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마다 열리는 시장
토요일마다 우리 아파트 주차장에선 장이 열린다. 주변 아파트 주민들 사이에서 우리 아파트 토요장이 꽤나 알려져 토요일은 이른 아침부터 아파트 주민뿐만 아니라 인근에서 온 사람들로 북적거리며 활력을 준다. 토요일은 출근시간이 빨라 아침 8시에 집을 나서고, 퇴근 후 집에 도착하면 오후 서너시가 된다. 오전 8시 이전에는 상인들이 장사를 준비하는 시간이고 오후 3시 이후에는 좋은 물건들은 거의 다 팔리고 남아 있는 야채와 과일들을 사야 하는 시간대이다. 장이 열리기 전 준비하는 시간이나 폐점이 임박한 시간에 장을 볼 수 있기에 구경하는 여유를 누릴수가 없어 아쉬울때가 많다.
토요장은 규모가 커 넓은 주차장을 반으로 나누어 야채가게, 과일가게가 두 개씩 들어온다. 그런데 유독 첫 번째 야채가게는 내가 퇴근했을 때 이미 장을 마감하고 없다. 반면 두 번째 가게는 다른 상인들이 모두 떠난 시간에도 팔지 않은 물건들이 많은 것을 보게 된다. 한 번은 퇴근 후 늦게까지 남아 있는 가게에 가서 야채들을 둘러본 후 고구마와 곰피 물미역을 달라고 했다. 주인은 진열된 고구마 중 가장 비싼 것을 나에게 권하였고, 곰피와 고구마를 에누리 없이 제값을 다 주고 집으로 왔다. 곰피 물미역은 며칠 뒤에 먹기 위해 냉동실에 바로 넣었다.
그 후 시장에서 산 곰피가 생각나 냉동실에서 꺼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물결 모양의 구멍이 숭숭 뚫린 곰피가 아니었다. 내가 산 것은 염장 다시마였다. 가게 주인이 곰피와 다시마를 구분하지 못했을 리는 없다. 곰피가 맞냐는 나의 질문에 주인은 제대로 봤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성의 없이 대답하면서 염장 다시마를 검정 비닐봉지에 넣기 바빴다.
뒤늦게 안 나는 속상했지만 며칠이 지난 일이라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하지만 그 야채가게에서 물건을 다신 사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출근하면서 브로콜리를 사러 토요장에 들렀다. 이른 시간이라 야채들을 박스에서 끄내 진열하느라 바쁜 첫 번째 가게에 갔다. 정리하느라 분주한 주인한테 브로콜리 두 개를 살수 있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실례가 될까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주인은 친절하게 아직 뜯지 않은 박스에서 큰 걸로 두 개 골라 주었다. 그리곤 두 개값을 계산하더니 슬쩍 천 원을 빼 드릴게요 하면서 거스름돈을 건네주었다.
그제야 브로콜리를 산 가게가 일찍 집에 갈수 있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퇴근하면 벌써 다 정리하고 없는 첫 번째 가게의 주인은 물건을 사러 오는 손님들에게 친절할뿐만 아니라 신뢰감을 주면서 호의도 베푸는 분이었다.
그후 나는 이른 시간에 가도 반갑게 맞아 주시는 브로콜리 가게만 이용하고 있다. 가끔 토요일 오후 늦게 산책하러 나가면 알뜰장에 있던 상인들은 거의 다 떠나고 없는 빈 주차장에서 염장 다시마 주인이 짐을 싸는 걸 볼 수 있다. 그때까지 팔지 못한 많은 물건들을 차에 싣는 모습을 보면서 딱하긴 했지만 자신이 뿌린 씨를 거두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건을 파는 일이나 서비스업은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염장 다시마를 판 주인은 손님과의 신뢰를 중요시하지 않았다. 차에서 박스를 다 내리기도 전에 찾아간 나를 반갑게 맞이하며 물건을 꺼내주면서 할인까지 해주던 브로콜리 주인은 고객 한사람 한 사람의 소중함을 알고 있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손님과 신뢰를 쌓아갔다. 그 가게는 번창하면서 더 많은 손님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브로콜리 주인의 얼굴은 밝았고 여유가 넘쳤으며 염장 다시마 주인은 누군가 염장을 지른듯한 얼굴을 한 표정이었다.
한의원을 경영하는 원장의 입장에서는 브로콜리 가게 주인을 닮고 싶다. 모든 환자들에게 친절히 대하고 정성껏 진료하면서 믿음을 줄 수 있는 원장, 환자와의 신뢰가 돈독한 원장이 되는 게 개원한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철학이다.
내가 조금이라도 몸이 안 좋아 말소리에 힘이 없으면 환자들이 알아차린다. 환자는 민감하다. 나의 손끝의 힘, 목소리 하나하나에 신경 쓰고 있다. 나의 밝은 웃음과 목소리가 그대로 환자에게 전달된다는 사실을 안 이후부터 나는 환자를 치료하러 가기 전 나의 스위치를 한의원 모드로 바꾼다. 집안의 일들은 머릿속에서 다 지워버리고 환자를 대하는 원장으로 리셋한다.
한의원을 하면서 침의 효력을 살짝 무시하는 환자들을 보게 된다. 침보다 파스의 효과를 더 높이 사는 환자들을 대할 때는 침을 놓는 걸 주저하게 된다. 환자와 나와의 믿음이 존재해야 치료의 효과를 더 많이 볼 수 있기에 치료 전에 보여주는 환자의 태도에 나의 의지가 반으로 꺾이는 경우가 더러 있다. 서로의 신뢰는 치료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또 어떤 경우에는 '원장님만 믿어요'라고 말하는 환자들이 있다. 그럴 때 나는 어떻게든 그 환자를 낫게 하기 위해 여러 방법들을 궁리하고 정성을 다해 치료를 한다. 이처럼 환자와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믿음이라는 강력한 전파는 서로를 이어주며, 끌어당긴다. 믿음이 환자와 나를 연결해 주고 그 믿음은 나에게 강력한 힘을 부여한다.
내가 토요장에서 첫 번째 야채가게 주인을 찾는 이유는 반갑게 인사하고 기꺼이 할인까지 해주는 주인에게서 밝은 기운을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날 하루를 기분 좋게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선하고 좋은 물건들을 정직하게 팔아야 집에 일찍 갈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약간 손해 보는 듯해도 결국 보상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는 데에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들이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식물들의 씨앗은 곤충에 의해 혹은 바람에 날려 번식을 한다. 우리들의 신뢰 또한 보이지 않지만 입소문이라는 바람을 타고 다른 곳으로 펴져 나갈지도 모른다. 그 번식력은 빠르고 어디로 갈지 모르며, 힘을 가지고 있다. 신뢰라는 씨앗을 퍼뜨리기 위한 추진력은 정직함, 성실함, 열정, 긍정적인 마음가짐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진료를 하루만 하게 될지라도 나는 환자와의 신뢰에 가장 중요한 가치를 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