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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밀리 Apr 19. 2023

심심한 이야기를 읽으며 울다

손톤 와일더 『우리 읍내』 (1938)

심심한 이야기를 읽으며 울다


3막으로 구성된 손톤 와일더의 희곡『우리 읍내』는 단순하고 심심하다. 우선 특별한 무대 장치가 없다. 무대감독이라는 해설자가 들어와서 좌우에 각각 식탁 하나와 의자 세 개를 놓고, 벤치 하나를 추가하면 1막이 시작된다. 2막은 여기서 벤치를 없애면 되고, 3막은 공동묘지를 나타내는 의자 열두 개만 두면 된다. 내용도 무대 장치만큼 심심하다. 극적인 긴장감이 없다. 무대감독은 2막에서 극의 내용을 이렇게 정리한다.


첫째 막이 일상생활이었다면, 이번 막은 사랑과 결혼입니다. 다음에 또 한 막이 있습니다. 무슨 얘기가 될지 짐작하시겠죠? (p. 59)


그의 말대로 이 극은 한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생활, 사랑과 결혼, 그리고 죽음에 관한 이야기다. 소박한 무대 장치에 모두 다 아는 이야기. 서두에 ‘단순하고 심심하다’라고 쓴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심심한 이야기에 어쩐 일인지 눈물이 났다. 90년 전 초연된 연극의 대본일 뿐이며 연극 무대를 직접 본 것도 아닌데 말이다. 살면서 놓친 것들이 생각났고, 놓치고도 몰랐던 어리석음이 후회스러웠고, 그런데도 또 계속 어리석게 살아갈 것 같은 허무함 때문에 마음속으로 눈물이 번져갔다.      


텅 빈 무대     


잘 연출된 연극을 직접 감상할 때보다 그 연극을 희곡으로 접할 때 우리는 스스로 연출가가 된다. 해설을 읽으며 나무 한 그루 배치하고 또 읽으며 그 옆 어딘가에 벤치를 놓아둔다. 극작가가 벤치 색을 특정하지 않으면 마음대로 노란 벤치도 두고, 갈색 벤치도 둔다. 그런데 해설에 ‘텅 빈 무대’라고 되어 있으면 어떻게 될까. 『우리 읍내』의 제1막 도입 부분을 읽어 보자.


막도 장치도 없다. 관객이 입장해서 볼 수 있는 건 희미한 조명에 텅 빈 무대뿐이다. 이윽고 무대감독이 모자를 쓰고 파이프를 문 채 들어와 앞 무대 좌우에 각기 식탁 하나와 의자 세 개씩을 놓는다. 그리고는 웹 씨네 집이 될 곳 모퉁이에 낮은 벤치 하나를 놓는다. (p. 16)     


누구라도 연출 할 수 있을 단출한 무대. 2,642명의 사람이 사는 미국 뉴햄프셔주 작은 마을 그로버즈 코너즈의 이야기라고 하는데, 지역적 특색을 나타낼만한 소도구 하나 없이 무대는 텅 비어 있다. 신문팔이 소년은 가상의 신문을 이 집 저 집으로 던지고, 우유 배달 아저씨는 가상의 말에다 가상의 시렁을 달고 우유병을 넣는다.


수잔 와이즈 바우어는 『독서의 즐거움』에서 ‘연극이 TV보다 잘할 수 있는 것은 상상하는 일이다’(p. 432)라고 했다. 세트는 물론이고 소도구까지 섬세한 연출 아래 배치된 TV 드라마와는 달리, 공간적 제약이 더 강한 연극무대는 독자의 상상력으로 메워야 하는 부분이 많다. ‘여기가 해변이오’하면 해변을 상상해야 하고, ‘도서관이오’ 하면 책으로 빼곡한 책장을 무대 안에 들여놓아야 한다. 상상력이 하는 일은 흥미롭다. 관객마다, 독자마다 각기 다른 해변과 도서관이 탄생하니 말이다.


텅 빈 무대에 소도구는 극도로 제한된『우리 읍내』야말로 상상 속 연출로 마음껏 풍부해질 수 있는 텍스트다. 식탁 하나와 의자 셋이 놓인 무대는 ‘지금 내가 발붙이고 사는 곳’이 되기도 하고, 그 의자에는 웹 가족이나 깁스 가족 대신 우리 가족이 앉아 있기도 한다. 거시적 관점에서 우리 인간은 한 주소에 사는 사람들이다. 극 중 리베카와 조오지의 대화를 보자.


(리베카) 제인이 아플 때 목사님이 편지 보낸 얘기 안 했지? 봉투에 주소가 말이야. 제인 크로포트, 크로프트 농장, 그로버즈 코너즈 읍, 싸튼 군, 뉴햄프셔주, 미합중국
(조오지) 그게 뭐?
(리베카) 들어 봐, 아직 아냐. 미합중국, 북미 대륙, 서반구, 지구, 태양계, 우주, 하나님의 뜻. 주소가 이랬다니까.  (p. 58)  


어느 수준까지만 다르지 결국은 ‘지구, 태양계, 우주, 하나님의 뜻’이라는 동일 주소에 우리가 거주하는 것처럼, 우리 각자의 인생도 약간의 변주만 있을 뿐, 다 같은 이야기가 아닐까. 인간의 삶을 3막으로 쓰라면 결국 태어나서 자라고, 사랑하고, 죽는 이야기가 될 터이니 말이다.


