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체주의를 완성시킨 마틴 마르지엘라
다음 주는 중요한 일정이 있어 휴재입니다.
다음 편부터 본격적인 내용이 시작하니 기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레이 카와쿠보의 영향을 받은 디자이너들은 누가 있을까요? 우선, 그녀의 제자부터 살펴보면 꼼 데 가르송의 JUNYA WATANABE COMME des GARÇONS 이랑 JUNYA WATANABE COMME des GARÇONS MAN 라인을 맡고 있는 준야 와타나베, 지금은 사라진 라인을 맡았던 tricot COMME des GARÇONS 이랑 tao COMME des GARÇONS 구리하라 디오, GANRYU 라인을 맡은 간류가 꼼 데 가르송 내부에서 활동했고 하고 있죠. 이외에 꼼 데 가르송에서 일을 하다 브랜드를 하는 디렉터도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SACAI 디렉터 아베 치토세, White Mountaineering 디렉터 아이자와 요스케, Kolor와 KOLOR BEACON 디렉터 아베 준이치가 있습니다. 직접적으로 배우진 않았지만 영향을 받은 디자이너도 있죠. 에스닉한 프린트의 드리스 반 노튼, 그런지 패션과 루이비통을 정상에 올린 마크 제이콥스, 패션의 관습에 도전한 마틴 마르지엘라 등등. 이중 패션사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사람은 아마.. 마틴 마르지엘라 일 겁니다!
마틴 마르지엘라는 1)앤트워프 왕립 아카데미 출신으로 장 폴 고티에의 3년 동안 어시스턴트 생활을 했습니다. 장 폴 고티에의 디자인 하우스는 자유로운 분위기였고 패션쇼에 반영됩니다. 86 F/W 패션쇼를 보면 모델들이 워킹을 하며 바나나를 먹는 모습을 보여줬죠. 마틴 마르지엘라는 장 폴 고티에 밑에서 자유로움에서 재능을 펼치는 방법을 배운 후 1987년 8월 제니 메이렌스와 함께 메종 마틴 마르지엘라(Maison Martin Margiela)를 설립합니다. 마틴 마르지엘라의 행보는 심상치 않았습니다. 그는 패션과 럭셔리의 모든 신조에 의문을 던졌죠. 그리고 엄청난 여러 결과물을 만들어냈습니다. 뉴욕 매거진은 마틴 마르지엘라를 '막연한 2) 다다이스트, 마치 마르셀 뒤샹이 패션 디자이너로 환생한 것 같다.'라고 평했습니다. 패션계를 다방면으로 바꾸었거든요.
88년 메종 마틴 마르지엘라의 첫 패션쇼는 70년대 느낌이 나는 '카페 드 라 가르'라는 극장에서 열렸습니다. 마틴 마르지엘라는 첫 패션쇼를 낯선 곳에서 하는 게 맞는지 망설였지만 극장 주인은 제라르 드파르디유, 미우미우가 이곳에서 시작을 했다며 잘 해내면 유명해질 거라고 권유를 했고 고심 끝에 패션쇼를 극장에서 열기로 결정합니다. 혹자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요즘엔 다양한 곳에서 패션쇼를 열기도 하니깐요. 하지만 당시엔 루브르 박물관 사각 안뜰이나 루브르 5블록 반경 내 런웨이가 아닌 곳에서 패션쇼를 연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죠. 또한, 마틴 마르지엘라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모델이 백스테이지를 떠나기 전 빨간 페인트를 밝고 나가 모델 워킹 발자국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이를 활용해 그 다음 시즌엔 발자국을 남긴 런웨이를 활용하여 옷으로 만들어 냈죠.
마틴 마르지엘라 패션쇼의 새로운 도전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i - D 잡지 촬영 장소를 찾던 도중 언론 홍보 담당자가 추천해준 곳을 가게 되는데 파격적으로 패션쇼 장소로 선정해버립니다. 그곳은 루브르에서 19 ~ 20구 떨어진 '테란 바그'라고 불리는 놀이터가 있는 버려진 땅이었죠. 사람들은 차나 리무진을 타고 패션쇼를 보러 왔습니다. 약간 겁먹은 상태로 어딜 가는지도 모른 채 말이죠. 당시엔 아무도 파리의 외곽까지 가지 않았기 때문이죠. 이 패션쇼는 패션 시스템과 쇼 프레젠테이션에 대해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죠. 패션쇼에는 아이들, 가족들, 이웃 주민들로 꽤 북적이었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패션쇼가 진행되었습니다. 정말 이런 패션쇼는 없었죠! 하지만 반응은 반반이었습니다. 환호성과 박수를 끊임없이 보내며 찬사를 보내는 사람들도 있었고 충격을 받아 아무 말도 못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몇몇 매체에선 선거권도 없을 정도로 어린아이를 도구로 이용했다며 마틴 마르지엘라를 거세게 비난했습니다.
