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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갬성팔이 Feb 13. 2022

동방의 근현대 패션

유럽과 동양의 패션 1-2


서양 복식을 받아들인 우리나라



  유럽이 라인을 중요시 생각했다면 동양의 패션은 어땠을까요? 과거 우리나라에 서양문물이 들어오면서 서양 복식이 서서히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고종실록’과 ‘승정원일기’는 고종이 1895년 새해부터 신하들과 관리, 백성에게 검은색 두루마기를 입으라고 명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그러나 1920년대까지도 여전히 일반인들은 흰옷을 즐겨 입어 1921년 일간지엔 “금년 봄에도 흰 옷이 유행”이라는 전망 기사까지 담길 정도였죠. 이에 대해 당시 지식인들은 한복을 개량하네 마네 하며 한 마디씩 보탰습니다.

 

개화기 의류 광고


조선일보와 중앙일보가 여성종합지 1호를 창간하였고 본격적인 패션 광고가 시작됩니다. 1920~1930년대 신문에선 양장 남성복과 여성복의 유행 경향을 시즌마다 실었죠. 남성복의 경우 재킷에 넥타이, 와이셔츠는 물론이고 모자에서 안경, 시계, 커프스까지 갖춘 고급 정장을 제안했습니다. 여성의 경우 정장은 물론이고 핸드백과 하이힐에 이르기까지 소재, 색상, 스타일을 세세하게 조언했. 그러다 보니 “이런 미소녀들을 하루에도 4, 5명씩 만날  웬만한 청춘은 뇌살 당하고 말리라” “가뜩이나 얼빠진 조선 청년들이 미인들의 모습에 더욱 정신  차린다  많은 멋쟁이들을 비난하는 표현까지 기사에 등장합니다. 한편에선 살림살이 빠듯한 샐러리맨들이 봄엔 겨울옷을 전당포에 저당 잡히고 춘추복을 찾아 입고, 겨울엔 춘추복을 잡히고 겨울옷을 찾아 입었습니다. 또한, 1934년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양복 감상회' 패션쇼가 열립니다.  


  서양 복식의 스타일을 하이카라(High Collar)라고 불렀다고 해요. 하이칼라는 보통보다 1)운두가 높은 칼라를 뜻하며 쉽게 말하면 칼라를 보통 것보다 높게 만든 것의 총칭하는 말입니다. 우리의 한복 복식은 칼라가 높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의 서양 복식은 우리나라 입장에선 하이카라인 셈이죠. 훗날, 하이카라는 취향이 새롭거나 서양식 유행을 따르는 일, 또는 서양 유행 옷을 입는 사람으로 뜻하게 됩니다.


좌 : 군복을 입은 아이들, 우 : 담요로 만든 바지를 입은 아이
좌 : 오드리 햅번, 우 : <자유부인>으로 유행한 양단 저고리와 벨벳 한복치마


  한국전쟁 이후 입을 옷이 부족했습니다. 군복이나 군용 담요로 옷을 만들어 입었으며 미국에서 캠페인을 통해 얻은 기부 의류나 중고 의료를 수입해 판매되었습니다. 이는  많은 사람이 서양 복식을 받아들이는 계기가 됩니다.


  힘든 시절에도 멋을 포기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죠. 이들의 패션 욕구는 억누르기 어려웠던 겁니다! 당시 오드리 햅번이 출연한 <로마의 휴일>, 우리나라 영화 <자유부인> 인기를 끌면서 나일론 블라우스, 플레어스커트, 양단 저고리, 벨벳 치마, 마카오 양복 등이 유행합니다.


청화색 하이웨스트 새틴 드레스 & 1963년 제 1회 한일 친선패션쇼에 출품된 최경자 디자이너 의상
50~60년대 명동 뽀이와 명동 껄


  요즘 패션을 좋아하는 사람이 모이는 장소를 뽑자면 홍대, 가로수길, 한남동 등이 있을 겁니다. 50년대에서 60년대로 넘어가면 패션의 메카는 단연코 명동이었습니다. 명동은 일제강점기  수많은 일본인이 거주한 곳이었습니다. 상대적으로 부유한 동네였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유행을 선도했던 동네였죠. 이는 해방 이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국전쟁 피해가 복구되고 약간의 여유가 생기면서 명동에는 양장점이 생겨납니다. 옷을 제조하는 여성이 늘어났으며 1세대 디자이너 노라노, 최경자가 떠오릅니다. 자연스럽게 명동은 패션의 거리가 되고  거리를 활보하는 패션너블한 사람들을 '명동 뽀이', '명동 '이라고 불렀습니다.


