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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mily Jan 06. 2021

나란 경상도 녀자여,

(1/3) 고마우면 고맙다고 말해

새해 카운트다운을 하고 며칠이 지났다.


주구장창 며칠 내내 혼자 핸드폰으로 예능을 보며 낄낄거리고 있던 신랑이 갑자기 스스로가 한심하다며 이제 예능을 끊어야겠단다. 새벽 운동을 다녀와선 보통 아이들의 동선과 반대로 움직이던 신랑이 아침산책을 가자고 했다. 아이들을 단단히 입히고 이틀 연속으로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우중충한 날씨였지만 아이들은 엉덩이를 씰룩 거리며 뛰어다녔다. 아직 겨울잠에 들어가지 않은 뛰어다니는 다람쥐들도 보고, 안전한 공터에서 술래잡기도 했다. 이따금씩 막내가 황당한 이유로 삐쳐 땅바닥에 앉아 입을 씰룩거리고 있으면 아들이 가서 눈을 마주치며 '오빠가 도와줄까?' 하고 다정하게 물어봤다. 머릿속에 저장해 두고 싶은 순간이었다. 


아이들은 낮잠도 잘 잤고 밥도 잘 먹었다. 점심, 저녁을 다 먹고 신랑이 스스로 고무장갑을 꼈다. 보통은 설거지를 하면 '이건 저렇게 하지, 저건 이렇게 했어야지- 이거 챙기지, 저거 챙기지' 잔소리가 많은데 이번엔 아무 소리도 않고 설거지를 했다. 여전히 싱크대에 물은 흥건했고 어떻게 정리해줘야 할지 몰라 씻기지 않은 그릇들은 꽤 있었지만 군소리 않고 무언가를 해내려는 움직임이 고마웠다. 


어른 두 명이 열심히 움직여 열심히 쓸고 닦고 먹이고 씻고 해도 할 일은 줄어들지 않았지만 요 며칠만큼은 나 혼자 아등바등하는 기분이 아니었다. 그거면 되었다.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괜히 민망해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어제 오늘 열심히 움직이네? 아빠가 열심히 같이 놀아주니까 애들이 엄청 좋아하네..." 

여기까진 입을 뗐는데 딸아이가 다가와 칭얼댔다. 결국 고맙다는 말은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놈의 애교 없는 나란 경상도 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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