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탈붙잡기 훈련
호주에 오기 전 말로만 들었던 무시무시한 인종차별 경험담들. 호주는 인종차별이 심하다, 돌을 던진다, 폭력을 행한다, 이상한 얼굴 표정을 대놓고 하며 사람을 무시한다 등등.. 걱정 아닌 걱정을 하고 왔었다. 하지만 첫 셰어하우스에 사는 동안은 별 탈 없이 잘 지내고 있는 중이었다. 되려 사람들은 정말 친절했었고 내가 들었던 인종차별 경험담들이 다 거짓말인가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스터 오빠가 집에 들어오더니 별일을 당했다며 분개했었다. 우리가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니 그는 자초지종 설명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신호등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때마침 버스가 그 앞에 살짝 가리고 서있더란다. 그런가 보다 하고 있었는데 잠시 뒤 버스 맨 뒷좌석에서 창문이 열리더니 십 대로 보이는 여자, 남자 학생들이 어디서 가져온지도 모를 계란을 꺼내선 자기한테 냅다 던진 것이다!
오빠는 당황했고 그 10대 학생들은 낄낄 거리며 대충 너네 나라로 돌아가라, 이런 말을 했으며 마침 버스가 다시 출발을 한 것이다. 그는 열이 받아 ‘ Hey!!!! ‘ 하며 악에 받친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버스는 이미 떠나고 난 뒤였다.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있는데 주변에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그에게 다가왔다고 했다.
“ Are you okay? “
“ You alright mate? “
“ Oh my goodness. They’re terrible. You alright? “
이렇게 한 마디씩 거드며 오빠를 다독였고, 그 학생들이 나쁜 거라며 위로해 주었다고 한다. 듣고 있던 우리도 정말 기분이 나빠 무슨 그런 것들이 다 있냐며! 육두문자를 남발했지만 오빠는 금세 감정을 사그라트렸다.
그러곤 우연찮게 며칠 후, 나 역시 시티에 나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스타벅스를 갔다.
그전에 몇 번 갔었지만 아직 주문하는 것이 어색해 괜스레 떨려하고 있었던 참이었다.
내 차례가 되어 자주 먹는 음료를 주문했는데 직원이 갑자기 “What? “ 하는 것이다.
순간 나는 당황하며 ‘어? 왜?? 뭐지?’ 싶었다. 그 전에는 주문 잘했었는데... 내 발음이 이상한가?
나는 다시 한번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음료를 주문했다.
‘ Can I have a GREEN TEA LATTE, please? ‘
‘.. I’m sorry, green.. what? ‘
슬슬 열이 받았다. 그 직원의 표정을 보니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고 있었고 짜증이 섞이면서도 무언가 조소가 섞인 얼굴이었다. 일부러 못 알아듣는 척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려던 찰나, 한숨과 함께 입술을 씰룩이며
‘ You mean, Green tea LATTE(라테이), right? ‘ 했다.
나의 라테 발음이 이상했는지 그걸 가지곤 어이없는 조롱을 한 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썩은 미소가 나오며 응, 맞아, 했다. 그럼에도 영어를 또박또박 말하고 싶은 마음에 한 톤 높은 목소리로 계속 말했는데 주문을 다하고 나니 정말 창피했다. 처음 당해보는 조롱에 정신이 혼미했고 ‘이거, 인종차별인가?’ 싶었다. 이전과는 다른 경험이었다. 대놓고 나에게 딴지를 걸며 무안을 주었기에 정말 비참한 기분이었다.
‘ 내 모국어도 아닌데 발음이 틀릴 수도 있지. 그게 뭐 별거라고 왜 차별해? 대놓고 무안 주고.. 재수 없어 진짜.’
그날은 하루 종일 분이 안 풀려 씩씩거렸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내세울 게 없어서 그런 걸로 사람을 차별하나 싶기도 했고, 본인보다 덜 뛰어나다 싶은 사람을 괴롭히는구나 싶어서 안타깝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그런 조롱 따윈 쿨하게 넘겨버리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도 낯선 환경에 아직 경직된 상태였고, 또 그 당시 스스로 자신감과 자존감이 낮다 보니 피해의식이 들어 더 기분이 나쁜 것이었을 테다. 그 일이 있은 후, 내가 더 발음 연습해서 다음번에 가면 유창하게 주문해 걔 코를 박살 내버릴 테다! 하는 잔망스러운 다짐도 했었다.
이후 워킹홀리데이와 유학생활을 하며 항간에 떠도는 소문처럼 아시안인 이어서 인종차별을 당한 경험은 거의 없었다. 죽기 살기로 영어를 공부하기도 했고 또 기죽기 싫어서, 바보처럼 하고 싶은 말 못 하고 당하고만 있기 싫어서 더 열심히 공부를 했었다. 그 효과는 좋았다. 누군가 나에게 지나가며 캣 콜링을 하거나 지나가며 이상한 야한 농담을 하거나, 부당한 일을 당할 때면 그들에게 다가가 당당히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완벽한 문장은 아니었더라도, 그들이 겁을 먹지 않았을지라도 '너의 그런 행동이 날 기분 나쁘게 해. 부끄러운 줄 알아.'라고 앞에서 말하고 다녔기 때문이 아닐까.
이 먼 타국에 와서 스스로 살아남기 위한 멘털 훈련이었지만, 사실 이 첫 기억은 호주에 있는 내내 꽤나 상처로 남아 있었다. 지금에야 웃으며 그런 적도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인종 차별을 당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아직도 그 기억이 제일 먼저 수면 위로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