좌 : 국가재건운동본부 주최 신생활 간소복 패션쇼(1961년), 공무원용 신생활복 도안(1961년)
가수 윤복희의 미니스커트


  60년대 정부는 경제개발을 위해 해외 의류 수입을 금지하고 간소한 의생활을 보급했습니다. 국민들의 옷과 패션 관리에 투자하는 비용, 시간을 줄여 경제개발에 전념하겠다는 의도였습니다. 하지만 1967년 미국에서 귀국한 가수 윤복희가 미니 스커트를 입고 TV에 등장하면서 미니 스커트가 대유행을 하죠.


한국의 70년대 패션


  70년대 경제성장은 섬유 및 의류산업 발전에 영향을 미칩니다. 한국전쟁 시기에 태어난 베이비부머들이 대학생이 되면서 우리나라 소비문화와 패션을 선도합니다. 베이비부머들은 전쟁의 가난을 경험하지 않았고 선진화된 미국식 교육을 받았으며 TV뿐만 아니라 신문과 잡지를 통해 해외 문화를 접할 기회가 많아졌죠. 윤복희의 미니스커트와 더불어 청바지, 나팔바지도 유행합니다. 당시에 생겨난 대표적인 브랜드는 1970년 뱅뱅(bangbang), 1974년 인디안(INDIAN), 1977년 톰보이(TOMBOY)와 캠브리지멤버스(CAMBRIDGE-MEMBERS)가 있네요. 이 브랜드들은 아직까지도 명맥을 이어가고 있죠. 참고로 강남의 뱅뱅사거리는 의류 브랜드 뱅뱅의 본사가 있어서 뱅뱅사거리라고 합니다.


  80년대는 고도성장기로 진입하면서 개인소득이 늘고 여성들이 본격적으로 사회에 진출한 시대입니다. 더 이상 돈 많은 성인이 주된 소비자가 아니고 다양한 소비자가 나타납니다. 특히 교복으로 제약 있던 학생들이 복장 자율화가 되면서 주요 고객으로 떠올랐죠.


80년대 인기 많았던 스포츠웨어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2)3S 정책으로 프로야구가 출범하고 88 올림픽 유치가 결정되면서 스포츠 봄이 일어납니다. 또한, 88 해외여행이 풀리며 해외 브랜드의 국내 수입도 증가합니다. 그래서 기능성 운동복, 골프웨어, 레저용 캐주얼 웨어 같은 스포츠 웨어가 남녀노소 유행합니다. 특히나 학생들은 기타 액세서리로 자신의 개성을 뽐냈으며 활동성이 좋은 점퍼가 인기 많았습니다. 당시 고증을  지킨 영화 <써니> 있습니다. 안 보시면 분이 있다면  보시길 추천해요.



일본의 패션 역사


기모노를 통해 만든 미국 복식 의류 책


  그렇다면 일본은 어땠을까요? 일본은 세계 2 대전에서 항복한  극심한 빈곤에 시달렸습니다. 그렇기에  옷을 만들지 않고 전쟁 당시 입던 군복이나 몸빼 옷을 입고 노동을  수밖에 없었죠.  와중에도 우리나라처럼 멋을 포기할  없었던 일본인이 많았습니다.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자신들을 이긴 강대국, 미국을 동경한 일본인들은 이들을 따라 하며 멋을 냈고 의류 발전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일본인들은 군복이나 전통복인 기모노를 미국 복식에 맞춰 따라 했고 복식 의류 책을 제작합니다. 당시 여성들은 신부수업 때문에 3)양재 학교에서 공부를 했는데 시대의 분위기와 여성들의 활동은 자연스럽게 봉재산업을 발전시키는 기반이 되죠.