한 마디로『우리 읍내』는 나의 이야기이면서 너의 이야기이며, 잠시 식탁 의자에 앉았다가 곧 떠나게 되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 빅 히스토리의 관점에서는 곧 존재의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을, 먼지 한 톨만도 못한 존재가 인간일진대, 우리는 왜 찰나의 순간에도 이념 다툼을 하고 전쟁을 일으킬까. 나와 한 식탁에 앉아 있는 이들을 아낌없이 사랑해주는 일만으로도 벅찬 시간이 아닐까. 이 극의 텅 빈 무대가 전하는 메시지다.

     

내일이 있을 것처럼 우리는     

  

1, 2, 3막에 골고루 비중 있게 등장하는 인물은 에밀리다. 1막에서 학교에 다니고 2막에서 앞집에 살던 조오지와 결혼한 에밀리는 3막에서는 죽는다. 무덤 안으로 사라지기 전에 이승에서의 한때를 선택해서 다시 돌아가 보는 시간을 잠시 갖게 되는데, 그녀가 선택한 시간은 열두 살이 되던 생일날이다.


1899년 2월 11일 화요일이라는 구체적 시간 속으로 다시 돌아간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꽃같이 젊은 엄마의 바쁜 모습이다. 곧 영원히 떠나야 할 시간이 다가옴을 알기에 에밀리는 애틋하게 엄마를 안아 보지만, 엄마는 음식 만들기에 정신이 팔려 에밀리와 눈도 한 번 마주칠 시간이 없다.


1막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등장하는데 누군가 자기를 좋아할 것 같으냐는 에밀리의 사춘기 소녀다운 질문에 엄마는 ‘얘, 피곤하다. 그만해라. 문제없대도 그러니. 가서 그릇이나 가져와’(p. 44)라고 답한다. 에밀리는 자신의 말을 흘려듣는 엄마 때문에 속상하지만, 엄마는 눈치채지 못한다. 콩 껍질 벗기는 일을 마무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두 장면에서 엄마가 무성의하게 보이는 이유는 그녀가 딸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지금 당장은 콩 껍질 벗기는 일, 생일상 차리는 일이 더 급하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내일 들어주면 되고, 정답게 눈 마주치며 얘기하는 것도 내일 하면 된다.


그런데 만일 내일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항상 내일의 시간도 우리 것이라는 착각 속에 산다. 하지만 만일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면 콩 껍질 벗기기보다는 딸의 눈을 한 번 더 쳐다볼 것이고, 한 번 더 안아 볼 것이며, 사랑한다는 말을 눈을 감는 순간까지 할 것이다.


에밀리는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는 내일로 미룬 채 ‘바쁜 오늘’로만 가득했던 삶을 돌아보며 후회한다. 그리고는 이승에 애틋한 이별을 고한다.

     

너무 빨라요. 서로 쳐다볼 시간도 없어요. ......
몰랐어요. 모든 게 그렇게 지나가는데, 그걸 몰랐던 거예요. 데려다주세요. 산마루 제 무덤으로요.
아, 잠깐만요. 한 번만 더 보고요.
안녕. 이승이여, 안녕. 우리 읍내도 잘 있어. 엄마 아빠 안녕히 계세요. 째깍거리는 시계도, 해바라기도 잘 있어. 맛있는 음식도, 커피도, 새 옷도, 따뜻한 목욕탕도, 잠자고 깨는 것도.
아, 너무나 아름다워 그 진가를 몰랐던 이승이여, 안녕. (p. 117)


‘살면서 자기 삶을 제대로 깨닫는 인간이 있을까요? 매 순간마다요?’라는 에밀리의 말처럼, 우리는 삶의 순간순간이 소중함을 잊고 산다. 지금, 이 순간 우리 곁에 있는 평범한 행복을 알아보지 못하고, 멀리서 특별하고 화려한 행복을 찾는다. 에밀리처럼 묘지로 들어가야 하는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평범했던 순간들이 모두 특별한 행복이었음을 깨닫게 될까.


『우리 읍내』는 진정한 의미의 ‘카르페 디엠’이 무엇인지 말해주는 작품이다. 지금 우리 읍내에, 나의 옆에, 누가 있는지 돌아보자. 5분만, 아니 1분 만이라도 온 마음을 다해 그 사람에게 집중해보자. 건성으로 흘려들을 때는 미처 몰랐던 예쁜 표정을 보게 되고, 숨은 마음도 읽게 될 것이다. 나중에 하리라고 미뤄뒀던, ‘고마워’, ‘사랑해’도 오늘 해 보자.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오늘을 사는 일, 오늘을 충만하게 하는 마법이다.  


 손톤 와일더 『우리 읍내』 (1938), 오세곤 옮김, 예니, 2013(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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