패션산업은 갑작스럽게 변화하고
작업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계속해서 바뀌어서
가끔 그에게 상처가 되었을 거로 생각합니다.
- 피에르 루지에르 -
마틴 마르지엘라는 공식적으로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인터뷰나 매체 노출을 하지 않으려고 하죠. 많은 사람들은 마틴 마르지엘라를 도대체 왜 볼 수 없는지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나서 받아들이게 되었죠. 왜냐하면 마틴 마르지엘라가 말하는 이야기나 쇼, 컬렉션이 너무나 강력해서 그런 문제는 집어치워 두게 되는 거죠. 이 모든 걸 잘 설명해야 한다는 게 너무나 힘듭니다. 사람들마다 받아들이는 게 다르고 설명을 해도 또 다른 의문을 만들고 왜곡되기도 하고 누군간 의혹을 만들기도 했죠. 마틴 마르지엘라는 직접 나서서 그런 일에 잘 대응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많은 분들은 마틴 마르지엘라가 신비로움을 내세운 전략으로써 얼굴을 공개하지 않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전략적이라기보다 진심에서 우러난 행동이었죠. 익명성은 자신을 보호해주는 수단으로 일에 더 몰입할 수 있게 하고 자신이 보호받는다고 느꼈고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마틴 마르지엘라는 유명인이 되기를 싫어했습니다. 그에게 익명성은 아주 중요했고 다른 사람들과 같다는 균형감을 주었죠. 당시엔 브랜드 디자이너와 슈퍼모델의 유명세가 강력한 시기였는데 마틴 마르지엘라는 본인이 아닌 제품이 더 유명해지길 원했습니다. 그에겐 압도적인 컬렉션을 선보여야 할 큰 이유가 생긴 겁니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유명해지기 어렵기 때문이죠.
마틴 마르지엘라는 첫 시즌부터 일부 모델에게 베일을 씌웠습니다. 그는 얼굴을 가린 채, 옷과 옷의 움직임만 있는 걸 좋아했죠. 사람들이 모델이 아닌 옷에 더 집중할 수 있으니깐요. 때론 전문 모델이 아닌 전혀 모르는 길거리에 사람이나 자신의 친구들을 모델로 캐스팅하기도 했습니다. 마틴 마르지엘라는 스트릿웨어의 자연스러움을 추구했죠. 그래서 모델들에게 전문적인 워킹보단 평상시 걷는 것처럼 런웨이를 걸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더 충격적인 건 패턴사가 패션쇼에서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패션쇼의 옷은 패턴이 주요 포인트이기 때문에 패턴사가 런웨이에 올라가는 게 맞다고 본거죠. 정말 마틴 마르지엘라는 패션쇼를 이름값이 아닌 진정으로 옷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80년대는 라벨을 중요시 보는 시대였습니다. 사람들은 옷을 붙잡고는 '이거 그 디자이너 거잖아!'라고 말하곤 했죠. 마틴 마르지엘라는 그런 사고방식을 싫었습니다. 그래서 4개의 스티치뿐인 텅 빈 라벨을 시작으로 라벨을 시작했고 사람들이 4개의 스티치가 마틴 마르지엘라의 옷인지 아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길에서 모르는 사람이 마르지엘라 옷을 보면 등을 긁어보며 뭐가 묻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마틴 마르지엘라의 옷임을 유일하게 알아볼 단서였지만 당시엔 떼고 싶어 했던 거에 불과했죠. 시간이 흘러 여러 라인이 생겨나며 숫자 라벨이 추가되었습니다. 당시엔 알았을까요? 저 스티치가 요즘 사람들에겐 로고로 생각하고 밥풀 감성이라고 불리게 될 줄은.. 아마 마틴 마르지엘라도 몰랐을 거예요!
마틴 마르지엘라와 동업자 제니 메이렌스는 레이 카와쿠보를 비롯해 일본 디자이너들을 동경했습니다. 그래서 일본으로 여행 다니며 일본의 복식으로 영감을 많이 받습니다. 도쿄에 길거리에서 면으로 된 플랫 타비 신발을 신고 있는 노동자로부터 영감을 받아 부드러운 타비 신발을 튼튼한 가죽으로 제작한 하이힐로 만들었죠. 이는 타비로 된 최초의 하이힐 모델이었습니다. 나중엔 하이힐이 아닌 운동화로도 나오죠.
마틴 마르지엘라는 특이한 오버사이즈룩을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네트 티셔츠 아래 주름진 오버사이즈 탱크톱을 입혔으며 사람들은 이를 ‘뉴 웻룩’이라 불렀죠. 또한, 사람들이 옷이 도착했을 때 비닐 안에 있는 옷을 보면 매우 신나는 것에 영감을 받아 옷을 비닐 커버를 그대로 남겨놓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슈퍼마켓 비닐봉지를 사용하여 민소매를 만들었습니다. 또한 플라스틱 봉지로 핸드백을 만들었죠. 여태껏 볼 수 없었던 직물에 대한 발상의 전환이였습니다.
