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리불안

by 흔적




형제자매 없이 혼자 자란 내게 먼저 길러진 후천적 습성은 사교성보다는 독립심이었다. 누군가에게 먼저 손을 내밀기보다는 스스로 무언가를 시도해보려는 노력이 선행되었다. 사회에 나와서도 남들과 잘 지내는 것만큼이나 혼자 해결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일을 할 때는 동료들과의 협력이나 친분이 중요했지만, 그 과정에서 주어지는 역할이나 상황들은 차가울 만큼 온전히 나만의 몫으로 돌아왔다.


서운해하거나 억울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세상이 원래 그런 거니까. 내가 누군가의 인생을 대신할 수 없는 만큼 혼자 감당해야 할 것들이 분명하게 존재했다. 그 어려운 감정들을 온몸으로 맞으며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나는 상처를 주지도 받지도 않는 적당한 개인주의 노선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렇게 키워진 독립심은 점점 사회 안에서 성숙되고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 증거인 것 같았다.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한 후에도 나의 독립심은 비교적 잘 이어져 왔다. 고 생각했다. 가정 안에서의 역할이나 권리 등에 대해 언제나 공평함을 주장해왔고 남편은 그것이 억지일 때나 논리적일 때나 내 의견을 대부분 수렴해주었다. 어쩌면 너무나도 크고 따뜻한 보살핌 아래에 있었던 걸지도 모르지만, 이 모든 것은 나의 현명함과 똑부러진 주장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그 결과, 결혼하기 전 보다 더 개인적인 성향이나 독립심을 발휘하여 해보고 싶은 일들을 시도하는 일상을 보내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주체적인 내가 될수록 더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한 층 더 여유 있고 성숙한 사교성을 지니게 되었다.


그렇게 탄탄한 울타리 안에서 누구보다 독립적인 내가 되었을 시점에 임신을 하게 된 것이다.










심신 미약



잔인하거나 충격적인 장면들의 제목 앞에는 '심신 미약인 노약자, 임산부는 주의할 것'이라는 단서가 붙는다. 임산부는 왜 심신미약이 되는가. 품고 있는 아기가 엄마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기 때문에 태교에 안 좋다는 말들이 많이 들리곤 한다. 그 말도 맞는 말이지만 기본적으로 사람 자체가 감정 기복이 심하고 유약한 존재가 되는 시기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몸의 변화들이 일어나면서 예기치 못한 컨디션 난조가 반복되는데, 내가 내 몸을 컨트롤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사람의 감정을 더 쉽게 무너뜨린다. 어딜 가든 양보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 역시 감사하지만 씁쓸하고 멋쩍으면서도 어쩔 수 없는 감정을 만들어낸다.


쉽게 서운해하고 상처 받던 어린 날의 내가 떠올려진다. 눈물은 여전히 많지만, 그때의 것은 더 격한 부서짐이었다. 감정을 온몸으로 다 맞았던 날들. 요즘의 눈물은 어린 나를 닮아있는 것 같기도 하다. 얼마 전, 영화 '라이온킹' 실사판의 어린 심바를 보다가 과도한 감정몰입으로 펑펑 울었는데, 나도 내가 왜 이렇게 까지 울었던 건지 모르겠다. 심지어 오리지널을 봤던 꼬마 시절에도 울지 않았던 나인데. 심바가 내 뱃속의 아이처럼 느껴졌던 걸까.


하루가 다르게 커져가는 배를 바라보며 앞으로 내 삶이 어떻게 달라질지 상상해보는 과정은 그 기대만큼이나 무섭고 두렵다. 어떻게 상상해봐도 전부다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 부딪혀봐야 안다는 것이 가장 마음을 불안하게 만든다.


가장 강해져야 한다는 다짐을 가장 약할 때 해야 한 다는 것의 무게감이 나를 짓누른다.










남편의 존재



이 무거운 모든 짐을 함께 들어줄 사람은 오직 남편뿐이다. 나의 짐이 곧 그의 짐이고, 그의 짐이 곧 나의 짐이다. 그가 내 짐이고 내가 그의 짐이다. 심신 미약인 내가 의지할 곳이라고는 오직 남편뿐이다. 하지만, 임신과 출산의 모든 과정을 함께한다고 해도 모든 면에서 여성이 감당할 수밖에 없는 몫이 분명 존재하므로 가끔은 혼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다. 그럴수록 더 기대고 싶은 마음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


나는 생각보다 훨씬 더 일찍 남편에게 절대적으로 의지했다. 고약했던 입덧 기간은 나를 집 근처 병원에 혼자 걸어갈 기력조차 허락하지 않았기에 내 심신은 그에게 완전하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임신 초기가 지나 중기, 말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신체적인 의지가 줄어든 대신 심적인 의지가 더 커졌다. 내가 품고 있는 아이의 아빠라는 연결고리가 남다른 감정을 만들어내는 것일까. 퇴근한 남편을 졸졸 따라다니는 껌딱지가 되어버린 내 모습은 이제 익숙한 일상이 되었다.


회사에서 부쩍 바빠진 그는 한동안 일주일씩 길게 지방 출장이나 해외 출장을 가는 일이 잦았다. 집에 혼자 남겨진 나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무기력한 시간을 보냈다. 여행을 가기는 무리였고 영화를 보거나 글을 쓰기에는 의욕이 없었다. 나름 씩씩하게 지내보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누가 바닥에서 나를 잡아끌기라도 하는 것처럼 축 늘어지기 일쑤였다. 누구보다 주체적인 내가 언제 이렇게 되었지. 낯설다. 내가.


아기들의 성장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겪어야만 하는 분리불안의 시기가 있다고 한다. 엄마와 떨어져 있는 것을 불안해하고 타인에 대한 낯가림이 심해지는 시기. 이 때 아이는 엄마를 화장실 볼일조차 맘편히 혼자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고 하는데,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한 아이일수록 이 분리불안은 더 오래 지속되고 심해진다고 한다.


남편과의 극심한 분리불안은 겪고 있는 내가 자존심 상하고 우습지만, 관심에 대한 목마름은 받아도 받아도 모자란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유치한 발상일지 몰라도 이 감정을 거두고 싶지는 않다. 내가 엄마로서 성장하는 과정에 남편의 애정이 큰 자양분이 되어줄 것 같은 막연한 확신이 들기 때문이다.


그렇게 분리불안 증세는 하루가 다르게 쑥쑥 악화되어 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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