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엠마 B Jun 20. 2022

불교 신자는 아닙니다만

기도하러 왔습니다.

어렸을 때 불교신자인 부모님을 따라 절 구경을 자주 하러 다녔다. 해인사, 동화사, 갓바위, 수덕사 같은 전국의 유명한 절에 다니는 걸 좋아했었고, 나는 기도를 하러 가기보다는 산속에 들어가 있는 사찰이 주는 엄숙함과 조용함, 그리고 벽에 그려진 불화와 금색의 불상들을 보는 게 신기하고 좋았다. 부모님이 대웅전에서 108배를 하시는 동안 나는 마루에 걸터앉아 절에 온 사람들과 바삐 걸어 다니는 스님들을 구경했다. 두 손을 모으고 대웅전을 향해, 혹은 석탑을 향해 입을 다문 채 서서 절을 하는 모습들에서 간절함을 발견하곤 했었다.


불교신자가 아닌 나에게 단지 관광지처럼 여겨지던 절은 절박할 때 언젠가부터 찾아가는 곳이 되었다. 교회에 가서 기도해본 적이 없고 성당에도 가본 적이 없어 어렸을 때 부모님 따라다녔던 절에서 편안함을 느꼈고 언제든지 찾아갈 수 있기에 가끔 가곤 했다. 


떠들고 웃고 카메라를 눌러대는 사람들일지라도 조심하는 태도가 보였고, 기도 하러 온 사람들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웃지도 찌푸리지도 화가 난 표정도 아닌 무표정한 얼굴들에서 느껴지는 불자들의 진지함이 관광객들을 차분하게 만들고 있었다.


며칠 전 갑자기 강화도 석모도에 있는 보문사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 신정 때 교통체증으로 인해 집에서 보문사까지 4시간이나 걸린 악몽이 있기에 일요일 아침 일찍 출발하기로 했다. 부슬비가 내리는 일요일, 오전 7시로 향하는 시계를 보며 나는 보문사로 향했다. 


머릿속에 가득 찬 생각들로 인해 새로운 기억이 생성되지 않은 경험을 했다. 두 달 전에 내가 했던 말을 아무리 기억하려고 해도 기억해 내지 못했다. 직원이 나에게 "원장님이 그렇게 하라고 해서 하고 있는데요." 내가 내린 새로운 지시사항을 나는 모르고 있었다. 나는 분명하고  정확하고 틀림없고 확실하게 기억하는 사람이다. 시각적 기억력도 좋아 한번 본 것은 나중에라도 기억을 잘하는 편이다. 그리고 내가 한 말은 더더구나 기억을 못 한 적이 없었다. 


기억들이 모여있는  커다란 성벽에 조그마한 구멍이 났을떄는  메꾸기가 쉽지만 천둥번개가 치고 억수 같은 비가 내려 성벽이 무너지면 빨리 복구하기가 어렵다. 일단 태풍이 지나가고 날이 잠잠해져야 주변에 널브러진 쓰레기 더미들을 치우고 무너진 돌을 모아 다시 쌓아 올릴 수 있듯이 우리의 뇌도 걱정거리와 잡다한 생각들로 가득 차 있을 때는 기억을 다시 쌓아 올릴 수 있는 일정 기간의 휴식이 필요하다.


천둥번개와 억수 같은 비로 가득 찬 나의 머릿속에 햇빛이 필요하고 복구되기 위한 휴식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기억을 저장하고 내보낼 수 있는 기억 장치들을 다시 가동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마음속에 있는 복잡하고 얽혀있는 일들을 정리하기 위해서 보문사로 나는 가고 있었다.


2시간 만에 도착한 절 입구는 주차장에서부터 오르막길이 시작되었다. 입장권을 끊으려고 걸어가고 있는데, 어떤 여자분이 기도하러 가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자기가 단체 입장권 표를 많이 끊었는데 사람들이 그만큼 오지 않았다면서 '부산에서 온 여행사"라고 말하고  표를 끊지 말고 들어가라고 했다. 감사하다고 말을 한 후 마음속에서 갈등이 생겼다. 혹시 이분이 나를 놀리려고 그러는 걸까? 차라리 표를 끊는 게 낫지 않을까? 긴가 민가, 반신반의하면서 입구에서 표를 받는 분에게 하라는 대로 "부산 여행사에서 왔어요"라고 말했다. 곧이어 일초의 주저함도 없이  " 예 들어가세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절에 들어가기 전부터 행운을 얻은 듯 기분이 좋았다. 그분에게 감사의 인사를 다시 하려고 돌아보니 사라져 버렸다. 절로 올라가는 가파른 오르막길을 우산을 받쳐 들고 가다가 양초를 사러 가게에 들어갔다. 가게 주인이 주황색 우산이 너무 예쁘다고 말씀하신다. 별것 아니지만 못났다고 하는 것보단 좋았다.


절에는 기도하러 오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힘을 줄 작정인지 비가 내리는 촉촉한 공기 속에서 후끈한 온기를 느꼈다. 오늘은 절 구경을 하러 온 게 아니다.  마음 정리와 기도를 하기 위해  강화도 석모도 보문사까지 온 것이다. 양초를 산후 네임펜으로 양초 위에 가족의 이름을 적으며 기도했다.



마애 석불좌상이 있는 눈썹 바위까지 올라가는 계단들은 육체의 고통이 정신적 고통을 잊게 해 주려고 만든 것처럼 느껴졌다. 계단을 올라갈수록 숨이 차고 다리는 무겁게 느껴져 여기까지 온 이유가 생각나지 않을 정도가 되었을 때 눈썹바위에 다 다랐다.


바다가 보이는 높은 곳에 위치한 눈썹 바위와 마애 석불좌상을 바라보며 10분 정도 숨을 돌리면서 여기에 이끌려 온 이유를  마음속 언어로 이야기했다. 해답은 내가 구하는 것, 그걸 얻기 위해 일요일 아침잠을 포기하고 달려 왔다.


눈썹 바위 위에 나의 무거운 눈썹 하나를 올려놓은 것처럼  눈이 환해지면서 크게 떠지는 기분이었다. 항상 우리가 요청해 주길 기다리고 있는 신에게 우리가 뭘 바라고 있는지, 뭘 필요로 하고 있는지, 가야 할 길을 알고 싶을 때 자주 요청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매일매일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열정을 다해 일할수 있도록 요청했다. 

작가의 이전글 대통령과 출퇴근을 같이 해본 사람으로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