 우리는 보니것식의 무덤덤한 서사에서 고통을 읽어내고, 눈물 한 방울조차 없는 이야기에서 차오르는 슬픔을 느낀다. 결국 우리는 빌리 필그림이 트랄파마도어 행성인들에 한 질문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한 행성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겁니까?” (p. 150)


커트 보니것『제5도살장』(1969)  정영목 옮김, 문학동네, 2020(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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