태양족의 모티브가 된 영화<태양의 계절>와 태양족


  봉재산업의 발전이 그들을 경제적으로 풍족하게  주된 이유는 아녔습니다. 가난했던 일본이 갑작스럽게 부유해진 계기는 우리나라와 연관 있어요. 바로 한국전쟁. 일본은 한국전쟁을 위한 유엔군의 병참기지로 항구도시에 다양한 군수품을 생산하고 공급을 받았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은 빠른 속도로 2 세계대전의 피해를 모두 복구하게 되죠. 경제적으로 안정되며 여유가 생긴 일본은 문화산업이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제임스 딘의 영화나 로큰롤 같은 미국의 문화가 급속도로 퍼집니다. 당시 미국 문화의 영향을 받은 세대를 태양족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의 4)오렌지족과 비슷합니다. 태양족은 금수저 자녀들  사고뭉치인 사람들을 말하며 그들은 요트 타는 것을 즐기며 주로 아메리카 리조트 룩을 입었다고 합니다.    


거리 정화 운동의 표적이 된 미유키족 & 박정희 시대의 미니스커트 규제

 

  이후엔 일본의 잡지로 이름을 알린 이시즈 켄스케의 밴 작(VAN JAC)이 유행하며 아이비 룩이 등장합니다. 아이비 룩이란 50년대 신사복을 시작으로 60년대에 미국 동부 아이비리그 대학생들의 댄디한 캔퍼스 룩을 모방한 스타일을 뜻하며 아이비 룩을 입은 사람들을 5)미유키족이라 불렀습니다. 패션의 중심지 긴자를 점령했던 미유키족은 도쿄 올림픽이 열린 60년대 중반에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게 됩니다. 올림픽은 서양인들에게 자신들을 뽐낼 수 있는 무대였고 기성세대의 관점에서 자국의 단점을 감추려고 했죠. 현시점에서 미유키족의 아이비 룩은 깔끔한 스타일이지만 당시 기성세대들에겐 낯설고 비행소년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미유키족은 거리 정화 운동의 표적이 되었고 빠르게 사라졌습니다. 마치 우리나라 88 서울 올림픽의 거리정화 운동과 박정희 시대의 복장 단속이랑 많이 닮았네요.


  60년대 초 아이비 룩이 탄압에 대한 돌파구로 'TAKE IVY'라는 다큐멘터리와 포토북이 탄생합니다. 'TAKE IVY'는 당시 아이비 룩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던 기성층에게도 자신들이 동경한 미국의 상류층 라이프스타일이라고 인지하게 되고 모든 연령층에게 사랑받게 됩니다. 하지만 실제 취재 당시 미국의 패션은 그들이 생각한 것과 달랐다고 하네요. 60년대 아이비리그 학생들은 빈티지한 반바지나 샌들 등 검소하고 편안하게 입고 다니며 패션엔 전혀 관심 없었죠. 그나마 교회나 면접을 보러 갈 때, 교수들이 캐주얼하게 입고 다닐 때나 깔끔하게 입었다고 합니다. 'TAKE IVY'는 아이비 룩의 정당성을 가지기 위해 이를 편집하여 다큐멘터리와 포토북을 제작했다고 알려졌습니다.


후텐족


  도쿄 올림픽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소니의 트리니트론 텔레비전이 대박 나면서 일본은 세계 GDP 2위까지 성장하였으며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 가입하는 등 경제 대호황을 누리게 됩니다. 당시 미국엔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며 자유와 평화를 내세우며 히피문화가 유행하게 됩니다. 사회의 저항하는 운동이 나타난 것이죠. 당시 일부 일본인들이 미국의 히피문화를 따라 했는데 그들을 후텐족이라 칭했습니다. 후텐족은 미국의 히피문화와 달리 자유와 평화를 내세우기보다 복장이나 말투, 행동을 따라 하는 사람들이었죠. 길거리에서 무기력하게 있거나 담배를 많이 피워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후텐족을 좋게 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히피문화의 영향은 청바지가 유행하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청바지는 젊은이들의 힘을 과시하는 난폭함을 표현하면서
입기에 딱 들어맞는 옷이었습니다."