여담으로 1989년 사진작가 빌 커닝햄(William John Cunningham Jr.)은 마탄 마르지엘라의 90SS 패션쇼를 보고 감상평으로 처음 '해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이로 인해, 패션계에 해체주의라는 말이 정착합니다. 해체주의의 시작점을 레이 카와쿠로로 보지만 그 단어를 정착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마틴 마르지엘라였던 겁니다.
해체주의는 80년대 초반 레이 카와쿠보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녀가 현 사회에 대한 저항에 집중했다면
마틴은 의복의 구성이나 기능에 대한 진짜 연구에 가까웠다고 생각합니다.
- 리더바이 에델코르트 -
다음 컬렉션은 마틴 마르지엘라의 놀라운 창의성과 실용성을 다시 한번 보여줍니다. 당시 니트웨어 공급업체가 부족하였으며 그의 창의성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는 업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틴 마르지엘라는 어머니에게 펑크 문화에서 영감을 받은 니트를 짜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 니트를 짜기 위해 마틴 마르지엘라의 어머니는 빗자루 한 쌍을 사용해 불규칙한 니트 디자인을 만들었습니다(위 파란색 풀오버에서 볼 수 있음). 마틴 마르엘라의 어머니는 파란색, 장미색, 검은색의 3가지 색상으로 무려 40개 이상되는 작품을 제작했죠.
펑크 스웨터 스타일을 자세히 보면 그 아래에 검은 드레스를 볼 수 있습니다. 이 드레스도 눈여겨볼 점이 있습니다. 이전에는 의복의 내부 안감으로 간주한 것을 표면으로 나타내 옷에 더 중요한 역할을 부여한 것입니다. 오늘날, 마틴 마르지엘라의 옷을 보면 복잡하고 불편한 옷으로 생각하기 마련인데 이외로 그는 편안함과 단순함의 가치도 소중히 여겼고 영감을 얻기도 했습니다.
마틴 마르지엘라의 1991년 여름 패션쇼는 재활용을 통해 3)리프로덕트를 제대로 선보인 해입니다. 리프로덕트 한 드레스를 선보인 거죠. 예전 드레스는 코르셋에 의해 압착된 몸을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너무 작습니다. 그는 중앙 솔기를 따라 자르고 4)튜닉으로 변형시킴으로써 50 년대의 볼 드레스에 편안함을 더해 두 번째 생명을 불어넣습니다. 또한 청자킷과 찢어진 청바지를 한 조립으로 해서 만든 최초의 옷을 선보이기도 합니다.
1991년 겨울 패션쇼에 다시 니트를 만드려고 했으나 적절한 니트 공급 업체가 없었고 새로운 방식으로 니트 제작이 필요했습니다. 학창 시절 마틴 마르지엘라는 과제로 기존 주방 소재로 옷 만들었죠. 그는 티타월로 자켓을 만들었는데 티타월 안에 패턴을 자르고 싶지 않아서 전체를 사용해 그냥 접거나 조각으로 붙였습니다. 마틴 마르지엘라는 이 방식을 양말로 활용하여 니트를 만듭니다. 또한, 제작 과정의 모든 단계를 볼 수 있는 설계도도 선보이며 다른 사람들도 직접 만들어볼 수 있게 방법을 알리기도 했습니다.
이밖에도 평면패턴의 옷, 코팅진, 여러 옷을 짜깁기 한 리프로덕트 옷, 오버사이즈를 해서 남은 허리 부분을 엮은 청바지, 낙서한 신발 등 최초라고 칭할 수 있는 여러 옷들을 만들어냈습니다.
1) 앤트워프 왕립 아카데미 : 벨기에를 대표하는 명문 예술대학교로 1663년 설립된 유서깊은 세계 최초의 예술학교 중 하나
2) 다다이스트 : 반이성, 반도덕, 반예술을 표방한 예술 사조이자 실존주의, 반문명, 반전통적인 예술 운동으로 기존의 모든 가치나 질서를 철저히 부정하는 사람
3) 리프로덕트 : 기존의 있는 옷을 해체하거나 더해 새롭게 만드는 것
4) 튜닉 : 그리스, 로마 시대에 착용된 소매달림, 혹은 소매가 없는 통자이며 길이는 무릎 정도로 장식이 거의 없는 느슨한 의복을 말하는 것으로써, 속옷 또는 겉옷, 평상복으로 이용되었다. 현대에는 그것과 비슷한 홀쭉하게 된 통형인 실루엣의 의복 전반 그것과 똑같은 실루엣을 가진 것으로, 허리아래에서 무릎길이 정도까지의 심플한 모양으로 된 재킷이나 블라우스 약식의 기장이 긴 군복, 가톨릭의 성직자가 미사 때 착용하는 길이가 긴 제례복 등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