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간 해외출장을 다녀온 남편이 집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처음으로 베이비페어에 방문하기 위해 바쁘게 길을 나섰다. 막히는 고속도로 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육아로 화두가 던져졌다.
우리에게 예고된 육아라는 미래.
남편은 평범한 직장인이고 나는 일이 들쭉날쭉한 프리랜서다. 더구나, 임신 이후로는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롤 몸이 좋지 않았기에 나의 일 패턴은 점점 더 기복이 심해져 있고, 특히 요즘은 돈을 버는 일보다는 글을 쓰거나 콘텐츠를 고민하는 일들로 일상을 가득 채우던 차였다. 그마저 아이를 낳으면 쉽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고 때때로 친정 엄마한테 손을 내민다고 해도 전적으로 의지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아무튼, 기본적으로 육아가 나에게 주어진 임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남편이 퇴근 후 평일과 주말에 모두 육아를 대신한다고 할지라도. 맞벌이가 아닌 애매한 반 외벌이인 상황에서 나 역시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일들임을 잘 알고 있다.
문제는 단어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각자의 다른 인식 때문에 시작되었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독박 육아'의 의미 차이가 고속도로 위 차 안에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독박 육아와 공동 육아를 가르는 기준이 무엇일까. 맞벌이를 하고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기고 주말에 함께 아이를 본다면 분명한 공동 육아다. 남편이 출근한 평일 하루 종일의 시간 그러니까 '9 to 6'의 시간을 온전히 아이와 함께 지낸다면, 일반적으로 '독박 육아'라고 부른다. 남편이나 아내가 없이 혼자 아이를 보게 되는 상황. 언제부터 누가 정의해서 이 단어를 쓰게 된 것인지는 몰라도 내가 알고 있는 의미는 이러하다. 이런 상황에서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보다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부르는 의미와 그 정도가 훨씬 더 중요하고 예민한 문제다. 언어에 대한 감수성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남편은 이 단어를 모르고 있었다. 흔히들 말하는 독박 육아의 의미를. 아이가 태어나면 함께 최선을 다해 육아를 할 텐데, 나 혼자 독박 육아를 하게 될 거라고 말하는 것에 서운함을 토로했다. 나는 당황했다. 이 사람은 tv나 인터넷에서 '독박 육아'라는 표현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단 말인가. 퇴근 후 저녁 시간과 주말의 육아를 어떻게 공동 육아라고 정의할 수가 있지?
물론, 알고 있다. 남편이 육아에 대해 무책임하게 행동할 사람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지난 4년 간의 결혼생활로 비추어 보았을 때 그 누구보다 자신이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육아를 자신의 일로 받아들이고 해 나갈 사람이다. 그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면 된 거 아니냐고? 마음이 그런 게 아니더라고.
혼란스러움과 함께 화가 나기 시작했다. 눈물이 흘렀고 차 안이 떠나갈 듯 소리를 질렀다. 그 모든 상황을 알고도 감내하려는 내게 닥친 독박 육아라는 현실을 인정해주지 않으면 내가 왜 우리의 아이를 낳아 키워야 하는 것이냐고 따져 물었다. 나는 이미 한껏 감정적으로 날카로워져 버렸다. 단어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보다 더 멀어져 버린 생각의 차이가 서글프게 느껴졌다.
눈물을 몇 바가지를 쏟아내고 나서 베이비페어에 도착했다. 격렬한 논쟁 끝에 남편은 나를 달래주었고 내가 주장하는 '독박 육아'의 의미를 인정하고야 말았다.
다소 떼를 쓰듯 남편에게 내 주장을 받아들이도록 억지를 부렸다는 걸 알고 있다. 시간이 지나고 진정이 된 후 나는 다시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내가 왜 그렇게 예민하게 굴며 화를 냈는지에 대해. 그리고 남편이 그것에 대해 무감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 거리감으로 다가왔는지에 대해.
별 것 아닌 사소한 말다툼이었다고 치부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가끔은 그 사소함의 인식 차이가 생각보다 큰 마음의 벽을 만들어낸다. 그 벽은 한 번 만들어지고 쌓이게 되면 나중에 허물기 어려운 성이 되어버린다. 일방적으로 한 사람이 자신의 많은 부분을 포기함으로써 불균형적인 균형을 있어가는 결혼생활을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이해하고 넘어간다'라고 포장되기도 하지만, 마음속에 쌓인 오해와 상처들이 그렇게 쉽게 털어지는 존재란 말인가. 글쎄, 난 그렇게 쿨한 사람이 아니라서 모르겠다. 삐걱대는 불균형은 언젠가는 무너지게 될 것이 뻔하다.
두 사람이 만나 함께 살며 만들어가는 생활의 균형은 서로의 오르막과 내리막을 잘 살펴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가끔은 누군가에게 더 무거운 짐이 지워질 때도 있겠지만, 그것을 놓치지 않고 바라봐 주고 걱정해주며 짐을 나눠질 수 있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시소의 가운데에 생겨난 '아이'라는 커다란 존재는 그만큼 두 사람에게 더 성숙하고 묵직한 균형을 권하는 듯하다.
우리에게 닥친 행복하지만 조금은 무거울 육아의 현실을 함께 잘 이겨내기 위한 나의 투쟁이었다고 일단락 짓고 '독박 육아'에 대한 논쟁은 그렇게 합의점에 이르렀다.
가끔 내가 장난을 치며 "이건 독박이야 아니야!"라고 물으면, 남편 역시 웃기다는 표정으로 "무조건 독박이야!"라고 하면서 받아쳐줄 정도로 우리는 이 논쟁에서 자유로워졌다.
차 안에서의 말다툼이 무색할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