- 우라베 마코토 -


  청바지가 일본에 정착하기엔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그중 한 일화를 소개해드릴게요. 오사카 대학의 부교수 필립 칼 페다는 청바지를 입고 강의실에 들어온 여학생에게 "청바지 입은 여성은 여기서 나가세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학생이 입기엔 부적절한 옷을 입었다는 게 그 이유였죠. 해당 학생은 행정실에 찾아가 교수에게 공식적으로 항의했습니다. "왜 여자는 캠퍼스에서 청바지를 입으면 안 되나요? 남자들은 입잖아요." 이 이슈는 한동안 일본을 점령했습니다. 페다 교수는 끝까지 반대하였으나 다른 교육자들은 대부분 청바지를 입은 여성의 편에 섰고, 전국의 학교는 여성들도 청바지를 입을 수 있도록 교칙을 수정했다고 합니다.


<Heavy - Duty> & <POPEYE> & <Made in U.S.A>


밴 작은 리바이스가 될 수 없어요.
혁신적인 모방의 창작자였지 '진짜'는 아니었죠.

- 아키오 하세가와-


  일본의 아메리카 캐주얼 갈망은 더욱 거세졌습니다. 이제 그들은 진짜를 원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15만 부 이상이 판매된 <메이드 인 USA>으로 'J.프레스' 같은 프레피룩을 보여주는 브랜드도 소개되었지만 주로 레드윙(RED WING SHOES), 리바이스(Levi's), 에디 바우어(EDDIE BAUER), 노스페이스(The North Face) 등 미국 서부를 대표한 클래식한 브랜드들이 소개되었죠. 이후, 일본의 패션 잡지 <뽀빠이>를 비롯한 여러 잡지에서 미국 서부에 대해 주로 소개하며 반 잭은 서서히 경영난을 겪으며 파산을 발표합니다.


  훗날 밴 작은 패스트 리테일링의 자회사 유니클로(Uniqlo)의 모태가 됩니다. 유니클로의 창립자 야나이 타다이는 아버지에게 오고라 상사라는 반 잭 프랜차이즈를 물려받습니다. 그는 미국 캠퍼스 라이프스타일을 보며 '매일 입는 와이셔츠 같은 것도 서점처럼 누구나 부담 없이 구경하고 입어보고 살 수 있는 매장이 있으면 좋지 않을까?'라는 콘셉트를 떠올리며 가성비 좋은 옷을 만들었습니다. 90년대 일본은 장기불황에 빠지게 되지만 유니클로는 승승장구하며 세계 SPA 브랜드 중 시가총액 1위를 달성하는 기업의 오너가 됩니다.


<상처 투성이 천사> & 타케오 키쿠치


  다시 과거 얘기로 돌아가 보죠! 70년대 하라주쿠의 비기(BIGI)에 등장은 일본의 패션 중심지가 바뀌는 계기가 됩니다. 비기는 타케오 키쿠치라는 디렉터가 만든 브랜드로 그는 <상처 투성이 천사>라는 일본 드라마의 의상 디렉팅을 맡은 바 있는데 당시 드라마 주인공들의 의상이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며 하라주쿠에 비기는 전국적으로 붐을 일으킵니다. 이로 인해, 아메리칸 캐주얼로 획일화된 일본 패션에 대해 싫증을 느낀 디자이너들이 하라주쿠 거리로 모이며 일본의 패션 중심지가 하라주쿠로 이동했습니다. 하라주쿠에 여러 6)DC 브랜드들이 탄생했는데 그중 하나가 패션계 거대한 지각변동을 일으킨 레이 카와쿠보의 꼼 데 가르송(Comme des Garçons)입니다.



 



1) 운두 : 그릇이나 신 따위의 둘레나 높이.

2) 3S : 스크린(screen:영화), 스포츠(sport), 섹스(sex)에 의한 우민(愚民)정책.

3) 양재 : 좋은 재목이나 재료.

4) 오렌지족 : 1970∼80년대 경제적 혜택을 받고 태어나 주로 서울특별시 강남구 지역에서 자유롭고 호화스러운 소비생활을 즐긴 20대 청년을 지칭하는 용어.

5) 미유키족 : 밴 작 매장이 있던 거리는 긴자의 미유키 거리인데 그곳에서 밴 작의 아이비 룩 혹은 비슷한 스타일을 입는 젊은이들.

6) DC 브랜드 : 전국적으로 전개되는 종래의 브랜드 상품이 개성화·고도화하는 소비자 욕구에 충분히 대응할 수 없게 됨에 따라 디자이너의 개성을 내세운 브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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