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틀랜드로 떠나기 전
몇 년 전 평소 좋아했던 탤런트 김자옥 씨의 별세 소식을 접한 후 비싼 큰 여행 가방을 갑자기 지른 적이 있다. 인생 별거 있나 지금을 즐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일반적인 소비 범주를 벗어난 그 행위는 사실 그때 저지르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못 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 번쯤 그럴 때가 있다. 뜻하지 않은 뉴스를 접한 후 마음의 바람이 휙 몰아칠 때 미루고 있던 일을 결정하게 되고 의미를 두지 않던 하루하루에 큰 뜻을 부여하게 된다. 그리고 나선 다시 일어서게 된다.
나를 어디론가 데려다 놓아야 할 시기임을 직감한다. 글도 잘 써지지 않고, 오후에는 진료할 때 몸이 힘듦을 자주 느낀다. 잠시 현재에서 떠나야 할 시점이라고 몇 달 전부터 경고하지만 날아오는 경고장들을 다 받아들일 순 없는 노릇이다.
딸의 '화이트 코트 세리머니'에 참가하러 미국의 오리곤 주(Oregon), 포틀랜드에 갈 일이 생겼다. 경고장을 받아들일 좋은 기회가 왔다. 그런데 한의원을 하면서는 여행 가기 전에 즐거운 마음보다 항상 마음이 무겁다. 며칠 동안 한의원을 비운다고 내 인생이 무너질 것도 아닌데 대진 원장을 두고 가는 게 계속 마음에 걸리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이런 걱정들을 할 필요가 없었다는 걸 알게 되지만 여행전 정해진 수순처럼 이 과정을 어김없이 밟게 된다.
몇 년 전에 사놓은 빨간색의 여행 가방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때의 마음을 되살려 본다. 소중하고 값진, 그리고 함께하는 추억을 만들려고 주저 없이 샀다는 것을 잊을 리가 없다. 꼭 유명인의 슬픈 소식을 접해서가 아니라 시간의 흐름이 나의 흐름을 추월한다는 것을 느끼는 요즘은 중요한 것, 우선 순위를 놓치고 싶지 않다.
어떤 분이 내게 물었다. 아이들 만나러 미국 가면서 한의원을 자주 비우면 괜찮냐고. 나는 일초의 주저함도 없이 괜찮다고 한다. 물론 금전적인 문제와 환자 관리 차원에서는 괜찮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손해들을 다 감수하고 나의 역할을 한의사에서 엄마 모드로 바꾸고 나면 걱정이 사라지는 걸 느낄 수 있다.
아이들의 엄마, 반려견 순이의 엄마, 주부로 살 때는 내 일을 참 하고 싶었다. 아이들은 종종 말했었다. 자기들을 위해서 엄마가 희생하고 있다고. 그건 희생이 아니라 나의 선택이었고, 옳은 선택이었으며 지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지금은 또 일 때문에 놓치는 게 많다. 사람은 어떤 선택을 하던지 누군가의 이해와 배려가 필요하며 가끔은 갈팡질팡하고 옳은 선택이었는지 방황하게 되는 모양이다.
마음속에 묵혀 두었던 감정의 풍선이 펑 터지듯 산 여행 캐리어를 보면서 더 미루지 말고 비행기 표를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지금의 선택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면서, 더 이상 미루지 않는 인생을 살아보리라 마음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