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을 아낍시다.
또 다른 컬처쇼크를 겪은 일이 있었다. 앞서 나온 호주인 친구들과 이 날도 역시 저녁식사를 함께 하며 웃고 떠들었다. 식사가 끝난 후 소화도 시킬 겸 친구에게 설거지를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는 나의 제안을 흔쾌히 허락했다. 별 다른 생각 없이 설거지를 시작하려는데 이 친구가 싱크대 한쪽으로 물을 받으면서 세제를 풀고 있는 게 아닌가. 이상하다 싶었지만 그저 가만히 지켜보았다. 방식이 살짝 다른가 싶었다. 한참을 받더니 기름 잔뜩 묻은 그릇들을 물을 받은 싱크대 쪽으로 옮기길래 얼떨결에 나도 따라 옮겨줬다. 시간이 잠시 지난 후, 이제 물로 씻어내야겠다 싶었는데 정말 충격에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건져낸 그릇들을 설거지용 행주로 하나하나 닦아내더니 그대로 식기 받침대로 직행하는 것이 아닌가! 세상에나!
나는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Sweet lord. Oh my goodness. What are you...? what... what...?" (어머나 세상에!! 너 뭐하는...? 뭐.. 뭐야?)
" What? What’s going on? Oh.. This is how I wash dishes.. " (뭐가? 왜 그래? 아..! 원래 이렇게 설거지 해.)
처음에는 이 친구만 그런 줄 알고 정말 비위생의 끝판이다 라고 속으로 생각했었다. 오래 살고난 후엔 서양권 문화에서 대부분 이렇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사실 아직까지 적응되지 않는 게 사실이다.(비밀)
물은 많이 절약되겠으나 시도해 본다는 것이 참 어려웠다. 몇 번 해보긴 했지만 그릇을 싱크대에 담기 전 몇 번 씻어내기 일수였다.
또 다른 컬처쇼크는 샤워시간제한이었다.
여러 매체에서 말하다시피 전 세계적으로 물 부족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호주는 그와 관련해 시민들부터 정부까지 온 힘을 합해 물을 아끼고 자연을 보호하는데 앞장서는 것을 살면서 몸소 느낄 수 있었다. 물 사용에 있어 사람들의 기본적인 인식 자체가 달랐다. 가정에서부터 물을 절약하는 것이 일상화되어있고, 다른 음료보다 생수 값이 더 비싼 것은 당연시되어있었다. 빗물을 정화해 수돗물을 그대로 마셨으며, 일반 가정집 샤워부스에는 대부분 물 아끼기 스티커가 샤워기 근처에 붙여져 있었다. 주마다 다르긴 하지만 퀸즐랜드와 뉴사우스 웨일스 쪽은 3-4분 내로 샤워를 하라고 물 절약 캠페인을 자주 실시하기도 했다.
처음 이러한 규정을 듣자마자 당황스러웠다. 아니... 샤워는 대부분 15분이나 20분 정도 하지 않나?
이런 이야기로 호주 친구들과 토론 아닌 토론을 한 적이 있었는데 침을 튀기며 의견을 주고받기 바빴다.
나는 ‘그래도 인간적으로 깨끗이 씻으려면 시간이 걸린다. 빨리 씻는다고 해도 보통 15분에서 20분 정도 걸린다.’
호주 친구 왈, ‘더 줄일 수 있다. 샤워 순서를 바꾸던가 아니면 절차 몇 가지를(?) 줄일 수도 있다.’
나는 다시 반박했다.
‘그래.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머리 감는 게 항상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해봤자 2-3분 줄이는 거다. 나도 다음번에 시도는 해보겠지만 글쎄...’
호주 친구가 맞받아쳤다.
‘그래. 시도하는 게 중요한 거야. 문화가 다른 건 인정해. 하지만 호주 사람들 대부분 근검절약해. 특히 물 사용이라던가, 자연과 관련된 부분은 굉장히 민감하고 신경을 많이 쓰고 있어. 우리가 나서지 않으면 누구도 이 아름다운 나라를 지킬 수 없잖아. ‘
이 말은 나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나와 비슷한 또래의 친구가 자연과 환경을 위해 이렇게까지 심도 있게 생각하다니... 듣도 보도 못한 자연주의에 한동안 멍 때렸다. 문득 한국에서의 내 생활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그러자 그 친구 앞에서 굉장히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자주 수돗물을 틀어놓고 양치를 했으며 샤워하는 내내 물을 틀었었다. 설거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값싼 생수는 먹다 남기면 버리기 일수였고 세탁할 땐 언제나 물 한가득 세제 많이 넣어했었던 과거의 나. 깨끗이 완벽하게 소중한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었다.
이 사건 이후 여러 번 이사를 하며 많은 집들을 보았었는데 대부분의 집 샤워부스에 물 절약 스티커가 붙여져 있었다. 씻을 때마다 그 스티커를 마주하니 왠지 경건해지고 잘 지켜야지, 라는 마음에 후다닥 씻고 나오기도 했다.(정말 절차까지 줄여가며 노력했지만 7분 컷이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이러한 환경에 오니 저절로 자연보호에 앞장서지고 또 스스로 지키려고 노력을 많이 하며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런 사소한 습관과 행동 하나하나가 여러 달 모이니 내가 그들의 문화 속으로 서서히 스며드는 게 느껴졌다. 조금씩 그들과 같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고 그들과 같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
또 다른 짧은 일화는 내가 아닌 이웃집 사건이었다. 중국인들이 사는 집을 중심으로 내가 그 오른쪽, 호주인 집이 그 왼쪽에 위치한 Flat(=Apartment 아파트)에 살 때의 일이다. 어느 주말 아침, 중국인들이 사는 집에서 아침 일찍부터 요란스러웠다. 문을 여는 소리며, 노래방을 켜서 노래를 부르고 하하 깔깔 웃으며 엄청난 데시벨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 물을 뿌리는 소리가 났고 나는 잠결에 아, 앞마당에 물주나 보다...라고 짐작했다. 10분 정도 흘렀을까? 갑자기 그 옆의 호주인 집에서 큰 고성이 났다. 깜짝 놀라 창문 너머로 바라보니 나와 비슷한 건너편 이웃집 사람들 몇몇도 창문으로 빼꼼히 내다보고 있었다. 중국인 집에서 10분 넘게 잔디에 물을 주는 것 때문에 언성이 높아졌던 것이다. 엿듣고 있던 나는 말다툼하는 상황이 불편했지만 이내 호주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이봐요! 물 그만! 그만 물 줘요!! ‘
‘?? 뭐가요? 뭐가 문제인가요? ‘
‘ 잔디에 물은 적당히 주면 돼요! 왜 그렇게 오랫동안 물을 낭비해요?’
‘ 무슨 말이에요. 얼마 안 했는데? ‘
‘ 당신이야말로 무슨 말이에요! 아까부터 봤는데 10분은 족히 넘었을 텐데. 당신은 물 아껴야 해요!’
‘ 우리 집에서 내 앞마당에 물 주는데 뭐가 문제예요?! 이해가 안 되네.’
‘ 오. 그러면 당신네 나라로 가서 그렇게 하세요! 여기선 우리만의 규칙이 있고 모두가 그걸 지키고 있어요. 당신이 이 나라에 있다면 그걸 따를 의무가 있어요. 그리고 누가 되었든 그걸 따르지 않는다면 이 나라 사람으로서 나는 그걸 말할 자격이 있고요. 그게 싫으면 떠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